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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굴

검룡번세(劍龍飜世)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요개
작품등록일 :
2013.02.06 22:14
최근연재일 :
2015.01.19 22:52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49,509
추천수 :
354
글자수 :
95,124

작성
13.02.2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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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1
추천
26
글자
27쪽

1. 가짜 교주? 진짜 사형! (6)

DUMMY

다음날, 소헌은 도향의 명에 따라 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는 소헌을 보고 있으면 잊고 싶은 과오(?)가 떠오르는 도향이 내린 조치였지만 소헌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아 좀 빨리 와요!”


도향이 퉁명스럽게 소헌의 소매를 잡아끌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소헌은 신문소에서 받아온 신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매는 신문을 읽지 않는 건가? 마도천하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중에 두 배로 읽을 테니까 신경 끄고 빨리 오기나 해요! 이러다 약속한 시간에 늦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 말에 소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신문을 접는다. 그리고는 마을 한가운데서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가 가는 시간이 곧 약속시간이다! 감히 누가 마교의 결정에 이의를 달 수 있겠느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소헌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얼굴을 붉힌 것은 도향이었다. 도향은 소헌의 입을 틀어막은 채 잰걸음으로 그 거리를 빠져나왔다.


“왜 그러느냐?”


“그놈의 마교 타령좀 그만해요! 여기는 마교의 세력권이었던 곳이라 정파에서 하도 들들 볶아서 마교를 미워한다고요.”


“허어, 가렴주구로군. 더러운 정파놈들.....”


마교가 점차 몰락할 때 수많은 무인들이 이곳 십만대산을 찾아와 그곳에 터전을 이룬 사람들을 괴롭힌 건 사실이다. 그러나 명색이 마교인데 그들이라고 달랐을까? 평범한 이들에게는 정파나 사파나 하나같이 무법자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헌은 더욱 정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울 뿐이었다.


“하여튼 길 한복판에서 마교니 뭐니 하는 말 하지 마요. 이 마을은 특히 우리와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이라 마교도를 만나면 몽둥이부터 휘두를지도 몰라요.”


가까스로 소헌을 납득시켰지만 소헌의 걸음걸이는 그대로였다. 하도 답답해서 도향이 매서운 눈으로 소헌을 재촉하니 소헌은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교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것이 아닌가. 도향은 이제 마교의 위대함은 둘째 치고 걸음이라도 빨리 하라는 의미에서 운을 띄웠다.


“사형은 무섭지도 않아요?”


“무엇이 말이냐?”


“당연히 돈을 못 버는 일이죠. 오늘 일을 못하면 내일은 손가락을 빨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요. 지금부터 우린 하루살이나 다름없어요.”


하루살이 마교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도 없었다. 그러나 소헌은 밥을 안 먹어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는지 계속해서 늑장을 부렸고 기어이 울화통이 터진 도향은 냅다 소헌 목깃을 움켜쥐고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헌이 종이인형처럼 휘날리며 도향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기상천외한 광경에 지나가는 곳마다 탄성이 터져 나온다. 도향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발을 놀렸고 그 와중에도 소헌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옷깃이 미친 듯이 나부끼는데도 소헌이 든 신문은 빳빳하기만 했다.


“허억, 허억, 다 왔다...”


도향이 기진맥진해서 숨을 헐떡이며 소헌을 흘겨보았다. 그제야 소헌은 신문을 다 읽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다. 어느새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객잔 앞에 다다른 것이다. 소헌은 내심 그녀의 경공에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흠, 사매는 배달부처럼 정말 빠르구나.”


“허억, 허억, 배달부요?”


“그렇단다. 저기 지나가는 배달부를 보거라. 사매의 경공은 결코 저들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야.”


소헌이 가리킨 곳에는 지붕이고 담이고 가리지 않고 날듯이 뛰어다니는 사내가 있었다. 허리춤에는 수박만한 종이묶음을 달고서도 잘도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고생이네요.”


“그렇지. 월봉이야 많겠지만 대우는 한낱 하오배에 불과하단다.내 폐관을 깨고 나오면서 배달부가 괄시받는 일을 많이 봐 왔지.”


소헌은 정말로 심각한 얼굴로 말했지만 도향의 머릿속은 배달부의 임금이 짭짤하다는 사실만 기억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신문배달이라는 일을 진작 알았다면 교주 체면도 불사하고 지붕을 넘어 다녔을 것이다. 고매한 유학자도 삼일을 굶으면 담을 넘는다 하지 않던가? 하물며 가짜 교주인 그녀에게 일을 가리는 체면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향은 거친 숨을 고르자마자 무려 2층까지 층을 올린 객잔에 들어갔다. 객잔은 낡고 허름했지만 그만큼 전통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객잔만큼이나 늙어빠진 주인이 시큰둥하게 도향을 쫓아내려다 그녀를 알아보고는 제법 아는 체를 한다.


“오늘은 장사 안하.... 끄응, 도향이구나. 저 높은데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힘들지 않으냐?”


“별로요.”


시큰둥한 도향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슬금슬금 다가가 음흉하게 웃으며 도향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대체 왜 일을 그만둔 게냐? 객잔에서 몇 년 만 죽 일한다면 객잔을 준다는 조건은 유효하다만. 그리고 덤으로 이 노인네랑 말동무도 좀 해 주고.....”


주인의 말은 점잖은 듯 했지만 표정은 능글맞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도향의 엉덩이 즈음에 손을 가져댄다. 도향이 무림인다운 민첩함으로 그의 손을 피해내면서 쏘아붙인다.


“양 할아버지가 더 이상 이상한 짓을 안 한다면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오늘부로 제 일은 모두 이 사람이 대신할 거예요.”


도향의 말에 주인의 표정이 돌변한다. 시정잡배 비슷하게만 보이던 그는 십만대산 근방에서 제일가는 객잔을 운영하는 늙은 생강, 양희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희문은 못 미더운 눈으로 도향과 소헌을 번갈아본다. 소헌이 쾌활하게 웃으며 포권을 쥐어 보인다.


“건소헌이라 합니다.”


“일 잘하는 도향이가 데려온 걸 보니 힘 좀 쓸 것 같기도 한데 무림인이슈?”


“마교도입니다.”


도향이 소헌의 뒤통수를 친다.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지만 소헌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여전히 웃는 낯으로 희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향은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정신은 이상해도 일단은 제 사형이랍니다. 어릴 때 행방불명되었다가 고생을 좀 해서 그런가 봐요.”


“그러냐? 에휴, 그놈의 마교가 확 망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 할아버지가 마교 놈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하기만 하면... 내가 그놈들이 다시 나타나기만 하면 끓는 기름을 부어버릴 게야!.”


희문의 으름장에 도향은 찔끔 놀라서 몸을 살짝 움츠렸다. 반면 소헌은 끓는 기름이건 뭐건 죄다 와 보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어쩌면 소헌이 마교를 모욕하지 말라고 외칠 것만 같아 도향은 서둘러서 희문에게 차를 부탁했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차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너무 급하게 와서 그런지 목이 마르네요.


“아, 그래. 일단 좀 앉아라. 어차피 오늘은 객잔영업도 안하니 마음 놓고 쉬어도 될 게야.”


“쉬다니요? 어라, 그리고 보니 왜 손님이 하나도 없죠?”


도향은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식사시간이 아닌 때도 사람이 꽤 있는 곳인데 오늘은 조용하기만 하다. 도향의 의문에 희문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집나간 아들놈이 온대서 장사 다 접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영 안 오는구나. 음식도 다 식어서 다 다시 데워야겠구..... 에이구야, 자식 놈이라고 있는 게 집나가서도 노인네를 괴롭히는구나.”


투덜대면서도 희문의 몸놀림은 꽤 가뿐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집나간 아들이 무공까지 익혀서 금의환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기다림조차 달콤한 유밀 같으리라. 주방으로 들어가는 희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향이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에휴, 오늘은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까나?”


농번기가 아닌 만큼 별로 일거리는 없을 터였지만 도향은 이미 세 가지 정도의 일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잡일을 통해 마교를 이끌어온 역군다웠다.


그런데 객잔에 앉이있는 소헌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객잔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소헌의 기행이야 하루이틀일은 아니었지만 밖에 나와서도 이럴 줄은 몰랐기에 도향은 도끼눈을 뜨고 소헌의 귀를 잡아당겼다.


“뭐 하는 거예요?”


“사매, 다른 건 몰라도 밥은 먹고 일해야 하는데 기왕 온 김에 여기서 밥을 먹는 건 어떤가?”


어째서인지 소헌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고 이에 도향은 내심 꽤 기분이 좋았다. 매사에 여유만만하고 자기위주로만 생각하던 소헌이 웬일일까?

도향은 주머니를 한번 만져보고는 한번쯤은 외식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순순히 소헌에게 맛있는 밥을 먹여줄 생각은 없었다. 서너 번은 튕겨주고 거하게 외식이라도 할 작정으로 냉정함을 가장했다.


“그렇긴 한데 돈이 별로 없어서 외식은 자제해야 되거든요. 기껏해야 소면 정도를 먹으려나요?”


“그렇지, 소면! 그것만 먹을 수 있다면!!”


소헌이 탁자를 탕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으면서 소면이라는 가사만 들어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면으로 간을 본 다음 아쉬워하면 못 이기는 척 요리를 주문하려 했는데 어째 반응이 정반대다.

도향이 당황해서 소헌을 앉히려 옷깃을 잡아당겼지만, 옷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잡아당겨도 옷이 찢어질지언정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팽배했다. 한편 괴의한 노랫소리에 희문이 무슨 일인지 하면서 주방에서 머리를 내민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아, 아뇨. 사형이 또 발작하나 봐요.”


도향이 있는 힘을 다해 소헌의 다리를 퍽 걷어차자 그제야 소헌이 움찔 하면서 반응을 보인다. 도향이 소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내공까지 실어 가면서 어깨를 짓누른다.


“앉아요, 좀!”


“그러마.”


생각보다 순순히 자리에 앉으니 오히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아무튼 소헌의 발작과도 같은 반응은 멎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리라. 도향은 온갖 의구심과 혼란을 담아 물었다.


“소면이 어쨌다고 그러는 건데요?”


“소면.... 그건 내가 산을 내려와서 처음 먹은 음식이었단다.”


“산을 내려왔다는 건 폐관을 깨고 나온 때를 말하는 거죠?”


“그렇지. 그때 시장에서 처음 소면을 먹었는데 정말 천하에 그런 맛이 또 있을지 모르는 맛이었단다.”


소헌은 꿈꾸는 듯한 몽롱한 얼굴로 그때를 생각했다. 오늘따라 감정이 격하게 표출되는 소헌을 보니 소헌이 조금은 상식이 있는 정상인으로 느껴졌다.


“으음... 그렇게 맛있는 소면이 있었나요?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아니다. 맛은 없었지. 굳이 설명하자면 개가 발로 만든 소면같은 맛이었단다. 다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지.”


그렇다면 그 맛없는 소면에 이 난리였다는 것인가. 도향은 기도 안 차서 되물었다.


“그게 뭐가 좋다고 그래요?”

“나는 맛이 있든 없든 소면을 좋아한단다. 후후, 객잔 곳곳에 밴 음식냄새를 맡으니 소면 생각이 절로 나는구나.”


역시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잠시나마 정상으로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도향은 오래간만에 희문의 요리를 맛본다는 사실로 소헌의 기행을 덮어 버렸다.

사실 양희문의 솜씨 또한 이 근방에서 적수를 찾기 힘을 정도라, 십만대산 제일의 숙수가 있는 이 객잔이 최고의 객잔이라 불리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도향은 소헌이 소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정말로 소면을 먹고 끝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그녀 자신이 교주라도 소면을 먹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고기 맛을 즐기는 건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때 희문이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고는 두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투덜거렸다.


“에잉, 이것들을 다시 데우면 맛이 없을 테니 저 녀석들이라도 먹여야겠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희문이 주방에서 제법 훌륭한 요리를 여럿 가져오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희문은 사실 애초에 도향을 봤을 때부터 식사를 대접할 생각이었다.

도향이 귀여운 손녀 같기도 할뿐더러 어릴 때부터 늙은 사부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사부를 여의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이상 도저히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어머,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도향은 함지박만한 웃음을 지으면서 희문에게 감사를 표했고 희문이 은근슬쩍 엉덩이를 만지는 데도 눈썹만 약간 경련했을 뿐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를 대했다.

그러나 그런 반면 소헌은 이번에는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뚱한 표정으로 요리의 여기저기를 젓가락으로 헤집을 뿐이었다.


“노인장, 소면은 없는 거요?”


“에잉? 소면은 왜?”


희문이 정말로 의아해서 묻자 소헌은 더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런 요리를 만들 실력이면 얼마든지 소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소만, 소면은 왜 없는 겁니까?.”


도향이 따끔할 정도로 소헌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소면이 좋아도 그렇지 아들을 위해 차렸던 음식을, 그것도 공짜로 준 성의가 있지 어떻게 저런 말은 한단 말인가. 희문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면은 다 떨어졌으니 그냥 들게. 나중에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먹을 일이 있을 테니.”


“알겠소.”


의의로 소헌은 집착하던 것과는 달리 순순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소헌의 작태에 다시 골치가 썩을 것 같았지만 잘 튀긴 야채를 입에 넣는 순간 도향은 그녀를 괴롭히는 두통이 가시는 것 같았다.


“우와, 맛있어요,”


“하하, 아들놈이 좋아하는 거라 신경 좀 써봤다. 많이 만들었으니 얼마든지 말하거라.”


맛있게 먹는 사람은 숙수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람인 법이다. 희문은 오래간만에 그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면서 음식을 만들었지만 지금 도향은 그런 사실을 간파하고 의도적으로 환호하는 것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희문은 아들이 오지 않아 침울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


그때였다.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며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나동그라지듯 구르며 객잔으로 들어왔다. 희문이 깜짝 놀라서 피투성이 사내를 부축하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사내의 이름을 부른다.


“석일아! 대체 무슨 영문이냐? 네가 왜!!”

“아, 아버지....”


사내는 몇 마디 말을 잇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희문은 옷이 석일의 피로 물들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석일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도향은 젓가락을 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맛있는 음식과 사내의 상처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한 사람의 생명과 저울질할 정도로 희문의 요리가 맛있었던 탓에, 이런 되도 않을 고민을 한 것이었다.


“제가 살펴볼게요.”


도향은 말도 안 되는 고민이라 치부하면서 사내의 용태를 살피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보다 빨리 소헌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혹시 소헌이 나서려는 걸까? 그렇다면 잘 된 셈이다. 도향 자신은 의술에 조예가 별로 없으니.


“노인장.”


“뭐, 뭐요?”


“이 탕의 맛이 오묘한데 비법이 뭐요?”


소헌은 애초에 갈등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다. 도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소헌에게 젓가락을 집어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석일에게 다가가 옆구리에 난 상처를 살폈다.


“으음.... 심각하네요.”


꽤 흉험한 것에 베였는지 상처가 중구난방으로 찢어져 있다. 맥문을 짚어 보니 내공도 상당히 흐트러진 것이 느껴져 석일이 내공에 의해 다쳤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향은 석일의 소매를 찢어 상처를 지혈하고는 그를 제대로 앉힌 다음 명문혈에 손을 얹었다.


“양 할아버지! 내상은 제가 다스릴테니 외상을 치료할 의원을 불러 주세요.”


“아, 알았다. 내 서두르마.”


희문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고 도향은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려 석일의 내상을 다스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사이한 내공에 다친 것이라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도향은 명색이 교주의 진적제자였다. 마도의 가르침이란 정파의 것보다는 패도적이었지만 심오한 면이 없잖아 있어서 도향은 어렵지 않게 석일의 내상을 다스릴 수 있었다.


“흐음, 대체 뭐지 비법이? 사매는 별로 안 궁금한가?”


속없는 소리를 하면서 쩝쩝대다가 내뱉는 말이라고는 고작 저거라니. 소헌의 말에 도향은 울화통이 치밀어 소리를 지르려다 내공이 흩어질 뻔 했다.

하지만 마도의 내공은 약간의 흐트러짐만으로도 석일의 속을 헤집어대려 했고 그러자 석일은 피분수를 뿜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도향은 식은땀을 흘리며 석일의 몸을 휘젓는 그녀의 기운을 통제했다.

잠시 후 석일이 안정을 찾을 때쯤 의원이 도착했고 도향은 긴 한숨과 함께 흥건한 땀을 닦을 수 있었다.


“아!”


소헌이 탄성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도향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계피였군. 계피가 들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향이 소헌의 등짝을 후려친다. 내공까지 실었는지 한방에 등허리의 옷이 터져나가며 요란한 소리가 객잔을 울린다. 도향이 도끼눈을 하고 소헌을 꾸짖기 시작했다.


“사형은 밥이 넘어가요?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교주께서 직접 나섰는데 내가 무에 걱정을 하겠느냐. 그나저나 이제 비법을 알았으니 집에서도 이 요리를 맛볼 수 있겠구나.”


소헌이 탕을 후루룩 마시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도향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맛도 다 달아난 뒤였다.

기진맥진한 채 의자에 걸려 있다시피 앉아서 의원이 석일을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니 잠시 후 석일이 천천히 눈을 뜨며 검을 피를 토해낸다. 그 광경을 본 희문이 화들짝 놀라서 외친다.


“석일아!!”


“크윽! 아버지. 사저가.... 사저가 위험합니다. 마을 밖 숲길에 사저가!!!”


석일은 다시 정신을 잃는다. 의원이 재빨리 손을 놀려 침을 놓자 점점 가빠오던 석일의 숨이 다시 고르게 된다.


“의, 의원나리! 우리 석일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럼 제 아들은 살 수 있는 게지요?”


의원은 재차 희문을 안심시키고는 약방문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는 객잔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음식을 먹던 소헌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초상집에서 익살을 부리는 것처럼 분위기를 흩트리는 소헌을 흘겨보던 도향이 옆구리를 쿡 찌른다.


“그만 좀 해요. 도사도 아니고 무슨 주문을 외워요?”


“주문이 아니라 요리법이란다. 완벽하진 않다만 몇 번 해 보면 금방 모든 요리를 집에서 해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냥 나중에 제가 할아버지한테 요리법을 통째로 알아낼 테니까 그만 좀 해요. 이건 교주의 명령이에요.”


도향은 단단히 으름장을 놓아두고 희문에게 다가갔다. 석일의 안색은 제법 편안한 것이,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잠시 후 석일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는 희문을 부른다.


“아, 아버지...”


“오냐, 애비다. 어쩌다 이렇게 됐누....”


희문이 주름진 데다 굳은살 투성이인 손으로 석일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런데 갑자기 석일이 혼탁했던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혼절했던 몸이 회복되었을 리 만무한지라 석일은 신음하며 도로 바닥에 누웠고 지혈했던 상처에서 피가 흠뻑 내어나왔다.


“얘야, 무리하지 말거라.”


“아, 안돼요. 사저가 위험합니다. 아직 혈랑대에게 쫓기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도와야...”


석일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한다. 이제는 상처를 막은 천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사저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달리 육신은 너무 지쳐있었다. 석일은 상체도 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쓰러져 버린다. 보다 못한 희문이 잔뜩 역정을 부린다.


“이눔아! 그러다 골로 갈 작정이냐? 못 간다. 네 사저고 뭐고 넌 아무데도 못 가!”


“제길, 절 내버려 두세요 아버지. 전 가야 합니다. 사저를 구하지 않으면 저는.....”


수차례 옥신각신 하다 마침내 석일이 불굴의 의지로 몸을 일으키고 객잔을 나선다. 그 광경을 본 희문이 바득바득 이를 갈며 안간힘을 다해 석일을 붙잡지만 석일은 얼마나 고되게 수련했는지 무의식중에도 현묘한 몸놀림으로 희문의 손길을 떨쳐내고 기어이 다시 밖으로 나간다.


“도향아, 부탁이 있다.”


석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연 희문의 얼굴은 마도천하를 그만두라고 말했을 때의 사부 같았다. 도향은 아무도 모르게 살짝 목을 움츠렸지만 곧 다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희문을 마주했다. 이윽고 희문이 도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석일이를 말려다오. 너는 무공이란 걸 익혔으니 저 지경이 된 사람을 말릴 수 있지 않더냐? 원하는 건 모든지 들어 줄 테니 제발 석일이만 구해다오.”


“으음, 우선 일어나세요.”


예상한 대로 희문은 도향에게 손을 벌렸다. 하기야 이런 촌구석에 도향 외에 무인은 없었고 어린 도향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히 강호나 무림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무공으로 사람을 해한 적 없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도향은 사부인 연청석의 말마따나 자기 자신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말 통할지는 미지수였기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희문은 기어이 눈물까지 흘리며 도향에게 매달렸고 도향은 어쩔 줄 몰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소헌을 잡아끌고 객잔 밖으로 나갔다.


“사형! 잠깐 밖으로 나와 봐요.”


“음, 무슨 일이냐?”


소헌이 태평한 신색으로 대답한다.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내일 객잔에 들어올 사람 같다. 도향은 과연 이런 사형이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강호경험이 쥐뿔만큼이라도 있는 건 소헌이었기에 그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확실히 우리 마교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통해 돈을 벌어야겠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매는 이 일을 어떻게든 돕고 싶은 모양이군.”


도향의 설명에 소헌이 제법 날카로운 짐작을 내놓는다. 도향은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네. 돕고 싶어요. 양 할아버지는 제게 이 마을에서 가장 처음 일거리를 맡겨 주신 분이거든요. 하지만 위험하겠지요. 혈랑대라면 중원 곳곳에 신출귀몰한 도적떼잖아요. 정파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그런 곳이라던데요.”


“흠, 그렇지는 않단다. 혈랑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신출귀몰하게 보일 뿐이고 무공 수위도 다 제각각이란다. 진짜배기는 몇 안되지.”


소헌은 마교를 찾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사실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더불어 소헌은 품속에 넣어둔 신문을 펴 보여주며 말을 덧붙였다.


“여기 보거라. 혈랑대가 검존에게 박살났다는 말이 있구나. 하지만 혈랑대는 철저히 점조직에 가까워서 하나가 없어진다 해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거지.”


소헌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금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도향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반색하며 물었다.


“그럼 사형. 우리가 힘을 합치면 혈랑대로부터 사람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흠, 가능할 게다. 이런 촌구석에 있는 혈랑대라면 수많은 혈랑대 중에서도 약한 축에 들지 않겠느냐? 나도 무공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 우리가 나선다면 사람 하나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게다.”


소헌의 말은 희망 그 자체라 도향은 내심 기뻐하며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안에는 인사불성이 되어가는 희문이 맨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도향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양 할아버지. 우리가 도와드릴게요. 그 사저라는 분을 구하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적어도 아드님을 구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도향은 혈랑대의 무서움은 차륜전에 있고 배웠다. 만약 혈랑대의 무위가 생각보다 높다 해도 차륜전을 펼치기 전에 작정하고 도망친다면 최소한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거라는 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쉽게 희문의 청을 수락한 것이다.


“저, 정말로 그래 해 주는게냐?”


도향은 눈을 비비며 기뻐하는 희문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은 완전히 순수한 의도로 그를 돕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희가 목숨을 거는 만큼 약간의 보상을 해 주셨으면 해요.”


도향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가를 요구했다. 만약 돈이 궁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마을 꺼내지 않았을 거라는 자조적인 생각도 들었다. 허나 희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객잔 한구석에 있는 금고를 열어 무려 은자 20냥을 건네주었다.


“석일이만 구해온다면 내 전재산도 아깝지 않다. 받거라.”


꽤 큰돈이라 도향은 은자를 들고 다니기 조금 겁이 났지만 생각해보니 자신은 금자와 전표까지 만졌지 않던가. 그 경험을 살려 도향은 별다른 내색 없이 은자를 갈무리할 수 있었다.


“노인장! 그것 외에도 받고 싶은 것이 있소.”


그럭저럭 마무리되어가던 일의 산통을 깬 건 아니나 다를까 소헌이었다. 소헌은 마치 자기가 일류의 무인인 것처럼 당당히 대가를 더 달라 말하고 있었다. 이에 희문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은자 20냥은 그에게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크흠, 내 가진 걸 다 줬으니 더 줄 게 없네.”


“왜 없습니까? 노인장이 이렇게 남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인지 소헌은 희문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고 순간 도향은 소헌이 늙은 노인을 탐하는 남색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보니 제법 외모에 자신이 있는 자신을 보고 무슨 석상을 대하듯 무신경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남색가와 함께 지냈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 비슷한 오해를 품은 건 희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기겁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에라이 때려죽일 놈! 이 노구가 그리도 탐나더냐? 그래, 마음껏 써먹고 뼈까지 삶아먹어라 육시랄 놈.”


“노인장의 뼈는 됐소. 그보다 노인장이 간직한 요리법을 내게 다 가르쳐 주시오.”


소헌의 의도는 희문의 몸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지식이었던 것이다. 도향은 그 말을 듣자 괜히 화가 치밀어 소헌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소헌은 도향을 힐끗 바라 볼 뿐이었다.


“이런 염병할, 그딴 건 얼마든지 주마! 석일이나 구해와라 이놈아!!”


방금 전까지 울며불며 매달리던 노인답지 않게 희문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소헌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잔을 나섰다. 도향이 소헌의 뒤를 따라 나가다 씩씩거리며 분을 삭히는 희문에게 사과의 인사를 건네고 벌써 저만치 달려 나간 소헌의 뒤를 쫓았다.


작가의말

막장지향입니다.

가볍게 써서 그런지 원래 쓰던건 뒷전이고 이것만 쓰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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