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25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가을
일본, 교토
일본에 내전이 난지도 어언 십 년이 넘었다. 내전이 이 정도로 길어지니 양 조정은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야, 이거 안 되겠다. 좀 쉴까?”
“그럴까?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둘 다 나름 천황 딱지 달고 있는 사람들이고 결국엔 내전이니 제 살 깎아 먹기가 아닌가. 백성들이 픽픽 죽어 나가는데 굳이 더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서로 흘겨보며 각자 내정 챙기기에 들어갔다.
“우선 농지부터 복구합시다. 일단은 먹을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요.”
“도로도 다시 깔고 인구 조사도 다시 해야 합니다! 도저히 맞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지난 시간 동안 피 터지게 싸우며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인구가 국력인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기득권도 칼 맞고 창에 찔리면 죽더라.”
“딴지 걸 놈이 없는데?”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긴 전쟁이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게 한 것이다. 사실 이게 딱히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이 원래 전쟁이라는 게 비효율적인 국가에서 하면 나라 말아먹기 십상인지라 나라를 말아먹지 않기 위해서도 효율적이게 될 필요가 있었다.
“관료제도 개혁한다!”
“옆집에 좋은 게 있군.”
원래 창조보다는 모방이 더 편하고 빠른 법. 특히 당나라는 일본에서 봐도 저무는 것 같았지만 발해는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율령제를 말아먹기도 했으니 안 쓸 이유도 없었다.
기존 관료제와 발해의 체계가 어느 정도는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고 많이 봐왔던지라 이식은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아, 우리 제도 좋아요. 자, 이 부분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냐면...”
그리고 발해의 부채질도 한몫했다.
“우리 주변의 강국이 알아서 우리 영향력을 넓혀주겠다는데 왜 거절함?”
결국, 이런 게 유·무형적 힘 아니던가. 일본에서 발해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발해가 거절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일본을 중요한 파트너로 대하던 발해라면 더더욱.
“문제는 발해의 철포대입니다.”
남조와 북조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육천여 명의 총병이었다. 일본 내에서 가장 발달된 무기와 전술을 가진 그들은 전쟁 자체를 뒤엎을만한 힘은 없었으되 전투정도라면 충분히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발해의 교육을 받은 총병들은 저급 인력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최정예 병종이랑 비빌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라면 이 소총병을 상대할만한 병종이 충원이 어려운 최정예 병종 정도는 꺼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발해에서 무기를 수입할 도리가 없겠소?”
“불가할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다면 무슨 대책이라도 내야 하지 않겠소?”
내정 발전? 국가 체계 개혁? 전부 좋다. 하지만 이건 전부 ‘승리’라는 결괏값을 도출해내기 위한 과정 아닌가. 총이라는 신무기로 압박하면 결국 승리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과 인력을 퍼부어야 했다.
“화약을 어찌 만드는지만 알면 좋으련만...”
몇 번에 이르는 전투 끝에 남조는 몇 정의 조총을 얻을 수 있었다. 문제라면 그놈의 화약을 도저히 수급할 수가 없어서 문제지.
하지만 그걸 떠나서 남조나 북조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잘 훈련된 보병의 필요성이었다. 둘이 볼 때 발해 총병의 선전은 총이라는 신병기도 있지만 잘 조직된 보병이 뒷받침된 것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겨울
필리핀 일대
“아, 전쟁 더럽게 하네.”
한 톤도 왕국 해군 입에서 나온 욕설은 톤도 왕국 해군 모두가 공감하는 말이었다. 아니, 물량도 정도가 있지. 저렇게 쏟아내면 뭐 어쩌란 말인가?
“심지어 전 함선 신병기를 탑재한 것으로 보였는데...”
아닌 함선도 몇 척 있지만, 절대다수가 새누리급인 것을 생각한다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동등한 숫자라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돌격해 백병전을 통해서 풀어가면 된다지만 숫자가 저렇게 많으면 접근하기도 전에 전투 불능이 되거나 탈주하는 병력이 많아질 것은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다른 왕국들은?”
“일부는 응하는 듯 했으나...”
“설마”
“예, 설마가 맞습니다. 일부는 놈들에게 투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이때의 필리핀은 크고 작은 국가들이 난립해 있었다. 그 규모는 크게는 톤도 왕국처럼 왕국이라고 칭할 수 있을 크기부터 작게는 여러 부족의 연합체 정도인 곳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영세한 왕국들은 굳이 죽자고 발해와 피 터지게 싸울 이유가 없었다.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뱀 정도 되는 동물이니까. 살다 보면 이무기도 되고 용도 되는 뱀이 한두 마리 정도 있겠거니 싶으니까 나오는 말이다.
용의 꼬리와 지렁이의 머리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용의 꼬리 쪽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막말로 용을 물리친다고 해서 저 뱀 소굴 사이에서 지렁이가 살아남을 거로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일찍 행동해서 용의 꼬리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나 받아먹는 게 낫지 않겠는가? 어쨌건 꼬리라지만 하늘을 날고 날씨를 다스리는 용 아닌가.
그런 이유로 옥해도 총독부의 업무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과 언어를 가진 민족들을 소수라지만 잘 융화시켜야 하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발해쪽 상황이 좋았냐고 한다면... 딱히 그것도 아닌 것이-.
“아니, 완전 신삥들이잖아? 이제 배나 좀 모는-”
“그야말로 전진 후진 정도만 간신히 하는군요. 제대로 써먹으려면 최소 일 이년은 굴려야겠습니다.”
해군에서 이등병, 일병은 말 그대로 잡부에 불과했다. 물론, 숙달된 장교나 부사관 몇이 탔다고는 하지만 그래픽카드는 4090인데 모니터가 480p인 상황에 뭐 어쩌겠는가.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겨울
서울, 육군부
“다시 붙으면 우리 쪽도 피해가 클 겁니다.”
“당분간은 철저히 현존함대 전략으로 움직여야겠군.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이면 의심당할 수 있으니 정예함 셋에 신예함 둘을 붙여서 통상파괴를 시행하게.”
“지난 결정을 두고 육군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그 말이라는 것이 ‘육군의 제안에 해군은 반대한다!’. ‘해군의 제안에 육군은 반대한다!’와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해하네. 육군에 배정된 대포를 전부 끌어다 해군에 배정했으니.”
멀쩡히 쓰던 자기네 무기들까지 가져가는데 말이 안 나오면 이상했다. 심지어는 최전선 요새의 요새포까지 뜯어다가 해군에게 배정했으니 오죽할까.
짧은 시간 내에 그 많은 함선에 대포를 적재할 수 있던 것에는 이런 뒷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라고 할까, 육군에 배정된 예산을 늘려 95mm도 개량된 녀석으로 보급한다고 하지 않나.”
130mm 중포의 포구제퇴기에서 확실한 효과를 본 조병창은 기존 기왕 이렇게 된 거 95mm 포도 반동을 줄이기 위해 포구제퇴기를 장착하기를 원했고 육군 역시 대포를 받을 거라면 역시 성능이 좋은 게 좋았던지라 성사된 거래였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 만큼 소총에도 신경을 써주십사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만.”
“차세대 개인화기 사업은 진행 중이지 않나?”
“하지만 현세대 소총을 전면적으로 대체할 소총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만...”
“화약을 쓰지 않는 총까지 나왔다고 들었네만”
아, 그 공기총 말이군.
“급진적인 설계지요.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설령 성공한다고 한들 대량 생산이 가능한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격총도 그런 경우가 아닙니까?”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장점은 쉬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인데도?”
그 물음에 견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화약을 쓰지 않는다는 건 엄청나게 매력적인 일이었지만-
‘그걸 위해서 천번은 펌프질을 해야 한다니. 그런 걸 대체 어디에 쓰는데’
말이 천번이지 최소 한 시간 동안 펌프질을 하라는 소리 아닌가.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이런 총을 지급했다가는 총알이 앞에서 날아오는 게 아니라 뒤에서 날아올 수도 있었다.
우스운 것은 그렇게 말하는 그조차도 화약을 쓰지 않는다는 매력은 포기하지 못해서 공기총은 여전히 차세대 개인화기 개발사업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 2차 예선이 있다지?”
“예, 7월에 합니다.”
“나도 보러 가지.”
그 말에 살짝 부담은 되었지만,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부담을 털어낸 그는 넉살 좋게 웃었다.
건국력 142년(서기 920년) 겨울
발해 일대
거대한 기계가 증기를 내뿜으며 물을 퍼 올리는 모습은 이제 주요 광산이라면 그다지 어색한 모습이 아니었다.
“어이, 정 씨! 와서 운반차나 날라!”
정 씨와 같은 초보자를 제외하고는 주요 국영 광산의 인부들은 이미 이 따뜻하고 연기 나는 기계에 매료된 지 오래였다.
“물을 자동으로 퍼준다고?”
“아아, 숭배합니다.”
이제는 물을 퍼 올리는 대신 석탄을 넣어야 했지만, 인부들 처지에서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여름에는 온통 땀범벅이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겨울에는 오히려 따뜻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거기에 증기기관의 힘으로 더 강한 송풍기를 이용할 수 있었으니 채광 작업이 한결 편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제 낑낑대며 크레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증기기관이 알아서 크레인을 움직여 주니 사람은 그저 조작 정도만 하면 그만이었다.
제아무리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크레인이라지만 무거운 광석들을 운반하다 보면 힘에 부치기 일쑤였는데 이젠 삽질과 조작만 하면 그 무게는 그야말로 조상님이 들어주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아아, 숭배합니다.”
이런 반응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숭배의 연속에 입이 찢어져라 웃는 건 바로 연구원들이었다.
“하하! 우리 자식놈이 이렇게 대단하다고!”
“상부에서는 빨리 둘째를 낳으라는데요.”
지영은 개발을 독촉하는 한편 종종 들려 기억나는 대로 힌트를 무지성으로 던져대고 있었다. 그중 도움이 되었던 것 한가지는 바로 휠이었다. 바로 와트식 증기기관의 구조 중 일부였는데 불행한 점이라면 지영이 아는 지식은 거기까지였다. 상식적으로 지영이 기관들의 구조를 상세히 알면 그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걱정마라. 이번에 예산 뿌려서 수학자에 기계공에 왕창 협력하기로 했으니까.”
감히 자신하건대 현재 발해에서 이 분야에서 이보다 더 전문적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있게 증기기관을 쪼물락거리러 갔다.
그리고 웃는 자가 있으면 우는 자가 있고, 비오는 날이 있으면 해 뜨는 날이 있는 법. 이들의 행복은 다른 이들의 불행을 가져왔으니-.
“안 돼!!! 우리의 예산이!!”
반사로 개발사업의 예산은 말 그대로 팍팍 깎여나갔다.
연구소장과 포항군수의 예산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노력은 신임 재무부 장관, 왕건에 의해 무참히 썰려나갔고 남은 것은 깎인 예산과 상처 뿐이었다.
“내화재에 한두 푼 드는 게 아닌데...”
까놓고 말해서 고로의 설치비는 연구비와 내화재 비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리고 열 효율을 높여 고열을 내는 반사로는 당연히 질 좋은, 최상급의 내화재가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반사로 개발사업의 가장 큰 적이었다.
철을 완전히 녹여버리는 열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발해의 개발자들은 아주 신박한 방법을 생각해내는데...
“소장님,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건... 흠,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중석(텅스텐) 같네만.”
“말씀하신대로, 이건 중석입니다.”
현대인에게는 익숙한 텅스텐. 이 텅스텐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그 중 하나는...
“이 중석이라는 놈은 녹는점이 무척 높지요. 지금까지 이 중석을 녹여본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걸로 반사로를 만들면...”
물론 중석을 갈아내서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로 반사로를 만들어야 하니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값이 들겠지만...
“일단 만들면 예산을 타낼 수 있지.”
언제는 연구자가 예산 많이 들 거 걱정하고 개발했던가. 그리고 뼈에 사무치는 원쑤, 신임 재무부 장관에게 일거리와 복통을 선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괜시리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녹여서 쓸 수도 없는 쓸모없는 돌덩이 아닌가. 왜 이름이 단순한 ‘중석’이겠는가. 무겁기만 하지 딱히 쓸모는 없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좋은 이름이었다. 현대인이 보면 기겁할 일이었지만.
- 작가의말
텅스텐 반사로! 발해 기술진들의 온몸 비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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