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24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봄
발해, 옥해도
“다섯 척 중 두 척만이 돌아왔다라...”
“생각보다 큰 희생이 있었습니다.”
참모장의 말에 초원택은 냉정하게 자르며 답했다.
“생각보다 작은 희생이지.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벌었네.”
그 말에 참모장은 순간 멈칫했으나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2함대는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당시 2함대가 지켜야 하는 것은 총 세 개로 나뉠 수 있었다.
첫째, 옥해도 정착지를 경유하는 상인들의 함선. 최소한 옥해도 인근 해역에서 약탈을 당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둘째, 2함대 자체. 함대가 없다면 옥해도 정착지를 지켜낼 수 없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셋째, 옥해도. 최악의 경우에는 위의 둘을 다 잃고 공멸하더라도 옥해도 본진을 지켜내야 했다. 본진이 따인다면 발해 해군으로서도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으니 당연했다.
이러한 사실은 상대적으로 전력에서 밀리는 2함대에게 엄청난 부담을 선사했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건 곧 공격당할 곳이 많다는 것이고 공격의 시점과 장소를 정하는 것은 오로지 공자의 권리였으니.
아무리 일부를 포기한다고 쳐도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후에 옥해도를 장악하기 위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걸 2함대 상층부는 대강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의 항구와 선박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네. 명중률 5푼(5%) 정도의 다연장포라고는 하지만 광대한 지역이 대상이면 백발백중이나 다름없지.”
이래서야 적도 무작정 공격해 들어오기 어려워졌다. 이전에는 공격에 무조건적으로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있었으나 이제는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으니까.
“상부에서는 반년만 버틸 것을 주문했습니다.”
“반 년...”
이미 발해의 해군 공창에서는 3교대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밤이라서 효율이 떨어진다고? 하! 효율이 떨어지고 위험한 것뿐이지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나!
지엄하신 국왕께서 그런 주문을 하는데 일개 조선소장이 대체 무어라 하겠는가. 기술자들에게 다행인 사실은 조선소장쯤 되면 능력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야간에 할 작업과 주간에 할 작업을 분리한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작업을 야간에 함으로서 사고를 확 줄였으니 과연, 경력의 짬이란 어디가지 않았다.
“못 버틸 것은 없지. 적이 공격능력을 갖추기까진 적어도 이삼 개월은 필요할 걸세.”
그리고 구형 호위함이나 전투함은 크게 다쳤으나 새누리급은 아직 멀쩡했다. 이는 발해 해군이 부족하나마 공세 역량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까진 참모장이 건의한 통상파괴를 감행하지.”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가을
평양, 왕립 평양 조병창
“싹 다 끌어내세요.”
“사, 살려주십시오! 전하!!! 전하아아!!!!!”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며 끌려가는 이들을 보고 조경은 걱정스럽다는 듯 조언했다.
“너무 과격하신 것 아닙니까? 한때는 충성스러운 병사요, 장교였다 들었습니다만-”
“딱히요. 이 정도면 숙청치고는 온건한 것 아닌가요?”
숙청이라는 두 글자에 조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다연은 말을 이어나갔다.
“폐하께선 업무의 지시가 꽤 명확하신 분이세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애매모호하게 ‘전권’이라고 칭하지는 않죠.”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이해가 갔다. 이번 사례를 들어보자. 이번 사례에서 이다연의 전권은 어디까지인가?
왕태녀로서의 전권인가, 아니면 조사 총괄자로서의 전권?
“그리고 제 명령에 비밀경찰국이 움직였죠. 이 나라에서 비밀경찰국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단 두 부류에요.”
국왕 이지영, 혹은 그의 인가를 받은 자. 그 둘이 아니라면 내무성 총리가 오더라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방산비리를 파는 것치고는 국왕의 전권은 너무 과하죠. 더 원하시는 것이 있는 거예요. 비서실장님이 오신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 시겠죠?”
조경은 새삼스럽다는 듯 이다연을 바라봤다. 자신이 온 지는 고작해야 반나절 정도. 그 전의 힌트는 고작해야 전권이라는 모호한 단어 하나. 그 하나로 비밀경찰국을 움직이고 발해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재향군인회를 깔끔하게 숙청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갓 성인이 된, 제왕학은 배우지도 않은 여자가 하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호하고 깔끔한 숙청이었다.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전하.”
“생각해보면 간단하잖아요. 겨우 방산비리를 수사하는- 물론, 방산비리는 중요한 문제지만 이 정도 건수로 왕태녀를 시험하기에는... 규모가 작죠.”
그렇게 말하며 살생부에 죽일 사람을 한 명 더 추가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엿한 정치가요, 위정자였다.
“이 분은... 좀 애매하네요.”
이다연은 그리 말하며 이름 하나에 열심히 원을 쳤다.
‘전 연합함대장 장건영’
이 숙청의 시발점을 제공한 인물이라면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숙청에 엮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법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문제는 없어. 문제라면 아버님께서 직접 단행한 인사가 깨어졌다는 것 정도...’
장건영이 내쳐진 건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되게 애매하네. 장건영을 지금 내쳐버리면 발해 최고의 신식 해군 전문가가 그대로 날아가. 하지만 그대로 두면...’
이 숙청의 핵심은 은퇴 후에도 적극적으로 군에 개입하는 인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게 크건 사소하건.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로 장건영이었다.
“채비하세요, 갈 곳이 있으니.”
직접 만나보면 가닥을 잡을 수 있으리라.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외투를 걸쳤다.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가을
당나라, 장안
“이, 이게 말이나 되오?”
어지간한 일에는 모두 면역이 되었다 여긴 이존욱은 치솟아오르는 현기증을 이겨내지 못해 털썩 주저앉았다.
고작해야 철-, 철이 고작이라고 할 만한 물건인지는 차치하고 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단 장인은 없고 목수도 이전에 비하면 초짜라고 할 만한 것들뿐이며, 종이 장인은 씨가 말랐으며, 도자기 장인도 고작해야 토기 몇 점을 구워내는 정도...?”
이존욱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이게 나라냐?’라는 말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눌러낼 수 있었다.
이엽도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자신마저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애써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토목, 산학, 의원, 상업, 농업, 혹은 그 외의 다양한 산업... 사실상 전 산업에 걸쳐서 장인들과 기술자들의 씨는 거의 말라버린 상황이었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바로
“책도 없다니 이게 무슨?”
“긴 기근에 전부 팔았다고 하오. 몇 권은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몇 권이 전부요.”
냉정하게 말해서 자체적으로 산업을 열심히 키워온 키탄에게조차 밀릴 지경이었다.
“화, 황조만 그런 것이겠지...? 역적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이존욱은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몰랐지만, 조정의 중신들은 모두 이에 공감했다.
그래, 차라리 일부 지역에서만 없는 것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군사적 역량은 아직 남아있으니 다른 지역에서 강탈해서 산업을 다시 키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조차 없다면 산업을 거의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 하잖은가. 아무리 중원이 부유하다지만 막대한 예산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발해는 몇십 년에 걸친 공작으로 당나라의 산업을 말 그대로 파탄을 내놓았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의 힘을 빼놓을 최선의 수라는 것을 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산업계가 괴사하더라도 당나라는 강국이겠으나 이전의 압도적 강국의 위치에 자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이라면 발해의 공산품들이 당나라로 파고들어 당나라의 연약한 산업을 목조르기엔 충분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흐르니 당나라 조정은 일제히 발해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도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산업이 괴사할 리는 없었다. 이게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당나라가 이런 상황에 빠지면 가장 이득을 보는 국가는 역시 발해였다.
문제라면 발해에 따져봐야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이놈들은 교묘하게도 증거를 남기지 않거나 혹은 남기더라도 ‘정상적인 상업’의 범주 내에서 남겼던지라 추궁하기도 애매했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급히 발해에 사신단을 파견했다.
따지기 위해? 그게 이빨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그러니 이들이 가서 한 말은 당연히-
“살려주세요...”
를 아주 거창하게 포장하고 포장한 것이었고 발해의 답변은 ‘소국이 대국에게 하는 변명 개정판’이었다.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가을
발해, 옥해도
“제, 제독님... 저... 그러니까... 대함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까?”
“몰라... 저게 뭐야...”
바다 위를 한가득 메운 배는 당당하게 발해 해군기를 나부끼며 옥해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수량이 어찌나 많았는지 순간적으로 수평선에 돛이 달렸다 여길 정도로.
“충성! 제독님. 임시 지원함대장 박정진입니다.”
“충성. 어... 그래, 저게 다 지원인가?”
“그렇습니다. 새누리급 백 팔십 척, 새누리급 블록 10이 스무 척, 총 이백 척입니다.”
블록 10? 초원택이 궁금해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신형 115mm 함포 18문을 적재한 신형입니다. 포문 수는 줄어들었지만, 화력은 기존보다 배는 우월해졌습니다. 차후 새누리급은 모두 블록 10형으로 개장될 예정입니다.”
“그렇군...”
“아, 그리고 기존에 운영하시던 구형 전투함과 호위함의 지휘권을 인계받으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말에 초원택은 고민 없이 명령서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지원이라고 온 것이 무려 이백여 척인데 고작 스물 몇 척 가지고 쪼잔하게 굴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새누리급이 왕창 온 이상 구형 함선의 존재 의의는 사라지는 것이기도 했고.
“잠깐, 그런데 고작 몇 달만에 훈련을 마쳤다고? 그럴 리가...”
해군이 기본 몇 년을 가르쳐야 하는 걸 생각한다면 이는 비상식적으로 빨랐다. 배와 대포는 비숙련공이라고 해도 밤낮 없이 갈아버리면 만들 수 있다고 치자. 숙련병은 절대 그런 식으로는 양성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지원함대의 대다수는 이제 갓 일병을 단 풋내기들입니다. 기초... 정도야 하겠지만...”
그 말에 초원택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제 갓 일병? 이제 갓 일병이라고? 그거 완전 풋내기들 아닌가. 물론 시간상 이게 최선이었겠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함대의 병사들을 모두 교육으로 돌렸습니다. 현장에서 지휘하시는 제독님께는 죄송하지만-”
“아니, 이해하네. 그 정도로 무리했으면 내가 더 뭐라고 말하기도 뭐하지...”
이 정도면 상부에서는 할 만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려 다른 함대의 병력을 모두 빼와서 교육병으로 썼다니까? 평시였으면 타 함대 제독들이 초원택을 묻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대사건이었다.
“어쨌건 함대의 지휘권은 인계했네.”
“무운을 빕니다, 제독님.”
초원택은 경례를 받아주고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러나저러나 위기는 넘겼으니 그것만으로도 한숨 놓을 수 있었다.
- 작가의말
나라에 있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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