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함 계획15
“어... 그러니까, 이사달 소장?”
“저를 찾으신 것 아닙니까?”
사혁은 정말 오래간만에 사람을 상대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보기 좋은 구릿빛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찰랑이는 머리칼...
아무리 봐도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 어... 그러니까... 음, 일단 앉게”
“예, 감사합니다.”
잠시간 말 없이 차를 홀짝이던 사혁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참... 그, 헌앙하구만”
“아... 그런 소리 자주 듣고는 합니다. 부모님께서 잘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덕이지요.”
“흠흠... 그렇군.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내자는 있나?”
“딸 둘에 아들이 넷입니다.”
“허, 젊어 보이는데 아이들이 많군?”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아이들 많으면 좋지. 키우는 보람도 더 크고 말이야. 내 아들놈도 말이야 나름 재주가 있는 것인지 이것저것 공훈을 세우고 있더군...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둘다 애 가진 아버지들이라 그런지 아이 이야기로 한동안 웃음꽃을 피우다 이내 사혁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본론을 꺼내기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려 차도 다시 내오고 다과도 다시 내오기는 했지만 아무튼 본론을 꺼냈다.
“그래, 이 소장.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예”
“그래, 본래 계획은 이번 원정까지 해서 여유롭게 군단장급 지휘를 맡을 수 있는 장군을 두 명을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대차게 꼬였지.”
사혁은 ‘얼빠진 녀석...’ 이라며 이 자리에 없는 진하를 구박하고서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해서 내가 직접 여러 장군을 둘러보고 있다네. 그래도 전하께 추천을 드려야 하는데 직접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추천을 잘못하면 그대로 부정부패 혐의로 나락에 갈 수 있었다.
특히나 그 대상이 국왕인 지영이다?
그러면 어떻게 덮을 방법도 없다.
“그리고 그 1 순위는 다름아닌 이 소장, 바로 자네이고 말이야... 진 대장이 훌륭한 장군이라고 칭찬하더군”
“책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보통 그 책무에 충실하는 것이 어렵지. 많은 사람들이 기본만 하자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지만 사실 그 기본만 해도 반 이상은 충분히 간다네.”
사혁은 서류를 슬쩍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 나라에서 진 대장을 제외하고는 자네가 실전경험이 가장 많더군.”
“... 제가 말입니까?”
“이유는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 그야... 그렇겠군요.”
“쯧... 그때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지영이 병권을 쉽게 잡을 수 있던 이유는 두 가지에 근간한다.
첫째는 그때 당시의 제대로 된 장군급은 없다시피 했다는 것, 그래서 당시 병관좌평이던 사혁을 휘어잡아 병권을 빠르게 쥘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그때 그나마 병권의 실권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지방에 별다른 이권이 없었던 것. 즉,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 왜 빠지게 되었나?
그건 한국이 한창 전쟁에 빠져 있었을 때 겪은 한 번의 대패 때문이다.
“뭐, 지금에 와서는 그걸 논해봐야 의미가 없지. 이미 지나간 것을... 그래서, 이 소장?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네만”
“제 생각이라 하심은?”
“탐라, 우리는 그곳을 원해. 예전부터 반도에 신속한 일종의 종속국이야. 이제 다시 주인의 품에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는가?”
“탐라...”
“일본과의 교류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하네.”
제주도를 먹게 되면 일본까지의 항로가 굉장히 쉬워지게 된다.
이것 하나만 해도 제주도는 충분한 이점이 있었다.
“해서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싶어서 말이야.”
“탐라야 뭐 그리 어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고립된 섬에서 나올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있기 마련입니다. 서서히 조여나가면 그만일 것입니다.”
이사달은 품 속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서 펼쳤다.
“보십시오, 이것이 탐라입니다. 전하께서 주신 지도는 나름 상세하게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직접 본 것이랑은 또 다를 것입니다. 짐작과 확신은 다른 것이지요. 그렇기에 탐라에서는 지형을 이용한 공격이나 기기묘묘한 책략 따위는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국에는 시멘트를 비롯한 재료와 우수한 병기, 잘 조직된 군대와 우수한 보급능력이 있으니 한 발자국씩 조여나가면 그만이지요.”
“말은 좋네만... 너무 오래 걸리지 않나?”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병사 한 명을 키우는 데 들어간 시간보다는 적을 겁니다, 장관님”
“흐... 하핫! 그렇구만, 움직이는 요새... 그거 자네의 생각이었군?”
“보잘것없는 의견이었을 뿐입니다.”
“흐음... 아니야, 아니야. 보잘것없는 의견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이목을 집중할 리가 없지...”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낫다는 듯이 되물었다.
“헌데 왜 자네 이름으로 하지 않고?”
그도 그럴게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전술과 전략을 구체화한것이나 다름없었다.
결코 작은 일은 아니었고 분명히 진급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구상 자체를 진 중장... 아니, 대장님께서 하신 겁니다. 저는 거기에 살을 붙인 것에 불과하지요. 분명 그곳에도 그리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만...”
“그래...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이거... 생각보다 좋은 인재를 얻은 것 같구만”
“그리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래... 이거 잘만 하면 맞출 수도 있겠어...”
“이제 가십니까?”
“아이고, 연 장군님 아니십니까?”
연개소문은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허, 이젠 노 장군님께서 그리 불러주시니 영광입니다.”
이젠 장군으로 진급이 확정난 노진 대령은 짐을 뒤적이다가 이내 술병들을 꺼냈다.
“좋은 손님이 왔는데 이거 그냥 보낼 수는 없지요. 어째... 한 잔 하실랍니까?”
“허, 좋지요. 장군이 가면 한국의 술을 마실 기회는 앞으로 많지는 않을 테니”
“사 와서 먹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좀 팔아 주시오, 사 마시게. 하여간 맛있는 건 자기들끼리만 먹지”
연개소문이 작게 투덜거리자 노진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술병을 땄다.
“에이, 암만 그래도 전하께서 직접 주신 술을 함부로 땁니까? 내, 연 장군이었으니까 딴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림도 없었습니다.”
한국 군사고문단이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좋건 싫건 사사건건 얽힌 두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친해지고 이제는 이런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거의 6~7년 정도를 부대끼며 지낸 사이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왜, 말년병장끼리는 친구 아니면 웬수라고 하지 않던가.
술을 잔에 따르자 청아한 대나무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크으... 이 죽엽청은 언제 마셔도 좋군”
“남은 술은 뭐... 드리고 갈까?”
“후, 그것도 좋을 것 같은데.”
목을 확 태우면서도 달달한 맛이 감도는 그 맛, 연개소문은 이 맛이 참으로 좋았다.
“정 원한다면 그러지. 연 형이 원한다는데”
“거 참 고맙네”
“알면 좀 잘 하쇼.”
연개소문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얼레? 사람이 말하는데 웃기나 하고 말이야”
“쯧. 내가 자네 때문에 말랑말랑 해졌다는 소리가 얼마나 들리는 줄 아나?”
“사람이 원체 딱딱하기는 했지? 원래 사내란 필요한 때만 딱딱해져야 하는 법이지, 항상 딱딱하면 어쩌나? 흐흐...”
“내 워낙에 힘이 넘쳐서 말이야. 아 동생은 이런 경험이 없겠구만?”
“허, 한국 남아를 우습게 보는 것 아니우?”
“한국 남아가 아니라 자네를...”
“흥, 지난번에 기루 갔을 때 먼저 뻗은 위풍당당한 고구려 남아는 어디 가셨나 모르겠수?”
“에이, 그건 내가 일에 지쳐있을 때 가서 그런 거고.”
두 남정네는 서로 한참을 시시덕대다가 술이 어느정도 오르자 연개소문이 슬며시 물었다.
“이제 가서 어쩔 생각인가?”
“흠... 그래도 소장 진급은 확정이니 여단장급 자리는 충분히 노려볼만 할 거긴 한데...”
“한데?”
“이상하단 말이지... 그렇지 않수?”
“... 이상하기는 하지.”
7년간의 시간.
분명 짧은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군사고문단의 업무를 생각해 보자면 엄청나게 긴 시간도 아니기는 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지금 굳이 교체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무슨 일이 날 리가 없지 않나?”
한국 자체가 약한 나라가 아닌데다가 고구려라는 든든한 방벽 겸 혈맹이 있다.
거기다 얼마 전에는 연해도를 성공적으로 편입하면서 자신들의 전투력을 증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진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군사고문단장을 교체한다?
문제는 없지만 통상적으로 보자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네만,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한국이 군사행동을 하려는 것임에 틀림없네”
“연해도 원정 끝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원래 원정 준비라는 게 제대로 하다 보면 몇 년은 쓰지 않나.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대규모 군사 작전을 준비중에 있고 그곳에 쓸 지휘관을 부른다는 것인데...”
“굳이? 저를?”
이야기만 놓고 보면 연개소문의 가설이 가장 그럴 듯 했고 실제로도 진실이긴 했지만 노진의 의문은 더욱 진해졌다.
“진하 중장님... 어쩌면 진급하셨을지도 모르는 그분이 있는데 굳이 저까지 부를 이유가...”
“모르지, 나야. 하지만 노 동생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이래뵈도 만 몇천 명 단위를 훈련시키고 지휘까지 해본 노진이다.
거기에 오랜 기간 고구려에 있으면서 고구려의 기병 전술과 궁병에 대한 노하우를 상당 부분 습득할 수 있었다.
거기다 그가 훈련시킨 부대를 이끌고 크고 작은 국지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니 실전경험이 없다 하기도 곤란했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보면 노진은 아주 훌륭한 지휘관으로 키울만한 떡잎인 것이다.
“동생도 높게 올라 가야지. 별 두 개, 세 개를 넘어서 육군장관인가? 거기까지 가 봐야 하지 않겠나?”
“에잉, 육군 장관은 무슨. 상급대장까지만 가도 감지덕지지 뭐...”
애초에 지금 한국 육군에 상급대장이라고는 육군장관을 겸한 사혁 한 명에 대장이라고는 이번에 진급한 진하 한 명이었으니 상급대장까지만 가도 육군부에서 서열 삼 위 안에는 충분히 들 수 있었다.
“쯧, 꿈은 크게 가져야지. 뭐, 노 동생이 우둔한 인물이 아니니 알아서 잘 하겠지. 건배나 하세나”
- 작가의말
너무나 아름다운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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