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17
건국력 141년(서기 920년) 겨울
서울, 연구소 제5 실험실
훈장이니 뭐니 잔뜩 받긴 했지만 고연덕 실장 이하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우울했다.
“우리 증기 기관좀 써주라...”
돈이고 명예고 결국 이들은 기술자들. 자신들의 선배부터 시작해서 자신 대에 겨우 낑낑대며 완성한 증기기관이 소박맞은 새색시마냥 취급되고 있다는데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장인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아들딸과 같듯, 이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장님, 이거... 연구 계속합니까? 솔직히 조병창에서도 겨울에 무기 만들 수 있다... 정도로만 취급하지 않습니까.”
불안감이 담긴 한 청년 연구원의 물음에 고연덕 실장은 오기 가득한 기색으로 내뱉었다.
“한 번 한 거, 두 번은 못하냐?”
“예?”
“좋은 거로 만들자! 더 좋은 거로!!!”
이들에게 제일 불안한 것은 ‘이게 될까?’라는 의문이었다. 증기로 정말 활용 가능한 동력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건 그들 스스로가 증명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효율을 높이지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짜잔, 이 그림과 함께라면...!”
문제의 그림은 우리가 증기기관하면 떠올리는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로 그 그림이었다. 지영은 자신이 기억하는 온갖 것을 끄적여 놓았고 그 양이 원체 많았던지라 지영도 이제야 발견하고 그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그 후 일주일간 비고를 정리했다는 후문도 있지만 아무튼...
어렸을 때 학습만화에서 보고 수능 국어에서 지영의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갈긴 와트의 증기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도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들도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지금 기관 효율의 열 배가 되어도 엄청나게 쓰이진 않을 것 같은데...’
이민 정책이니 뭐니 열심히 해도 기본적으로 아시아 국가는 인구가 많았다. 인력이 엄청나게 비싸지 않으니 굳이 값비싸고 번거로운 증기기관을 민간 사업자들이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관과 군용은 다르지.’
이미 증기기관을 대포랑 총 만든답시고 가져가지 않았는가. 더 효율적이라면 아마 더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 사용량의 두 세배만 돼도 이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국력 142년(서기 921년) 겨울
옥해도(필리핀) 인근 해역
“아, 좀! 정신 사납게.”
타박하는 말에도 최덕배 중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총을 묵묵히 점검했다.
“아니, 오늘 총기수입만 세 번째야, 세 번째! 총 닳겠다.”
“불안하니까 그렇지.”
그 말에 같은 중사 계급장을 단 군인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했다.
“허이구, 불안은 개뿔. 그 좋은 총 냅두고 불안?”
초원택 제독은 옥해도 방어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요청했으며 해군 저격수는 그 덕에 도입된 시험 병과였다.
32년형 저격총을 든 이들은 능히 500M까지도 저격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귀하디 귀한 존재였다.
“맞아. 그거 500M에서 탄착군이 70cm 안에 형성된다며.”
“애들이 그거 부러워서 미칠라 하더만.”
발해의 활강총은 기본적으로 다른 활강총보다야 명중률이 높았다. 나름 정밀탄을 쓰기도 하고 기계식 조준 장치도 나름 꼼꼼히 달아 놓았다.
그 덕에 100m거리에서 45cm 정도의 탄착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사수의 능력이 받쳐주는 한 충분히 몸통을 노리고 쏠 만한 정도였지만...
“그래 봐야 저 저격총엔 안 되지.”
“아, 이거 생각보다 안 맞어. 특히 바다에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위장복도 없고...”
육군은 위장복(길리슈트)가 지급되기 때문에 초탄을 쏘기 전에는 사실상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좋았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저격수의 심리적 안정에 기여해 명중률이 증가했다.
하지만 여기는 바다, 그것도 배 위. 숨을 곳 따위는 없을뿐더러 그렇기에 저격수들은 맨 몸으로 전쟁터에 나온 기분이었다.
땡땡땡-!!!
“전 병력 지금 즉시 무장 상태를 점검할 것!”
“에이 진짜. 쉬는데 지랄이고.”
“총기함 열쇠 어디 갔어! 당번병! 당번병!!!”
이 잠깐의 평화가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병들은 제각기 움직이며 자신들의 무장을 정비했고 장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남동쪽에서 적 함대 접근이라..., 자신감 넘치는 군.”
초원택의 말에 참모들은 깊이 공감했다. 사실 발해에게 효율적으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굳이 전면전으로 맞서는 게 아닌 통상파괴로 접근하는 게 맞았다. 일부는 요격당할지도 모르지만 발해는 이곳에 이제 막 뿌리를 내리려 하는 처지. 이때 신용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건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치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겠지요. 예를 들면 대내외적으로 위신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던지...”
“그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나마 전면전으로 붙는 게 더 났다. 적 함대는 최소 여든 척이라 그랬나.”
“그렇습니다, 제독.”
담담한 참모의 말에 초원택은 해도를 유심히 살피다 내뱉었다.
“역시 전면전은 위험하겠어. 요새의 도움을 받아야겠군.”
“하지만 제독, 저들이 들어오겠습니까?”
“저들은 대포에 대해 모른다. 기껏해야 투석기나 노포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 물건들과 130mm의 사거리 차이는 못해도 600m이상이야. 충분히 사정거리 내에 넣을 수 있을 거야.”
130mm 중포. 현대인이라면 130mm 정도에 중포라는 이름을 붙인다며 의아할 수 있겠지만 130mm는 무려 7kg가 넘는 포탄을 쏘아내는 강력한 대포였다. 기존 95mm보다 적어도 2.5배는 무거운 포탄을 쏘아내는지라 그 위력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당연하게도 사거리 역시 800m~900m 정도에 해당하는 95mm보다 몇백 미터는 더 길었다.
“우리는 이 사거리 내로 적을 유인한다. 쾌속선을 보내 총독부와 요새에 알리고 함대는 그대로 북으로 변침해 도주한다. 적 함대 역시 속도가 빠르다고 했으니 이 점은 유의하도록.”
“알겠습니다. 신호기 올려! 전 함대 기함을 따라 북북서로 변침한다!!”
초원택의 지시에 따라 발해 해군은 빠르게 변침해 도주했으나 적들과의 거리는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더 가까워지지는 않습니다. 현재 속도 8.1노트입니다.”
함장의 보고에 초원택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쪽도 나름 조함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돛을 움직이고 키를 잡고 있는데도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다는 건 적들의 선원이 그만큼 실력이 좋거나, 혹은 적들의 배가 속도에 있어 비등하거나 앞선다는 말이었다.
“좋지 않아... 좋지 않아... 옥해도 일대에는 저런 왕국들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저만한 규모를 가진 왕국은 몇 없습니다.”
“함장님, 모든 무장 점검 마쳤습니다. 전투배치 실시합니까?”
그 말에 함장은 초원택을 바라봤고 초원택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금 전투배치 해도 제대로 전투에 들어가는 건 최소 몇 시간이나 지난 뒤의 일. 굳이 지금부터 긴장 조성하면서 정신력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었다.
“전 함대에 특식 배부해. 배탈 안 날 만큼만 적당히. 그리고 개인화기는 항상 휴대하도록 신호 보내.”
“예, 제독!”
초원택은 옥해도 총독부가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건국력 142년(서기 920년) 겨울
옥해도, 해안요새
해안요새에서는 전투 준비가 한창이었다. 증원받은 130mm를 포대별로 배치하고 화약과 대포, 포탄의 상태를 점검했다.
“부표는, 다 깔았지?”
“예, 장군. 구획별로 전부 설치했습니다.”
삼각측량을 통해 거리를 계산한다지만 얼추 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요소가 있고 없고는 상당히 큰 차이였기에 일정 간격으로 설치된 부표를 통해 거리를 얼추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포탄과 장약은?”
“준비했습니다.”
“요새 벽은 점검했나?”
“그렇습니다. 이틀 전 점검에 의하면 이상 없었고 방금 실시한 긴급점검에도 문제는 없었습니다.”
“개인화기는? 식수와 식량도 적절히 배분했나?”
몇 번 정도 받아주던 참모는 지친 기색으로 김상혁 소장에게 답했다.
“장군, 혹시 집에 불이라도 켜고 오셨습니까?”
“준비는 철저해야지.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라고 했다.”
“그 말이 돌다리를 종일 두드리라는 건 아니잖습니까. 발해군에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이는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그래. 알겠다.”
김상혁 소장은 그리 말하며 130mm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130mm 중포는 그야말로 발해의 역작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기술 숙련도는 95mm보다 더 우수했으며 특히나 일체형 정(丁)자 포구제퇴기로 인해 중포 특유의 반동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다.
고작해야 500kg대인 95mm와는 다르게 130mm는 무게만 1.9톤을 약간 넘었고 장약량도 배는 많았기에 이 묵직한 녀석이 한 번 밀려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데만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하지만 포구제퇴기가 장착된 일체형이 나오고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생산성은 기존의 7~8할 정도로 감소했지만(포구 끝에 구멍을 뚫어야 하고 이를 계산해 포를 조금은 더 길게 만들어야 했다.) 반동 제어로 인해 기존보다 3~4할은 빠르게 사격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을 얻었다.
이 당시 포병의 미덕이 반동으로 밀려난 포를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니만큼(어차피 계산은 부사관이나 장교가 하니까) 이 130mm포는 그 자체로 일반병도 어느 정도 숙련된 병사만큼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셈이다.
“다행히 습도가 그리 높지는 않군. 포격전에 문제는 없겠어.”
탄약고에서야 숯이 습기를 어느 정도 먹어준다지만 실제 전투를 위해 꺼내놓으면 습기를 먹어 불발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겨울이라 필리핀도 그리 습기가 많을 때가 아니었고 날도 많았기에 야전 탄약고(대포 근처에 적재하는 공간. 발해는 유폭을 염려하여 약간의 공사를 했고 이를 야전 탄약고라 부른다.)에 쌓아놔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해상을 계속 주시하도록. 한 시간 간격으로 교대하며 근무하되 졸릴 수 있으니 말차 사탕을 지급하게.”
김상혁은 그리 말하고선 불안한 기색으로 해상을 바라보았다.
- 작가의말
포구 제퇴기는 정말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포구에 구멍을 뚫어서 가스를 분산시켜 반동을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군대에 다녀오셨다면 총구 끝의 소염기를 보셨을 텐데 비슷한 역할입니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소염기 역시 반동을 줄여주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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