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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램프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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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환생자와 8명의 아내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완결

나무램프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5
최근연재일 :
2022.11.01 20:3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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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3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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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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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북쪽의 환란(4)

DUMMY

***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아벨이 뒤늦게 눈앞의 풍경을 인식했다.


‘여긴···’


지평선까지 펼쳐진 광활한 황야. 안쓰러울 정도로 볼 품 없는 주제에 타지에만 나가면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땅의 끝자락이었다.


‘돌아가야 해···’


귀소본능 따르는 짐승처럼, 그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걷고 또 걸었다. 멋대로 깜빡거리는 하늘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걸었다.


그러다 몇 번째인지 생각도 안 나는 해돋이와 눈을 마주치고, 그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아니··· 지금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저쪽이 아니야.’


그 순간, 그의 뒤편에서 공허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들었다.


“···기어이 다 잊은 거냐.”


흠칫 놀란 아벨이 재빨리 등을 돌렸다.


‘이건 또 뭐야?’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로부터 솟아나 있는 사람의 형체, 옷이며 얼굴이며 전부 시커멓기만 해서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벨이 곧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


그의 전생, 지크 체르타멘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다시 말했다.


“그날의 참극이 남긴 비통과 원한을 전부 잊고, 허망한 꿈에 파묻힐 셈이냐.”


주위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유례없이 잔혹한 기근과 역병이 동시에 네메아 왕국을 유린했던 해, 무수한 병자와 시체가 엉망으로 뒤섞여 널브러져 있는 프라이드킵의 대광장.


그곳에 다시 선 순간, 기억보다 깊은 곳에 묻혀있던 감정이 아벨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천 명의 군대를 손쉽게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어도 그들 중 단 한 명을 구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사제들을 도와 시체를 성문 밖으로 나르는 일뿐이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원망하며 투신에게 처절히 기도했다.


제발 당신의 신자들을 구원해달라고. 이번 한 번만 우리를 구원해주면 누구보다 열성적인 신도가 되어 평생 당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살겠다고.


모든 일의 원흉에게 도와달라고 애걸하는 그 멍청한 꼴을, 놈이 얼마나 비웃었을까.


“잊지··· 않았어···!”


분노로 타들어가는 폐부를 쥐어짜며, 아벨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결국 투신 한 명도 이기지 못했어. 무력으로 신들에게 복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번엔 분노를 억누르고 레이나의 조언을 따라야해. 그래야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어.”


그러자 그림자가 큭큭 웃으며 아벨을 조롱했다.


“이젠 네가 어떤 인간인지조차 잊었군.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아?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나?”


“그게 무슨···”


“제대로 떠올려봐라. 네가 진정으로 원했던 게 무엇인지.”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내 고향, 당신을 섬기는 자들의 나라를 그토록 무참하게 짓밟은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아피아크의 어전, 참극의 진상을 알게 된 지크가 투신에게 독대를 청한 자리였다.


“타고난 자질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형제니 동포니 사소한 정에 얽매여 변두리 작은 땅에 안주하는 겁쟁이. 그런 놈을 우리 종족 전체의 수호자로 벼리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격한 난세의 불꽃이 필요했지.”


옥좌에 앉은 투신은 자기 죄를 부정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솔직하게 지크의 추궁에 답했다.


“네 고향의 일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혼란이 오직 너만을 위해 준비된 무대였다. 덕분에 꽤나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나, 사령관?”


참혹한 진실의 충격에 송두리째 잡아먹혀,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순간 갈피를 잃었다. 그래서 그때 바로 투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대신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만 더 질문했다.


“제 아내들도··· 알고 있었습니까?”


“그 아이들은 모른다. 이건 전적으로 데우스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니까. 그 아이들이 너와 만난 건 내 예상 밖의 일이었지.”


그나마 자신의 사랑마저 신이 부린 농간의 일부는 아니었단 사실이 지크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막았다.


하지만 그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그 후 지크는 형제와 동포들에게 원망 받을 각오를 하고, 그들에게도 진실을 알렸다. 그들 또한 당연히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지크의 것만큼 크지 않았다.


투신은 미래에 닥칠 재앙 여러 개를 앞당기고 중첩시키는 것으로 네메아의 비극을 만들었다. 원통하긴 하지만, 우리 세대가 그것들을 감당함으로써 후손들이 화를 면하게 됐으니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그걸 계기로 우리의 조국은 위대한 제국의 본향이 되어 후세에 크나큰 영예와 영화를 전하게 되었으니, 원망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 시대를, 자신들의 희생으로 무황제 지크 체르타멘을 만든 역사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다 곧 깨달았다.


그래, 저게 소위 말하는 영웅적인 사고방식이겠지.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진정한 영웅으로서 자신의 시대를 살았던 거겠지.


“하지만 너는 아니야.”


그림자가 들려주는 과거의 목소리가 서서히 격앙되기 시작했다.


“후손들 따위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고.”


한평생 형제와 친구, 이웃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즐겁게 살 수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바깥세상에서 어떤 난장판이 벌어지든 상관없으니까 그저 정든 고향만 지킬 수 있기를 원했다.


남들보다 강하게 태어났다는 걸 빼면,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평범한 인간. 그런 나에게 그들의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단 걸 납득할 수 없었다.


또한 용서할 수 없었다. 형제와 동포를 사지로 몰아넣고 얻은 영광, 그걸 원수에게 바쳐 영원한 행복을 손에 넣은 나 자신을.


그 때문에 결국 아내들과의 관계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당신을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야···’


레이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가혹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걸 예견했음에도 말하지 않은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껴서, 인간의 고통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천상의 존재들에게 환멸을 느껴서 내가 변한 거라고.


‘부탁이야. 이대로 우리를 버리지 말아줘. 내가 어떻게든 전부 바로잡을게. 제발··· 한 번만 더 나를 믿어줘.’


이제라도 신들이 인간을 제대로 보살피게 만들면 내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그녀에게, 진실은 훨씬 더 비정하단 것을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내 삶의 의미를 망가트린 장본인이며, 신들은 인간의 고통을 방관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고통 받길 원하기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 와서 신들이 바뀐다고 해도 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말로 그녀가 나와 같은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아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인간으로서의 나를 버리고 오롯이 그녀들을 위해 살아갈 각오도 하지 못했다.


한때 인간이었으나 이미 오래 전 인간의 마음을 버린,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로 행세하며 인간의 잣대에 심판받지 않는 저 끔찍한 악귀들처럼 되는 건 내게 불가능했다.


“결국 네가 선택한 건 비겁한 도주였지.”


아아, 그랬지. 뻔히 실패할 줄 알았던 반란.


거창한 명분은 허울에 불과했고, 실제론 그걸 핑계로 분풀이나 한 번 해보고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다. 매일 나를 좀먹는 후회와 죄책감, 나 때문에 상처 입는 그녀들로부터.


······


금기가 감추고 있던 마지막 기억의 조각을 되찾은 아벨이 무기력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끝내 인간의 나약함을 버리지 못한 네가 천상으로 돌아가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결국 또 스스로 무너지고 모든 걸 망쳐버릴 거다.”


그림자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오고, 주변 풍경이 무너져 어둠에 삼켜졌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끝내자.”


아벨과 그림자가 동시에 어둠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벨의 의식이 아무 감각도 없는 상태에서 무뎌져갔다.


이대로 모든 걸 내려놓으면 불멸의 서품으로도 되살릴 수 없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걸 알면서도 아벨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영원한 안식을 손에 넣고 자신의 숨통을 옥죄는 과거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 그게 지크 체르타멘이 무엇보다 간절히 바랐던 것이니까.


하지만···


“웃기지 마!”


그게 아벨 레버넌트의 바람이 아니었다.


“이럴 거면 왜 죽어서도 그녀들을 잊지 못했어! 그토록 지독하게 후회하고 그리워한 이유가 뭐냐고!”


죽음으로 도망친다고 한들 영혼에 새겨진 그녀들의 눈물 자국으로부터 눈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예전에 뭐였든, 지금의 난 아벨 레버넌트다!”


이번 삶에선 분명히 맹세했다. 잔인한 상처만 남겨두고 도망치려 했던 나를 버리지 못하고 함께 벌을 받은 아내들, 모든 걸 내어주면서 단지 나의 행복만을 바라는 그녀들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 살겠다고.


“과거의 망념이 만들어낸 환상 따위엔 관심 없어! 내 아내들이 더 걱정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해!”


결연한 의지가 빛나는 검의 되어 그의 오른손에 쥐어졌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거치적대고 꺼져!”


눈부신 섬광이 어둠의 세계를 갈랐다.


***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꺼져가던 아벨의 생명이 다시금 타오르는 걸 본 베라티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지금은 필멸자. 신이 내린 죽음의 선고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베라티르 앞의 청록색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며,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져 있는 아벨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었다.


세계의 인과를 엿보는 통찰력을 발휘하여 다시 한 번 아벨을 살펴보고, 베라티르가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의 원인을 찾아냈다.


‘불멸의 서품이 박탈된 게 아니라 그저 봉인되어 있었을 뿐이라고?!’


이런 짓이 가능한 자, 그리고 그자가 속임수로 자신의 눈을 지상에 묶어두고 노릴 목적을 추측한 베라티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그놈이···’


그 순간, 황금색 검 한 자루가 어전의 문을 뚫고 들어와 베라티르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헉···!”


“벌써 제 반역을 눈치 채셨겠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옥좌에 못 박힌 베라티르를 향해, 부서진 문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베라티르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르갈···! 네놈이 감히!”


투신 네르갈이 단상으로 올라와 스승 앞에 섰다. 베라티르가 피를 토하며 제자에게 물었다.


“이유가 뭐냐···”


“그저 오래 전 아내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뿐입니다.”


“이 비루한 놈! 그깟 여자 하나에 홀려 종족의 대의를 져버릴 작정이냐!”


“납득하기 힘드시다면 아나히타가 우리 종족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배신한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하십시오.”


황금빛 검의 표면에 복잡한 기호들이 떠오르고, 시체의 손길처럼 스산한 바람이 베라티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디로부터 불어오는지 알기에, 베라티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황혼의 위상. 불멸성을 가진 존재에게 죽음에 준하는 심판을 내리기 위해, 베라티르가 제자들과 함께 만든 인공 차원.


네르갈은 지금 스승을 그곳에 봉인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베라티르가 점점 깊숙이 파고드는 칼날을 움켜쥐고 악을 썼다.


“내 반드시 돌아와서 너와 아나히타를 단죄할 것이다-!”


그럼에도 네르갈의 무감정한 눈빛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헛된 희망으로 고통을 늘리지 마십시오. 제가 이제야 약속을 이행하는 이유는, 스승님을 제외한 모든 데우스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뭐?”


때마침 네르갈 뒤편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베라티르의 제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네르갈, 카론, 바리, 아누비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무력했던 시절부터 친자식처럼 아끼고 서로 의지했던 첫 번째 제자들의 얼굴을 발견한 베라티르가, 칼날을 움켜줬던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모리유··· 마이론··· 너희마저···”


마이론이 스승 앞에 나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기계장치가 내는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을 배신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이렇게까지 변해버리신 겁니까? 당신은 압제받은 동족들을 위해 해방의 기치를 들어 올렸던 분이잖습니까.”


모리유는 마이론보다 더욱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가 몸을 낮췄다. 그리고 스승의 피 묻은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댔다.


“전부 저희 탓이에요. 저희가 미욱해서 스승님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셨어요. 남은 과업은 저희가 이어갈 테니까··· 이제 그만 모든 걸 내려놓으세요.”


쓸쓸한 빛무리와 함께, 베라티르가 가진 주신의 신격이 모리유에게 거두어졌다.


“······”


서럽게 울고 있는 모리유의 얼굴, 다른 제자들의 침통한 표정을 보아도 베라티르의 마음속에 들끓는 배신감과 분노는 전혀 줄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신좌를 잃어 하잘 것 없는 망령으로 전락한 마당에, 베라티르는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추한 꼴을 보이기가 싫어졌다.


본인조차 남아있는 줄 몰랐던 스승의 마음 한 조각이 오기를 부려서, 베라티르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덧씌웠다.


그가 그대로 모리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다들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 피곤하구나··· 쉬어야겠어···”


그 말을 끝으로 베라티르가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이 황혼의 빛에 물들어 점차 흐릿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


쿠구구궁-


네르갈에 의해 핵심적인 결계와 미궁이 파괴된 여파로, 발할라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리유가 천장의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지는 걸 보며 말했다.


“스승님이 기거하셨던 곳을 이런 꼴로 내버려 둘 순 없지··· 다들 가봐. 나랑 마이론은 여길 수습하고 나갈게.”


줄곧 텅 빈 옥좌 앞에 무릎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마이론을 흘끔 보고, 카론이 아누비스와 바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분이서 대사저와 대사형을 도와주십시오. 바깥의 일은 잠시 저와 네르갈 놈이 대행하겠습니다.”


아누비스와 바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수고해라.”


“고마워.”


카론이 네르갈과 함께 어전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한담을 나눌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따로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사령관은 언제쯤 불러올 거냐.”


“그놈이 희희낙락하는 꼴이 아니꼽긴 하지만··· 딸내미들이랑 손주들을 위해 늙은이 소리를 들을 때까진 내버려둬야겠지.”


“그렇군.”


“오? 전력 공백이 심각하니 어쩌니 하면서 징징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다?”


“사령관이 세운 공을 생각하면 그 정도 포상은 당연하지.”


“이거 웃기는 새끼네. 300년 동안 빡세게 부려먹은 포상으로 3년 치 휴가만 달랑 던져줬던 주제에 뭘 좋은 상관인 척 하고 있어?”


“네놈보단 훨씬 괜찮은 상관이었다. 짬이 날 때마다 같이 술을 마신 적도 많지. 사령관이 가까이에 있는 나보다 네놈을 먼저 친 걸 봐도 모르겠나?”


“지랄 그만하고 게헨나로 꺼져.”


카론은 대꾸 없이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화르륵-


혼자 남은 네르갈의 앞에 청록색 불꽃이 타올랐다. 그 속에 비치는 풍경을 보고, 네르갈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쓸데없이 손이 많이 가는 놈이란 말이지.”


***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아벨이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시야에 들어오는 천장과 벽지, 가구가 낯설지 않았다. 마경으로 가기 전까지 머물렀던, 보우홀더 영주관의 귀빈용 객실이었다.


그의 오른편에선, 디아나가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수척해진 뺨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곧 그녀가 깨어났다.


“여보···?”


혹여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안녕, 공주님. 좋은···”


그가 흘끔 창밖을 보고 인사말을 완성했다.


“저녁이네.”


“여보!”


디아나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남편에게 바짝 다가왔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덴 없어요?”


“괜찮아. 온몸이 뻐근하고 왼쪽 가슴 언저리가 찢어질 듯 아프긴 한데, 별 거 아니야.”


“그게 별 거 아닐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심장이 완전히 파괴됐었다고요!”


그녀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진찰 주문을 시전했다. 다행히 그녀가 본인의 신성력을 처절하게 쥐어짜며 재생시킨 심장은 멀쩡히 제 기능을 하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나히타 님··· 정말 감사해요··· 정말로··· 흐윽···”


울먹이면서 자신의 여신이자 어머니에게 기도를 마친 디아나가 바로 자매들을 부르러 갔다.


이후 아벨은 울면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내들을 달래주느라 한참동안 고생해야했다. 심지어 레이나와 이리스마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통곡했다.


“흐으윽··· 흐윽··· 흐끅···!”


“흑··· 나··· 자기가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흐어어엉!”


디아나가 레이나와 이리스의 등을 토닥이면서, 자매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조금만 진정해. 그이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돼.”


이윽고 디아나를 제외한 아내들이 침실을 나갔다. 우선은 디아나만 남아 병간호를 하고, 다른 자매들은 차분함을 되찾은 뒤에 차례대로 교대하기로 했다.


“내가 닷새 동안이나 누워있었다고?”


디아나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듣던 아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뒤에도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어요. 이리스가 몇 번이나 당신의 의식에 접촉해봤지만 새까만 암흑밖에 안 보였대요. 그리고···”


디아나가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이대로 당신이 깨어나지 못하면, 다시는 당신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


불안한 빛을 품은 황금색 눈동자가 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벨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아. 안심해, 공주님. 이젠 정말 괜찮아졌어.”


그가 아내를 소중히 끌어안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더 이상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헷갈리지 않아. 설령 우리가 멀리 떨어지게 되는 일이 생겨도,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난 반드시 그대들 곁으로 돌아올 거야.”


선명하게 뛰는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럼 됐어요. 당신 상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 바로 돌아가요. 어머님이랑 애들도 우릴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아벨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빨리 돌아가자. 행복한 우리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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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꿈의 종막 22.10.31 45 1 12쪽
» 북쪽의 환란(4) 22.10.28 44 0 19쪽
114 북쪽의 환란(3) 22.10.27 46 0 14쪽
113 북쪽의 환란(2) 22.10.25 49 0 12쪽
112 북쪽의 환란 22.10.24 45 0 16쪽
111 어둠 속의 은둔자(2) 22.10.21 44 2 17쪽
110 어둠 속의 은둔자 22.10.20 58 0 14쪽
109 가족 나들이(2) 22.10.18 53 0 15쪽
108 가족 나들이 22.10.17 57 0 12쪽
107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4) 22.10.14 46 0 12쪽
106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3) 22.10.13 42 0 13쪽
105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2) 22.10.11 46 0 13쪽
104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1) 22.10.10 44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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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4) 22.09.27 5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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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 22.09.22 64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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