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임 브레이크(4)
“무언은 긍정의 뜻이기도 하죠.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김철수가 여유로움이 묻어 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자세하게 풀어봐야 알아듣기 어려울 테니 비교적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
지금 지구에 도래한 ‘드레인 도어’는 신들의 무분별한 ‘유희’에 의하여 벌어진 일이다.
인간들이 살면서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모아서 버리듯 신들 역시 자신들의 무분별한 ‘유희’로 인해 발생한 신수들을 내버렸고 결국 세계에 부하(負荷)가 생겼다.
괴물이라고는 하나 신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였고 그 숫자가 많아 함부로 처리할 순 없는 노릇이기에 그들의 힘을 약화시킨 후 결계에 가둬 적당한 공간에 던져두기로 했다.
“그 공간이 지구다?”
“네.”
김철수는 내 품안에서 슬슬 정신을 차려가고 있는 나유영을 바라보았다.
“물론 모든 신들이 무책임하진 않았습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세계에 실책을 떠넘기고 피해를 끼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 결과 탄생한 게 바로 ‘헌터’입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되짚어보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가는 걸 느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김철수의 말은 신빙성 있게 다가왔다.
“다만 이곳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세계. 신이라고 해도 온전히 간섭하기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일부분이지만 자신들의 힘을 분할하여 나눠주었고 인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들에게 익숙한 문화형식을 빌어 완성시켰습니다.”
“이··· ‘게임 시스템’을 말하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이쯤에서 나유영이 눈을 떴다.
“아저씨···”
“얌전히 있어.”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해요.”
“네가 뭐가 미안한데.”
나유영은 눈물이 맺힌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 슬픈 얼굴로 저러는 걸까.
“저기 누워있는 신해준이 가진 힘은 브락키노스라는 신이 나눠준 것입니다. 흠, 2%정도 되겠군요.”
“2%?”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고 경악했다.
“인간치고는 훌륭한 적성입니다. 0.1%도 발휘하기 힘든 게 현실이니까요. 1%쯤은 되어야 이 세계에선 S급 헌터로 불리는 거지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신이란 존재에 대한 무게감을 생각하면 저 기준은 납득 못할 게 아니다.
“당신은 칼라디아라는 여신의 힘을 부여받은 겁니다. 그 여자는 지혜의 여신이죠. 그리고 아주 훌륭한 적성을 가졌습니다. 총애를 받아 3%정도를 발휘하고 있군요.”
“···어찌 그런 걸 아는 거냐?”
물어볼 필요가 없었지만 물어보고 말았다. 궁금했으니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믿기가 싫었으니까.
김철수는 싱긋 웃었다.
“왜겠습니까?”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김철수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저도 신이니까 그런 거지요. 예상 가능한 범주 아닙니까?”
“씨발···”
나는 우려가 현실이 되자 욕을 내뱉었다.
“졌다. 졌어. 못 이겨. 항복!”
나유영을 안고 있지만 않았으면 당장 두 손을 들고 빌었을 것이다. 살려만 달라고.
“제가 왜 당신을 죽입니까? 걱정 마십시오.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선택? 그건 무슨 소리냐.”
“전부 이야기해줄 테니 좀 기다리시죠.”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듯 김철수는 입맛을 다셨다.
“지금 제가 발휘하는 힘은 10% 정도입니다. 억지로 이곳에 현계를 하면서 스스로에게만 집중했는데도 겨우 그 정도죠.”
“그것만으로도 다 쳐바르잖아. 씨발.”
“하하, 맞습니다. 참고로 제 힘은···”
“됐고. 빨리 핵심이나 말해.”
“저런, 재미를 모르는군요.”
김철수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말에 따랐다.
“신들은 ‘유희’를 긍정하는 쪽과 부정하는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는 긍정파 신들은 이 과정 역시 ‘유희’였고 조금이라도 따분함을 줄이기 위한 즐거운 놀이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부정파 신들이 하는 일들을 방관하고 구경했죠.”
“딱 봐도 너는 긍정파군.”
“후후후, 맞습니다.”
정말 재수 없는 놈이야.
“어찌됐든 부정파 신들은 신수들이 지구로 전송되어 생명력을 빨아먹는 행위를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1회차가 그 실패에요.”
목소리가 들려서 내려다보니 정신을 차린 나유영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일어설 수 있겠어?”
“으, 아니요. 조금만··· 더 기댈게요.”
“얼마든지.”
나유영은 내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 김철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이라 해도 다른 차원에 대한 간섭은 제한적이었다. 그로 인해 온전하게 인간들에게 경고하는 게 불가능했고 마침내 지구는 파멸에 도달했다.”
“맞습니다.”
“단합되지 못한 인간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유영은 책을 읽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에 너도 한 몫 하지 않았나? 김철수.”
“어이쿠,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합니다. 저는 오히려 주역이 잘 성장하도록 도움을 준 것입니다. 여기서 하는 말로 ‘치트키’의 제공이죠. 아, 이미 칼라디아가 치트키를 주긴 했습니다만 저는 부차적인 요소를.”
“무슨 소리야?”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 내가 질문하자 김철수가 끼어들었다.
“말했듯이 지금은 2회차입니다. 거기 당신에게 안겨있는 여성을 후원한 여신 라니엘 덕분에 말이죠. 그녀는 시공을 조절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신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힘을 가졌죠. 지금은 시간을 되돌려버린 대가로 한동안은 잠만 자야 합니다.”
“쓰읍··· 그러니까 1회차 때 지구는 멸망했지만 라니엘인가 뭔가 하는 신 덕분에 되돌려졌고 지금은 2회차다 이거지?”
“맞습니다.”
“아저씨. 이건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져요. 어차피 끝난 일이기도 하고요.”
“1회차 때 그 여자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잠깐, 잠깐.”
나는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다 필요 없어. 김철수. 네놈이 원하는 바를 말해. 괜히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닐 거 아냐? 긍정파라고는 해도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사악한 음모를 펼치는 것 같지는 않고. 도대체 뭐가 목적이야?”
“저는 그 무엇보다 ‘유희’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어지는지 고민하지요.”
뒷짐을 진 채 사박사박, 걷던 김철수는 우뚝 멈춰 섰다.
“저는 새로운 자극을 원합니다. 이대로는 그 무엇도 안 됩니다. 타성에 젖어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질 낮은 쾌락에 빠져 도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강하게 내뱉는 김철수의 표정은 조금씩 커져갔고 곧 흥분에 젖어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선동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제 나타날 때가 된 겁니다. ‘비수(匕首)’가.”
“서, 설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유영이 바들바들 떨며 경악하였다.
“왜 그래?”
“안 돼요. 안 돼··· 그럴 순 없어요!”
나유영은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녀가 떨어져서 구를까봐 꽉 붙들었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신들은 후원할 대상을 아무나 고르지 않습니다. 인간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가능성이 높은 대상에게 주지요. 당신들이 가진 그 힘은 우연히 얻은 게 아니라 수많은 후보들 중에서 선택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힘을 가졌을 때 ‘드레인 도어를 저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간’이라는 거죠.”
나유영은 뭐가 무서운지 겁에 질린 얼굴을 하였다.
“당연히 그 자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기왕이면 날카롭게 벼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저씨···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왜 미안한데?
점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걸까. 젠장, 젠장!
“자, 축제는 시작되었습니다!”
-딱.
이를 드러내며 웃는 김철수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푸욱.
“···?”
-후두둑!
“쿨럭!”
붉은 피가 날카롭게 튀어올라 내 가슴과 뺨에 달라붙었다.
“커흑···”
슬며시 눈동자를 내리니, 괴로운 얼굴로 피를 토해내는 나유영이 보였다. 그리고 굵직한 촉수가 가슴을 관통한 게 보였다.
뚫린 부분으로 피가 울컥울컥, 솟아나오는 게 마치 화산 같았다.
“미, 미안해요···”
스르륵, 내 손에 걸려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흘러내렸다.
“···유영아?”
조심스레 이름을 불러보았다.
“······.”
대답이 없다.
“유영아? 왜 대답을 안 해?”
조금씩 손가락에 힘을 불어넣으며 나유영의 몸을 흔들었다.
“야, 왜 그래?”
“그녀는 죽었습니다.”
김철수의 목소리가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내가 죽인 겁니다.”
삐이익, 하는 새된 소음이 귓가에 윙윙 울려댔지만 이상하게도 김철수가 하는 말은 똑똑하게 잘 들려왔다.
- 작가의말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악독하군요. 독자님들 더위 조심하세요.
이제 종장은 거의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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