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23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봄
서울, 경복궁 국무회의실
방위성 총리 이권의 말을 다 들은 지영은 짧게 되물었다.
“짐이 너무 과한 혜택을 주었다 보는가?”
“그건 아닙니다, 폐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상이군인을 비롯한 여러 장애인은 제대로 된 인력으로 활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허나, 폐하의 조치로 그들에게 후배가 사용할 물건을 만들게 하고 현역 군인들에게는 상이군인이 되어도 살길을 보여주시니 장병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일부 인사들이 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폐하의 뜻과 정책의 효과를 곡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말에 지영은 풀어진 듯한 기색으로 술을 홀짝였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영을 십 년은 넘게 본 이들. 그런 미묘한 차이조차도 구분하지 못할 머저리는 없었다.
“폐하, 그렇다고 한들 이들을 처벌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하여, 저희 방위성에서 대대적인 조사단을 꾸려 수사하고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들을 처벌할 생각입니다. 또한, 조사과정에서 공정성을 더하기 위해 재무부의 협조를 받고 싶습니다만.”
“물론, 협조해드리겠습니다. 방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예산을 착복한 정황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재무부에서 나설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지영은 문득 다연을 불렀다.
“왕태녀.”
“예, 폐하.”
“전권을 주겠다. 방위성과 재무부의 조사단에 합류해 이를 인솔하라. 이름은... 그래, 합동수사본부라고 하면 되겠군. 필요하다면, 행안부의 경찰력도 빌리도록.”
“송구하나, 폐하. 이 일은 굉장히 세심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재향군인회의 힘과 영향력이 작지 않은 것도 물론 있지만, 현역과 연결된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대로네, 총리. 하지만 발해의 왕태녀가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본인이 욕심을 내서 올라온 것이라면 말이야. 면피하려거든 애초에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어야 맞지. 그게 아니라면 증명하면 될 일이고. 어떤가, 왕태녀? 본인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나?”
갑작스레 무거워진 분위기에 다연은 어렵사리 고개를 움직여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다. 본인이 증명한다 했으니, 이제 행동으로 옮겨라. 그저 적당히 왕실 연금이나 타 먹는 것을 포기하고 욕심낸 자리이니 그 욕심을 감당할 실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도록.”
“폐하, 그 말씀은...”
“이번 일의 결과에 왕태녀를 폐위시키겠다는 뜻으로 비출 수 있다고? 그 말이 맞소, 방위성 총리. 헌데...”
지영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여상히 내뱉었다.
“짐이 왕태녀를 폐위시키고 다시 왕태자를 올린다 한들 신민들이 무어라 할 것 같은가?”
지영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저 어디 적당한 왕도 아니고 무려 140년을 군림하며 통치한 국왕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 이상을 통치하리라는 확신이 발해에는 만연했다.
그런데 그런 왕이 고작해야 왕의 대리자 정도에 불과한 왕태녀/왕태자를 바꾼다고 하여 문제 될 일이 무엇인가? 고작해야 그런 사소한 일로는 지영의 권력과 권위에 흠집도 낼 수 없었다.
“그저 내 딸로 남았다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유복한 삶을 누리면 그만이나... 스스로 욕심낸 자리가 아니더냐? 이 정돈 각오했어야지. 음, 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더는 모두 언급하지 마시오. 우리 발해에 논할 게 한가득하거늘.”
지영이 여기까지 말하는데 더 토를 다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 뒤에 논할 것이 더 중요하긴 했다.
왕태녀가 폐위된다고?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왕태녀에서 내려온다고 한들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행사 한 번 더 열면 그만인 일이다.
그리고 본인 하기에 따라서 관직에 진출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논하는 주제는 말 그대로 발해의 백년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짐은 계속해서 교육, 특히 초등교육을 확대해 왔소. 계속해서 예산을 쏟아부었고 우수한 교육자를 양성했지. 그리고 그 효과는 경들이 알다시피 뛰어났소. 하여, 짐은 이 초등교육을 더욱 확대하고자 하오. 이것이 바로 1차 보통교육 사업이오. 자, 여길 보시오.”
지영은 준비해온 자료 한 장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모든 이에게 초등교육을 진행할 수는 없소. 그러기엔 예산도 모자라고 농가의 반대도 심할 테니. 하지만, 일부에게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오. 통계청의 자료를 받아보니 발해의 평균 출산율은 여섯 명이오. 이 중 두 명 정도라면 충분히 교육할 수 있다고 보오만.”
“폐하, 여섯 명이라고 한들 그들 중 남성이 몇 명인지도 따져야 합니다. 어쨌건 농사일에는 남성이 더욱 적합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여자아이들을 교육하면 그만 아니오? 오히려 그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구려. 그들이 자라 어머니가 된다면 자기가 알고 있는 기초적인 글과 수 정도는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겠소?”
지영이 그리 말하자 통계청장 최응이 나지막이 조언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받은 여성일수록 출산율이 낮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백 년 전 자료를 살펴보니 발해의 평균 출산율은 일곱에서 여덟 명을 오갔습니다.”
“통계청장의 말이 옳습니다. 그리고 우리 발해는 수많은 난민과 유민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인종 속에서 최소한의 기틀을 잡아줄 발해인의 출산율이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폐하, 저희들의 결론에 따르면 여성 인권 신장과 출산율 증대는 함께하기 힘듭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하시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영은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자 내심 당황했으나 경력 140년의 왕답게 빠르게 당황을 수습했다.
“하지만 경들, 교육의 확대는 필요불가결한 것이오.”
“실로,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고 출산율을 어느 정도는 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무부 장관님? 실례지만 제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해주시겠습니까?”
왕건은 쏟아지는 시선에도 꿋꿋하게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저희 연구소에서 연구 중인 주제가 있습니다. 아직 완벽하지는 못해서 논문은 없지만, 그 일부를 따오면 이런 내용입니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문제입니다. 농업과학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발해 본토에서 생산할 수 있는 식량의 생산량은 사실상 한계치를 맞이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비료를 무한정 양산할 수 있는지를 물으신다면... 공기 중에서 비료를 뽑아내지 않고서야 불가능할 것입니다.”
“재무부 장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국토부 장관으로서 여기에 첨언하자면, 발해의 본토에 거주할 수 있는 인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구가 지나치게 밀집되면 전염병을 비롯한 온갖 문제가 터집니다. 현재 서울의 인구를 기를 쓰고 팔십 만 이하로 유지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헌데, 우리나라는 국토의 칠 할이 산이니 사실상 거주하고 농사를 지을 지역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간도를 개발한다고 한들 한계가 있습니다. 본토의 출산율을 적절한 수준으로 억제할 필요는 충분합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물론, 옥해도와 대만도에 이주를 하면 되는 문제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요. 땅을 끝없이 늘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미 옥해도만 해도 명령이 오가는 데만 최소 열흘은 걸립니다.”
“결국, 경들의 말에 의하면 인구를 주기적으로 적당히 ‘소모’하던가 혹은 출산율을 조정해야 한다는 소리구려?”
이런 논의를 듣던 지영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충격적일 정도로 과격한 이야기였다. 이 이론을 처음 꺼냈던 왕건조차 손을 벌벌 떨며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기 바빴으니까.
“폐, 폐하-”
“짐의 말을 곡해해서 듣지 마시오.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시오. 실제로 역사를 돌이켜보면 전쟁으로, 전염병으로, 혹은 기근으로 인구가 주기적으로 줄어들고 다시 늘어나길 반복하지 않았나? 재무부 장관, 재무부 연구소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논의되었을 듯한데, 맞소?”
그 말이 진짜냐는 듯한 시선이 왕건을 찌르고 들어왔지만, 왕건은 차마 부인할 수 없었다. 사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인구가 주기적으로 감소하면 남은 인구는 상대적으로 넓은 토지와 깨끗한 위생상태를 누리며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좁은 토지, 열악한 위생, 혹은 전쟁이나 기타 이유로 인구가 감소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순환한다는 것이 현재 재무부에서 논의하는 주요 과제였다.
발해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전쟁으로 나라가 개판이 되었다가 점차 삶과 위생의 수준이 향상되고 인구가 늘었다(물론 전쟁으로 흡수한 인구도 있다지만). 그리고 실제로 서울에서는 차츰 위생 문제가 논의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상하수도나 위생사, 혹은 여러 법률이나 경찰력이 위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모든 것은 빈틈이 있기 마련이었다. 괜히 서울에서 상하수도를 늘리자고 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맬서스 트랩을 깨기 위해선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만, 현재의 발해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가면 기술적인 요인으로, 사회-문화적 변화로 인해 상황이 바뀌고 맬서스 트랩의 한계가 드러난다지만 현재 발해의 기술은 이에 미치지 못했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끌어내긴 어려웠다.
생각해 보자. 발해가 교육을 통해 여성 인권 신장을 어느 정도 이뤄낸다고 해도 결국 농업에는 여전히 많은 인력이 필요하며 이런 농가의 여인들은 여전히 다산을 미덕으로 삼을 것은 분명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아이를 많이 낳아 노동력을 보충하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자손은 훗날 노후를 대비할 수도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결국엔 일정 수준의 출산율은 유지된다는 소리구려. 그렇다면 그 부분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겠소. 문제는 이 이론이 허황된 것으로만 여겨지진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아마 모두 그렇겠지. 재무부 장관은 예산을 더 지원하더라도 이 연구를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마무리하여 발표하게 하시오.”
- 작가의말
맬서스 트랩이 부정당하기 시작한 시점은 질소고정법의 발명으로 식량 생산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계식 농업에 이제는 스마트팜에 여러 식품 기술의 발전까지... 이제는 맬서스 트랩을 운운하기가 우스워졌죠. 문제는 전근대에는 맞는 소리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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