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21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봄
발해, 옥해도
인력이 더 투입되면서 건설 속도가 빨라진 것을 보며 총독은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옥해도에서 일하는 일본인이라니.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야.”
사실 옥해도에서 일본인들이 일하게 된 데에는 긴 사연이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내전이 한창 활발할 때 남조나 북조나 모두 예산의 부족을 겪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것이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몇 년이나 지속하니 예산이 남아날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치고박고 싸우다 보니 이들은 어떻게든 전쟁이라는 과정 안에서 비용을 줄이고 돈을 벌 방법을 고심했고 그 방법이라는 건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사람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다!’
양 조정은 포로로 잡힌 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전근대 어느 때나 전쟁터에서 사람만큼 값진 전리품은 몇 없었기에 이들은 본격적으로 노예를 활용했다.
다만 문제가 있던 것이 노예라고 할지라도 안 먹고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안 쉬고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에는 최소한의 유지비가 필요했고 안타깝게도 남북조에게는 노동력만큼이나 시드머니 역시 필요했다.
그러니 이들은 노예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지영의 귀에도 들어갔다. 사실 발해 같은 경우가 특이한 것이지 전근대에 노예는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게 자국민이던, 타국민이던 말이다.
아무튼, 지영은 이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우리가 일본인을 납치한다면 그것은 불법이지만 그들이 판매하는 노예와 그 가족들을 구매하여 자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법이 아닌 적법한 무역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으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영의 생각이 이러니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져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구매, 영주권을 발급하고 십 년간 의식주를 제공하는 대신 통상 인건비의 3할만 지급하는 이러한 계약에 일본인 포로들은 열광하며 받아들였다.
노예라고 하면 할 수 있겠지만 돈 주고, 밥 주고, 재워 주고, 심지어는 적성을 간단하게 평가해서 유용한 기술들을 업무 중에 전수해 주고 심지어는 글조차 알려주는데 열광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일본인 포로들의 태도는 매우 열성적이었고 이러한 태도에 발해인들도 흥이 났다. 그렇게 일하면서 발해는 자연스럽게 대규모 일본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헌데, 전하. 굳이 비싼 돈을 들여가며 인구를 구매할 이유가 있습니까?”
“연습일세, 연습. 우리는 앞으로 쭉 뻗어나갈 텐데 가까운 나라의 풍습 하나 받아들이고 발해라는 국가 안으로 융화시키지 못한다면 제국은 어림도 없어. 일부기는 하지만 저 멀리 서역인을 받아들이고, 북방계를 받아들이고, 일본계를 받아들이고... 다 익숙해지는 걸세. 한 번 받아들이면 두 번, 세 번은 더 쉬우니까.”
이러한 이유로 일본인들 일부가 옥해도로 오게 되었고(주로 규슈 지방에 살던 이들이 많이 건너오길 청했다. 그 이유는 발해가 너무 추워서...) 이들은 발해가 정한 안전수칙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건설 속도를 단축시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세달 안에 조선소가 완공될 겁니다. 아마 반도에서도 쉬이 볼 수 없는 규모가 되겠군요.”
“내륙으로의 확장도 순조롭습니다. 강을 타고 내륙으로 쉬이 들어갈 수 있으니 새로운 정착지의 건설도, 탐사도 생각보다는 쉽습니다.”
“흠, 좋군.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이... 아니, 이건 내 기우일 것이오. 아무튼, 지금처럼만 합시다. 우린 잘 하고 있소.”
총독부의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숨을 돌린 것은 바로 2함대였다.
“이제 좀 살겠군...”
“그렇습니다, 제독. 특히 이번에 정비함이 새로 왔는데 막 건조된 것을 보낸 것치고는 쓸만합니다. 벌써 세 척의 함선이 정비를 마쳤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저런 시험을 더 거쳐야 했으나 현재 2함대의 상황은 굉장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우선 보내고 본 정비함은 2함대의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맞습니다. 정비함의 성능이 좋더군요. 작은 조선소 하나를 배에 만든 듯했습니다. 특히나 이동하면서 얼추 수리가 가능하니 운신의 폭이 더욱 넓어질 겁니다.”
초원택 제독은 여러 장의 서류를 유심히 보고선 물었다.
“참모장, 지금 공세에 동원할 수 있는 함선의 수는 몇 척이나 되지?”
“...?!”
“... 설마, 아니겠지요.”
“다음 전투는 질 거야... 이기리라는 확신이 없네. 원군은 아무리 빨라야 두세 달 뒤에나 올 것이고 적은 그 전에 활동하겠지. 적이 또 우리 요새의 포화 안에 들어오리라 확신하는가?”
“제독께서 말씀하신 바는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공세를 펼쳐서 이길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는 적과 해전을 하겠다고 한 적은 없네.”
“설마... 다연장포, 북방을 공격할 때의 방책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발해군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다연장포를 쏟아부어 항구 시설을 파괴한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라면 기동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호위함 몇 척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기에 참모장은 진지하게 가능성을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적의 기지에 타격을 준다면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또한, 무거운 군선은 예인선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법이니 적의 주력함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빠르게 화력을 투사하고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들키지 않고 이동한다는 전제하에서지만요.”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운의 영역이라는 것이 문제지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우리에겐 정찰기 모함과 망원경이 있지만, 이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정찰기 모함은 굉장히 불안정한 함선이며 망원경 역시 더 멀리 보게 해 주지만 이 역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리라면 상대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염두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쪽이 먼저 눈치채고 움직일 확률이 높기는 합니다만...”
여기까지 말한 참모장과 참모들은 말없이 초원택 제독을 바라보며 결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참모들이 이러니저러니 말해도 결국 부대의 장은 장군인 법. 그리고 무리의 장이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다연장포와 선박을 차출하도록. 우리가 먼저 친다.”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봄
포항, 포항제철연구소
포항제철연구소의 연구 과제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반사로. 만들기만 한다면 균일한 품질의 연철과 강철을 무더기로 쏟아내리라 기대받았고 꾸준한 투자는 조금씩 성과를 보이며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영 좋지 않았으니... 바로 증기기관이라는 물건이 떡하니 나온 것이었다.
사실 처음 나왔을 때 증기기관은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효율이 백분지 일도 나오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런데 누군가가 한 말 한 마디가 철강 산업계를 뒤흔들었다.
“그냥 증기기관 개량해서 전로에 연결하면 안 되나? 원래 그러라고 만든 거잖나?”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지만, 이제는 그 소리가 현실성을 가졌다. 왜? 진짜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지던 증기기관이 백 년간의 삽질 끝에 나오지 않았나! 출력을 높여 연간 생산량 백 톤짜리 초소형 전로에만 연결해도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경제성이었다.
“어차피 반사로도 연료 태워가지고 철 만드는 거 아니냐! 그러면 연료 태워서 증기기관 돌려서 그걸로 철 만드나 아니면 연료 태워서 바로 철 만드나 거기서 거기잖아!”
“이보게. 잘 생각해 보시게. 증기기관을 개량하면 철‘도’ 만드는 것이지만 반사로는 철‘만’ 만든다네.”
어느 나라나 시간과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고 국가의 운영이란 이 시간과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뽑아 쓰냐의 싸움이었기에 이러한 증기기관 예찬론은 발해의 상층부를 움직이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산 4할 삭감...”
발해가 반사로라는 개념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쨌건 추후 고품질의 강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로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필요했고 발해는 이 기대를 반사로에 걸고 있었으니까.
다만, 발해 상층부가 보기에 도가니강을 반사로로 대체하는 것보다는 개조 초강법을 전로법으로 대체하는 것이 우선순위에서 앞서 있었을 뿐이었다.
분명 초강법은 빠르고 값싸게 강철을 양산할 수 있었지만, 그 질은 전혀 담보되지 못했다. 발해가 낑낑거리고 개조해봐야 원판이 원판인지라 그 징후가 나아지긴 했어도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우린 이미 많은 문제를 해결했고 상당한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만들어내는 반사로는 점점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초창기의 그 어리숙한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반사로가 나왔고 이곳에서 나오는 철도 철 모양을 한 똥 쓰레기에서 점차 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오곤 있었다.
“그래, 포기하긴 이르지. 하! 지금의 증기기관으로 저 무거운 쇳물을 파고들 바람을 만들겠다? 그것보단 우리가 몇 배는 빠를 걸세.”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봄
서울, 왕립 서울 조병창
총.
기존 냉병기 중 대부분을 ‘구식’으로 만든 무기. 그 무기의 위상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총의 모습은 보통 화약 접시와 개머리판, 총열, 방아쇠로 이루어진 모습이었는데...
“설계도상으로 이 총은 화약 접시가 없군.”
“맞습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한 총기 설계자의 말에 조병창장은 자신도 모르게 뒷목을 잡을 뻔했다.
제아무리 자유롭게 설계하고 연구한다지만 그것도 자리가 자리지 않은가. 차세대 보병화기 사업에 되지도 않는 설계도를 아무런 검증도 없이 가져오라는 게 아니었다!
“그래, 화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탄환은 누가 날려 주는가?”
“공기가 날릴 것입니다. 이 총은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서 영감을 얻어...”
30분 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여 신물질인 고무를 활용하면 밀폐 기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조병창장은 길고 긴 설명이 끝나자 몸서리를 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아, 알겠네. 알겠어. 2차 예선 때 한 번 만들어서 가져오게나!”
원하는 걸 얻은 설계자는 ‘공기총 프로젝트’라고 쓰인 서류 원본을 조심스레 챙겼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띤 채로.
- 작가의말
공기총! 우리가 흔히 아는 bb탄의 위력을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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