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나무램프 님의 서재입니다.

표지

독점 환생자와 8명의 아내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완결

나무램프
작품등록일 :
2022.05.11 10:05
최근연재일 :
2022.11.01 20:30
연재수 :
117 회
조회수 :
14,162
추천수 :
280
글자수 :
732,747

작성
22.10.21 20:30
조회
44
추천
2
글자
17쪽

어둠 속의 은둔자(2)

DUMMY

***


아벨의 침묵이 오두막 내부를 집어삼켰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을 단단히 각오하고 왔건만, 생각만큼 쉽게 마음의 동요를 다스릴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300년 전의 그 시대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거듭되는 천재지변으로 식량은 늘 부족하고, 괴이한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면서 사람들 사이에 불신과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와중에 신들의 눈에 들어 천상에 오르기 위해 전쟁을 갈망하는 놈들이 넘쳐났으니, 전생의 아벨이 황제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평화로워질 수 없는 혼란의 시대였다.


‘그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닌 신들의 수작질이었던 건가. 그리고 어쩌면···’


네메아 왕국에 닥쳤던 참극, 전생의 자신을 전란의 소용돌이 중심으로 밀어 넣었던 그 사건을 떠올린 아벨이 으스러지기 직전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물방울이 톡 떨어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아벨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조용히 울먹이고 있는 레이나가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걱정이, 잠시 그의 다른 모든 감정을 덮었다.


“에레보스 님, 잠시 저희 둘이서만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에레보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쪽 벽에 있는 문이 스스로 열렸다. 문 너머에 속이 꽉 찬 책장이 늘어서 있는 걸 보니 서재 같았다.


아벨이 에레보스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레이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가 일단 손수건을 꺼내 아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괜찮아?”


들끓는 분노를 자상한 미소로 감추고 있는 남편을 보며, 레이나가 입술을 뗐다.


“미안해···”


“당신이 왜 사과해? 에레보스 님이 그러셨잖아. 투신은 발키리들한테도 신들의 죄악을 감췄다고.”


“하지만··· 결국 우리 때문에 전생의 당신이 가장 증오스러운 원수의 수하가 되었던 거잖아···”


설령 자신과 자매들이 진실을 몰랐다고 한들, 그게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원수의 딸을 용납할 수 없게 된 그에게 이대로 버림받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얼어붙은 레이나의 몸을, 아벨의 두 팔이 살포시 감쌌다.


“나를 믿어, 레이나. 당장 그 빌어먹을 신들을 토막 쳐버리고 싶은 지금도, 그대들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없어.”


그녀는 그저 눈물로 남편의 옷 앞자락을 적시며 그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원망해도 좋아. 대신 끝까지 당신 곁에 있도록 해줘.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


가늘게 떨리는 아내의 등을 보듬으면서,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야 이번 삶에서 그녀들을 처음 만난 순간마다 자신의 심장을 난도질했던 죄책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전생의 나는 그대들을 반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들을 버렸던 거겠지.”


상대는 무신과 함께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투신, 애초부터 반란의 성공 가능성이 높았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투신은 그녀들의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와 남편을 두고 한쪽을 선택해야하는 가혹한 상황을 그녀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그녀들과의 인연을 끊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부 실패했어. 그대들은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기어이 함께 벌을 받았잖아.”


그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결국 내 어쭙잖은 배려는, 그대들을 무의미하게 상처 입히기만 한 거였네”


“그럼··· 우리를 안 버릴 거야?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그가 지금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당연하지. 당신 남편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그제야 조금 진정된 레이나가 아벨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흐트러진 표정을 정돈하고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글쎄··· 자칭 인간의 신이라는 작자들의 만행을 저지하고, 내가 겪은 고통을 몇 십 배로 되갚아주고 싶지만··· 다시 싸워봤자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막막하네.”


하지만 이대로 원한과 분노를 내려놓고 그들이 만든 잘못된 질서에 순응하며 살 순 없었다. 그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짓이니까.


그런 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레이나는 그에게 자신과 자매들을 위해 신들과 타협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수단으로 무력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대신 그가 누구보다 신뢰하는 조언자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의 지혜를 불태워 새로운 길을 밝혔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 신들이 에인헤랴르에게 유배형을 내리는 목적은, 고통이 아니라 기회를 주기 위해서란 거.”


“그래. 똑똑히 기억해.”


“지금 이 삶은 신들이 당신에게 쓰는 회유책일 거야.”


“역시 그렇겠지?”


자신이 세운 나라를 평안히 다스리며, 사랑하는 아내들과 귀여운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 전생에선 끝내 이루지 못한 그 소망이 이번 삶에선 완벽하게 이루어졌단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으며, 아벨이 쓰게 웃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효과적인 술책이야. 설령 기회가 또 주어진다고 해도, 그대들과 애들을 두고 내가 예전처럼 투신과 싸울 수 있을지··· 솔직히 확신이 안 서.”


“바꿔 말하면, 그건 그만큼 신들에게 당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증거야.”


신들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했는데도 불구하고, 투신은 그를 완전히 내치지 못했다.


오히려 두 번째 삶을 주어 자신의 딸들과 다시 맺어지게 만들었고, 아나히타와 모리유의 도움을 받아 그의 인생이 최상의 형태로 흘러가도록 안배했다.


레이나가 여태껏 읽어본 그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특혜였다.


“그 점을 잘 활용하면 당신이 신들의 질서를 바꿀만한 영향력을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아벨이 풍부한 정무 경험에 비추어 그녀의 말을 해석했다.


“무력적 수단 말고 정치적 해법을 찾아보자. 이런 뜻이야?”


“맞아. 물론 수천 년 동안 공고해진 체제에 파고드는 게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분명 틈이 있을 거야.”


전생의 아벨이 보여준 위용을 생각하면 데우스들과 싸워서 이기진 못해도, 그들이 하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반대로 방해하는 것 정돈 얼마든지 가능하다.


레이나가 그 점을 지적하며 말을 이었다.


“결국 데우스들도 필요할 땐 어느 정도 당신에게 숙이고 들어올 수밖에 없어. 그때마다 그들에게 정치적인 채무를 지워두다 보면 언젠가 그들을 압박할 수 있는 좋은 패가 되겠지.

그것만으로 그들의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최소한 그들을 분열시키는 것 정돈 가능할 거야. 그럼 나중에 당신이 다시 그들과 맞서 싸우게 되더라도, 저번보다 훨씬 유리하지 않겠어?”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그가 크게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그녀의 볼을 장난스럽게 어루만졌다.


“역시 현명한 아내의 조언에 귀 기울이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 안 그래?”


그녀는 남편처럼 미소를 짓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닿은 그의 손을 소중히 감싸 쥐고, 다짐하듯 말했다.


“믿어줘. 이번엔 반드시 당신이 바라는 미래를 만들어줄게.”


***


서재 밖으로 나오는 아벨과 레이나를 보고, 에레보스가 말했다.


“대화는 잘 끝났나?”


아벨이 대답했다.


“예.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버넌트 부부가 다시 오두막의 주인과 마주앉았다.


“둘 다 표정이 좋아져서 다행이군. 덕분에 내 용건을 꺼내기 편해졌어.”


에레보스가 그러면서 아벨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자네, 정령이 되어볼 생각은 없는가?”


“정령이요?”


“그래. 불멸의 서품은 원래 베라티르가 정령의 축복을 흉내 내서 만든 것, 자네가 정령이 된다면 아즈라엘 시절에 뒤지지 않는 힘을 얻게 될 걸세.”


“지금 제게 전향을 권유하시는 겁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군. 자네가 우리와 함께 데우스 놈들과 싸워주면 더욱 좋겠지. 하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네. 자네만한 전력을 놈들에게서 빼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까.”


에레보스가 씨익 웃고 레이나 쪽에도 눈길을 주었다.


“물론 너와 네 자매들도 함께 받아들일 거란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네르갈 놈 때문에 아나히타의 딸인 너희를 미워하지 않아. 너희 윗세대 발키리 중엔 데우스나 에인헤랴르보다 우리와 훨씬 가깝게 지내는 아이들도 몇 있단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레이나가 말꼬리를 흐리면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벨 개인의 입장만 따지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데우스 세력 전체를 무너트릴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들의 체제를 바꾸기 위해선 외부보다 내부에서 일을 도모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아벨은 아까 레이나와 논의했던 구상을 에레보스에게 간략히 설명하고 정중히 거절을 표했다.


“그런가? 아쉽지만 어쩔 순 없지. 그래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지금의 결정은 거절이 아니라 유보로 해두게. 이후로도 우리는 언제든 자네와 아나히타의 아이들을 환영할 걸세.”


“에레보스 님의 호의를 뼛속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자네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빌지. 그리고··· 베라티르를 조심하게나. 슬슬 놈이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베라티르가··· 돌아온다고요?”


“허락되지 않은 인과를 엿보고 숱한 금기를 범한 대가로, 놈은 1000년을 주기로 500년 동안 존재의 소실을 겪지. 육신은 붕괴하고 영혼만 세계의 이면에 침잠하여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라네.”


그리고 베라티르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지 곧 500년이 되었다.


“놈은 자기 제자들보다 훨씬 극단적이고 과격해. 최대한 많은 에인헤랴르를 수확하기 위해 인간들이 늘 참혹한 전란에 빠져있길 원하지. 지금 자네가 이룩해 놓은 평화를 무너트리기 위해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네.”


그 순간, 아벨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고 레이나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에레보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벨에게 던졌다. 아벨이 오른손으로 그걸 간단히 낚아챘다.


“선물일세.”


“?”


한껏 심각하던 아벨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가 손을 펴고 에레보스가 준 물건을 자세히 살펴봤다.


거의 구에 가까운, 무수한 면을 가진 다면체 형태의 검은 보석. 크기는 어린아이 주먹 정도였고,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무지갯빛 은하수가 무척 신비로웠다.


“어, 언약석?!”


레이나가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가리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멀뚱히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언약석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정령왕이 본신의 일부를 떼어 만든 보석이야. 사용하면 딱 한 번, 아무 조건 없이 그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어.”


정령왕을 신처럼 받드는 엘프들에겐 소원의 돌이라고도 불리는 어마어마한 보물이라고, 레이나가 첨언했다.


“그걸 바로 알아보다니, 듣던 대로 총명한 아이로구나.”


에레보스가 껄껄 웃고 다시 아벨을 향해 말했다.


“그건 지금 나를 대신해 어둠의 정령왕을 맡고 있는 녀석이 만든 언약석이네. 성질머리가 좀 더럽긴 해도 근본적으론 성실한 녀석이니, 성가신 일이 생겼을 때 부르면 도움이 될 걸세.”


“그··· 선뜻 받기엔 너무 귀한 선물 같습니다.”


“부담 갖지 말게. 자네는 기억 안 나겠지만, 녀석은 자네와 나름 인연이 깊거든. 나중에 녀석을 부를 일이 생기면 반갑게 인사나 한 번 해주게나.”


에레보스의 주름진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약간 짓궃어졌다.


“그럼 녀석도 아주 반가워할 걸세.”


***


발할라.


영광과 죄악이 묻힌 역사에 뿌리내리고 하늘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인간의 번영을 상징하는, 주신의 궁전이었다.


이제 막 500년의 폐쇄를 끝낸 그 장소에 투신 네르갈이 당도했다. 그리고 곧장 어전으로 향했다.


‘여긴 볼 때마다 개방적인 재건축이 하고 싶어진단 말이지.’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 데우스조차 쉽게 길을 찾을 수 없는 미궁을 지난 네르갈이, 어전의 문을 넘었다.


그가 단상의 옥좌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로브 위로 긴 수염을 늘어트린 노인 앞에 나아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부르셨습니까, 스승님.”


주신 베라티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네르갈이 옥좌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거리를 두고 한쪽에 서있는 사내에게 살갑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놈이 그걸 정말 싫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무신 카론이 표정을 구기고 네르갈이 오기 전까지 하던 보고를 계속했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네르갈은 제 동의도 없이 멋대로 사령관을 처형하고 지상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그 때문에 300년 동안 게헨나에 공들여 구축한 거점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고···”


게헨나 전선의 책임자로서 현 상황에 느끼는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반란에 동참했던 강철과 격노의 세대 아즈라엘들은 사령관과 끝까지 명운을 함께하겠다면서 아직도 항명 중입니다. 또한 우리의 군세가 약해진 틈을 노리는 드래곤의 공격이 점점 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전선의 축소가 불가피합니다.”


카론의 살벌한 눈빛이 네르갈 쪽으로 흘렀다. 네르갈이 오랜 친구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뭘 봐 새끼야.”


최강의 데우스란 칭호를 양분하는 두 신이 상대방의 머리통을 박살낼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 베라티르가 입을 열었다.


“해명해봐라, 네르갈. 이런 짓을 저지른 의도가 무엇이냐?”


네르갈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스승의 하문에 답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카론 저놈은 일단 어디 가두고 차근차근 설득했으면 됐을 거란 식으로 말하는데, 개소리니까 무시하십시오.”


카론이 두른 기세가 한층 더 험악해졌지만, 네르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그놈은 이미 모든 걸 내려놓고 죽을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미련이라고 할 만한 게 제 딸아이들뿐이어서, 그걸 이용하기로 했던 겁니다.”


살아갈 의지가 없는 자에겐 불멸의 서품도 소용없다. 불멸의 서품을 창안한 베라티르가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생전의 삶에 회한이 많은 놈이니까 자기 아내들과 속세의 희락을 원 없이 맛보면 성격이 좀 둥글어지지 않을까 했지요.”


네르갈이 투덜대면서 사족을 덧붙였다.


“저도 정말 최선을 다한 겁니다. 남의 집 귀한 딸내미를 8명이나 훔쳐간 그 양심 없는 새끼가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챙겨주겠습니까? 대의를 위해 사적인 감정을 내려놓은 거라고요.”


혼란 속 비틀림에서 태어난 그들과 달리 올바른 섭리의 흐름이 빚어낸 기적. 세계의 편애를 받는 정순한 영웅. 그에겐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베라티르는 네르갈이 내세우는 명분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자가 끝까지 우리의 대의에 반기를 든다면, 너의 그 가상한 노력이 치명적인 실책으로 남겠지. 에레보스가 그자를 회유하려고 했던 정황은 왜 보고하지 않는 것이냐?”


네르갈은 돌아온 지 몇 시간도 안 된 베라티르가 데우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땅에서 은밀히 벌어진 일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그의 스승은 옥좌에 앉아 세계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신이었으니까.


“실패한 일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놈 성격에 자기 혼자 편해지겠다고 동족들을 내팽개치는 짓은 못 할 테니까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이상 그자를 지상에 풀어놓아선 안 된다. 그자 때문에 전력 증강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아벨의 주도로 아카드 제국이 내치를 안정화하고 아낙스 제국과 공고한 협력관계까지 구축한 덕분에, 지상의 인간 사회 전체가 유례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다.


에인헤랴르로 거듭날 영웅들의 탄생이 줄어드는 그런 시대는 베라티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루 빨리 그자의 영혼을 회수하고 새로운 난세의 불꽃을 피워야한다.”


“하지만 스승님, 당장은 그럴 수단이 마땅치 않습니다. 놈은 지상에서 개인 단위로는 적수가 없고, 가장 강대한 제국에서 신과 같은 위세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정령과 맺은 협정 때문에 지상에 직접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신들로서는 그를 죽이는 것과 그가 만든 시대를 바꾸는 것, 어느 쪽이든 성공하기 힘들었다.


“일단 그놈이 자연사하고 천상으로 돌아온 뒤에 손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네가 그자와 함께 있는 발키리들이 신경 쓰여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나히타의 노역을 거들기 위해 내게 배운 지식으로 만든 피조물들. 그런 것들에게 정을 붙이고 휘둘리다니··· 많이 변했구나, 네르갈.”


“······”


베르티르가 엄혹한 조롱으로 제자가 입을 다물게 하고 선언했다.


“이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너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마라.”


네르갈이 물끄러미 스승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체념한 듯한 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스승님.”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환생자와 8명의 아내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히로인 일러(타냐&라네즈) 22.09.30 195 0 -
공지 후원 감사합니다(10/10 수정) 22.09.02 101 0 -
공지 히로인 일러(이리스&카밀라) 22.08.19 265 0 -
공지 히로인 일러(디아나&루나) 22.07.30 274 0 -
공지 히로인 일러(레이나&엘렌) 22.05.23 598 0 -
117 꿈의 종막(2) -完- 22.11.01 97 2 16쪽
116 꿈의 종막 22.10.31 45 1 12쪽
115 북쪽의 환란(4) 22.10.28 44 0 19쪽
114 북쪽의 환란(3) 22.10.27 46 0 14쪽
113 북쪽의 환란(2) 22.10.25 49 0 12쪽
112 북쪽의 환란 22.10.24 45 0 16쪽
» 어둠 속의 은둔자(2) 22.10.21 45 2 17쪽
110 어둠 속의 은둔자 22.10.20 59 0 14쪽
109 가족 나들이(2) 22.10.18 53 0 15쪽
108 가족 나들이 22.10.17 57 0 12쪽
107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4) 22.10.14 46 0 12쪽
106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3) 22.10.13 42 0 13쪽
105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2) 22.10.11 46 0 13쪽
104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1) 22.10.10 44 0 14쪽
103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10) 22.10.07 58 0 16쪽
102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9) 22.10.06 40 0 13쪽
101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8) 22.10.04 44 0 12쪽
100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7) 22.10.03 53 0 12쪽
99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6) 22.09.30 53 0 12쪽
98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5) 22.09.29 55 0 14쪽
97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4) 22.09.27 51 0 12쪽
96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3) 22.09.26 58 0 13쪽
95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2) 22.09.23 58 0 13쪽
94 외전: 호수의 요정과 이름 없는 기사 22.09.22 64 1 15쪽
93 특별 공연(2) 22.09.20 82 1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