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20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봄
부산, 왕립 부산 조병창
해군 장교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따라오시오.”
박지호 조병창장은 복도를 걸으며 이야기했다.
“헌데 95mm 중량탄도 화력이 그리 부족했소?”
“생각보다 적 함선이 튼튼했습니다.”
“흠, 하긴. 뭐 그러니 그런 말을 하셨겠지. 정밀탄은 쓸만했다니 다행이구려. 아무튼, 보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대포들이오.”
못해도 수십 종류는 될 법한 대포들에 해군 장교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대포가... 상당히 많군요?”
“발해에서 대포 하면 우리 부산 조병창 아니겠나. 이래저래 시험품들이 많지. 느낌 가는 것부터 한번 보시구려.”
“음... 감독관님의 추천을 받고 싶군요.”
“그렇다면야... 이 녀석은 어떻소? 115mm 대포요. 무게는 대략 850kg 정도. 5.4kg 탄을 1km까지 날릴 수 있는 녀석이지. 해상이니 유효 사거리는 더 줄겠지만, 화력은 이전 중량탄에 비할 바는 아닐 거요. 포의 적재 수량은... 흠, 부피 상으로는 문제가 없겠소만. 그건 직접 확인하셔야 할 거요.”
이후로도 몇몇 대포를 더 둘러본 뒤 해군 장교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작열탄을 사용하는 포를 볼 수 있겠습니까?”
“박격포를 군함에서 사용하겠다는 말씀이오...? 명중률이 안 나올 텐데?”
“곡사포라는 물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박지호 조병창장은 분하고 부끄럽다는 듯 입술을 콱 깨물고는 이내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곡사포의 개발에는 큰 진전이 없소... 포탄 기술이 부족한 탓이겠지...”
“아, 아닙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군요. 다만 중량탄과 정밀탄의 제조는 가능하겠지요?”
“그는 물론이오! 애초에 함포용 통상탄 자체를 정밀탄으로 교체하는 방안도 추진할 예정이오. 정밀탄이 있는데 굳이 구(球)형 탄을 쓸 이유는 없잖소? 비용이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니. 다만 중량탄의 경우엔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하니 시간이 약간 걸릴 거요. 뭐, 얼마 걸리진 않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자료를 우선 상층부에 전달하겠습니다. 곧 다시 찾아뵙지요.”
해군 장교가 떠나자 박지호 조병창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대체 이놈의 곡사포는 왜 이러는지...”
뭐만 하면 터져대니 비용이 천정부지로 뛰지 않는가. 심지어 요즘 연구 중인 정밀탄을 기초로 해 작열탄을 연구하는 것도 잘 안 되고 있었다.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봄
여수, 해군 사령부
“흠... 과연 그렇군. 그렇다면 이 115mm 함포가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이 대포라면 포문 수를 줄이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개장만 거치면 바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음, 여기 120mm도 있지 않나. 이것도 포문을 줄이지 않아도 될 텐데?”
“물론 그렇지만 운용상에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구경이 커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장약량과 포탄의 크기를 고려하셔야 합니다.”
2함대 소속 장교의 말을 들은 전능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몇 미리 차이로 발포하는 포탄의 무게와 장약량이 달라졌다. 약 300톤이라는 배수량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만큼 지나치게 무게를 크게 차지하는 건 지양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군. 알겠네. 허면 이... 신형 포구제퇴기는 어떻게들 생각하나?”
“반동을 줄여준다는 점에선 엄청난 이득이 있는 물건입니다. 조금 늦게 받는다는 단점이야 문제될 것도 없지요.”
“다만 불꽃이 옆으로 나온다는 것은 문제 될 소지가 있습니다. 육상보다 포의 간격이 좁은데 불꽃이 잘못 튀었다간... 대참사가 날 겁니다.”
사실 쓰려고 하면 못 쓸 이유야 없었지만 사용하기가 너무 까다롭고 복잡했다. 정신없는 실전에서 ‘복잡한 요소’를 모두 하나하나 지켜가면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실전을 뛰어본 장교나 병사라면 기겁을 했다.
발해는 무기 체계 개발이나 도입 특성상 무조건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을 포함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소한’ 문제라면 어느 정도 타협하고 도입하겠으나 총도 아니고 포가 유폭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입할 멍청이는 적어도 여기엔 없었다.
건국력 142년(서기 920년) 봄
서울, 발해 화학 연구소
“다른 건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장담할 수 있소. 이 고무는 물질계의 혁명이오.”
현대인이라면 ‘고무가 대단한 것은 맞지만 그렇게까지 띄워준다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발해에서는 충분히 그런 찬사를 받을 만했다.
아직 가황고무를 만들지 못해 충분히 유용하지는 못했지만 밀봉이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야기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발해에서 밀봉을 하기 위해서는 장인이 달라붙어 한땀 한땀 손을 봐야 했고 이조차도 실패할 확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고무 ‘딸깍’에 밀봉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하지만 열에 너무 취약하잖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오.”
“뭐, 언제나 그렇듯 하다 보면 나올 것 아니오? 시작하기도 전부터 겁먹을 것 없소. 우선 고무 자체를 시험해 봅시다.”
그렇게 시험해 나온 결과는 실로 기묘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고무는 온도에 약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열을 가한 고무가 대체 더 튼튼하단 말입니까?”
“...? 제대로 실험한 것이 맞소? 나 역시 용기에 넣고 가열했소만 유용한 결과를 얻지 못했소이다.”
“...?”
“...?”
“자자, 잠깐. 둘 다 진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실험해 봅시다. 아마 불에 가열했을 때 모두 비슷한 결과를 도출했소. 하지만... 예외가 나왔으니 그 실험부터 보는 것이 좋겠지. 그 때 실험과 똑같은 실험을 보여주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실험을 보고 난 연구원들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아니, 같이 불에 가열했는데 용기에 담고, 담지 않고 차이에 따라 특성이 변화한다니. 이게 말입니까, 방굽니까?”
“어쩌면 고무는 나무와 반응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고무는 나무에서 채취한다지 않소. 그 말대로라면 가열하지 않은 고무와 너무 차이나잖은가.”
“어쩌면... 나무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나무의 종류를 달리 해보지요.”
한 젊은 연구원의 말이 옳다 싶었는지 연구원들은 보관하고 있던 다양한 목재를 연료로 사용해 고무를 가열했으나 영 소득이 없었다.
“이건 아닌 것 같소. 동일한 소나무임에도 결과값이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변수가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요.”
“흠... 분명 동일한 소나무가 맞았지요?”
“확실합니다. 애초에 쓰다 남은 소나무를 제가 다시 가져온 것이라 완벽히 같은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목재의 문제는 아니오. 다시 처음부터 봅시다. 흠, 아예 처음 실험한 곳으로 안내해주시지요.”
그렇게 해서 안내받은 곳은 너무나 평범한 화덕이었다. 타다 남은 나무와 잿가루, 약간의 숯 비슷한 것도 보이는. 발해 어딜 가나 있을 불가 아닌가.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안 보이는데...”
“어디에나 있는 불가 아닙니까? 특별히 다를 것은 없군요.”
“...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잠시 실험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연구원들이 실험을 돕자 그는 숯을 가져와 숯으로 고무를 가열했다.
“이런... 아까 그 고무의 특징이오. 숯에 의한 변화가 맞았구려.”
유달리 관찰력이 좋았던 그는 ‘평범함’에 주목하지 않았기에 정답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숯이 된다면 석탄도 될 가능성이 큽니다. 철강산업에서도 애초에 석탄은 숯의 대체품이니.”
“일리가 있구려. 숯과 비슷한 물건들을 모두 모아 봅시다.”
한참을 실험한 결과 숯과 석탄의 그을음이 고무의 성질을 강화시킨다는 걸 알아냈다. 이들은 몰랐지만 이들이 발견한 것은 고무에 카본 블랙을 합성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석탄은 안 되고 석탄의 그을음과 합해야만 고무의 성질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었고 숯 역시 그을음을 발생시키므로 이 역시 블랙 카본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열에 취약하다는 것만 해결하면 되겠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현대의 고무를 만들 때 카본 블랙‘도’ 넣는 것이지 카본 블랙‘만’ 넣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내열성을 보완할 무언가를 넣어야 했다.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여름
옥해도, 2함대 기함
“두 척의 정비함을 진수하였으니 우선 그것으로 급한 불을 끌 것. 그리고 순찰 전대를 전부 2함대 소속으로 이관하였음. 또한, 조선소와 조병창을 준전시 태세로 가동하고 있으니 2함대 제독은 계속하여 현 임무에 충실할 것. 이상.”
초원택 제독의 말이 끝나자 2함대 참모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입니다, 제독.”
“그래. 다행이군.”
무려 국왕의 이름으로 초원택 제독의 지휘관을 보장하였으니 그들이 걱정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다만,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적의 손실은 예정보다는 작습니다. 적들은 여전히 작전 수행에 필요한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비함이 온다고 해도 함선 수리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수병들도 충원하고 적응해야 하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요새의 도움을 앞으로는 받기 힘들 겁니다. 그러니 새누리급의 수량을 늘리던, 아니면 기존의 화력을 강화하던 해야 하는데...”
새로운 함포 개발? 그건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도 최소 년 단위로 걸릴 예정이니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새누리급을 인도받고 최소한의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청한다면 즉시 한 개 함대를 파견하겠다고 하네.”
초원택 제독의 충격적인 말에 한 참모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1, 2, 3, 유구함대까지 총 4개의 함대인데 여기서 남해를 전담하는 2함대에 더불어 한 개의 함대를 더 차출한다니? 그러면 발해의 바다는 도대체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럼 기존 함대가 지키던 해역은...”
“상부에서는 지금 누가 해적질을 하고 해상에 진출하겠냐는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런...! 그건 말도 안 되는...!”
초원택 제독은 당황하는 참모에게 짤막하게 덧붙였다.
“우리의 조선소를 믿어야지 어쩌겠나.”
- 작가의말
카본 블랙이라고 하면 무언가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카본 블랙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먹입니다. 먹은 그을음을 뭉쳐서 만들죠. 즉, 우리 조상들이 쓰던 잉크는 카본 블랙으로 만들어진 잉크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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