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15
건국력 140년(서기 919년) 겨울
여수, 해군 사령부
[해군 혁신 본부 정기보고
발신: 해군 혁신 본부장 장건영
수신: 해군 사령관 전능창
현재 함대의 수병들은 함포 사격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전투 시 일정한 명중률을 기대할 수 있음. 하지만 전대, 전단, 함대 단위의 신형 함선을 이용한 전술 행동은 미숙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전을 통해 계속 개선점을 찾아내야 한다고 판단함. 하여, 차기 군사 작전에 해군 혁신 본부의 수병들이 참가할 수 있기를 희망함.
해군 훈련 보고서를 별첨하였으니 확인 요망.]
전능창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보고서를 덮었다.
“그래도 포격에 익숙해졌다니 다행이군.”
사실 95MM 야전포와 함포는 동일한 포탄을 사용한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둘은 사용하는 포탄이 달랐다.
95MM 야전포는 육지에서 운영하는 특성상 원형 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95MM 함포는 엎어진 밥그릇 모양의 원추형 탄을 사용했다. 육군이야 볼링핀을 쓰러뜨리는 볼링공마냥 적을 사살해야 하니 원형 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해군은 어쨌건 적의 장갑을 뚫고 피해를 준다면 그걸로 좋으니 굳이 원형 탄을 쓸 이유가 없기는 했다.
여튼 이 엎어진 밥그릇 모양의 정밀탄은 속이 비어있는 특성상 포격 시 포탄이 확장되어 포신에 밀착하고, 속이 비어있어 탄도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으므로 95MM 야전포보다 명중률이 높았다.
그랬기에 해군은 나름 95MM 함포에 만족하고 있었다. 단 하나만 빼고.
“화력에 불만이 있다...? 흠, 어찌 생각하나?”
“애초에 95MM는 함포로 개발된 건 아니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리고 해군만을 위해 전혀 다른 대포를 생산하기에는 예산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부산 해군기지에서 만들어낸 신무기가 있다고 합니다만... 글쎄요, 95MM를 그대로 사용한다니 기대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95MM를 그대로 사용하고 훈련한 경험치도 날아가지 않는다는 그 말에 전능창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그게 뭐라던가?”
“아... 잠깐만, 아. 여기 있습니다. 중량탄이라더군요.”
건국력 141년(서기 920년) 봄
필리핀, 톤도 왕국
필리핀 지역의 다양한 왕국들은 제각기 발전하며 번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무탈히 상업 활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후추 7할 할인가로 특별히 모십니다!”
“세상에, 후추를 3할이나 할인해 주신다고요? 어디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 있습니다. 편하신 대로 보시죠.”
“오... 굉장히 좋군요.”
“그리고 손님,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십니다만, 3할 할인이 아니라 7할 할인입니다.”
그 말에 흡족한 표정으로 후추를 검토하던 부티나는 상인의 얼굴이 멍해졌다.
“...? 혹시 숫자를 착각한 게 아닌지?”
“아니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7할 할인입니다, 3할의 가격에 판매하는 거죠.”
“...!”
“그, 그럼 이 비단은?”
“6할 할인입니다. 지금 구매하시면, 세상에! 비단을 4할 가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할인가에 주위 상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가격이 가능하지? 물건이 불량품 아니오?”
“소중하게만 다루신다면 살펴보시고 구매하셔도 괜찮습니다.”
사실 이건 발해의 국가 전략이었다.
어차피 지금 당나라가 정신 못 차리고 바다로 못 나오는 지금. 중국산 비단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비단을 판매할 나라는 동북아에서는 발해밖에 없다. 그리고 민간상인이 용기 있게 나오면 수상하게 발해어를 잘 하고 전문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함선들에 족족 나포되니 나오는 상인들은 이미 씨가 말랐다.
그러니 비단, 도자기를 비롯한 기존 중국과 교역하던 제품들은 발해가 독점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후추 등의 향신료와 기타 물건 역시 발해가 필리핀에 자리 잡고 앉았으니 사람만 고용하면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해졌고 많은 돈 앞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저들의 해양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금줄을 말려야 한다!”
이건 발해 남방 전략의 핵심과도 같은 문장이었고 그 문장을 실현하기 위해 발해는 작정하고 보조금과 면세 제도를 시행했다.
그리고 그 보조금과 면세 제도에 힘입어 나온 상황이 현재의 덤핑이었다.
필리핀 해상왕국의 무역 루트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중국계 물건들을 사서 필리핀 내 해상왕국과 인도, 중동 쪽의 상인들에게 판매했고 동남아, 인도, 중동 쪽의 물건을 화교나 중국 쪽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그런데 중국계 물건들을 발해가 독점하고 그 외의 물건들은 덤핑으로 밀어붙이니 톤도 왕국의 입장에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발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우리와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안정적으로 물건을 공급할 테니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톤도 왕국은 상인으로서의 신뢰를 잃었지. 부디 그대들과는 오래 갔으면 좋겠소.”
어차피 발해도 대만에 거점 있고 유구에도 있고 필리핀 북쪽에도 거점이 있으니 직접 상행위가 가능하다는 점을 노려 중동 쪽 상인들과 직거래를 하기로 한 것이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게 아닌지.”
왕건의 애처로운 호소에 지영은 짧게 답했다.
“전쟁을 하게 되면 돈이 더 많이 들 텐데, 괜찮겠나?”
해군이야 상선 털어먹으면 된다고 하지만 육군은? 그 옥해도(필리핀)에서 군사작전을 하기 위한 비용을 계산했는지 왕건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걱정 말게. 이미 당나라쪽 무역로를 장악한 이상 반은 이기고 들어간 싸움이야.”
건국력 141년(서기 920년) 여름
서울, 경복궁 국무회의실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소?”
지영의 물음에 관료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태자의 의견도, 공주의 의견도 바꾸지 못하였고 공주가 성년식을 치른 지도 벌써 일 년이오.”
그랬다. 관료들은 현 왕태자 이서민의 의견을 끝끝내 꺾지 못했고 이다연을 포기하게 하지도 못했다.
“해서 공주를... 흠, 그래. 신년을 맞이할 때 왕태녀로 옹립하려 하오만.”
그렇다고 반대하기도 좀 뭐한 것이...
‘당사자 세 명이 전부 동의해버렸지...’
‘그리고 여왕이나 여제가 나온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왕 될 일도 없는데 우리가 굳이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계속 반대해야 하나?’
명분은 약한데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조차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지라 관료들은 이윽고 반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하긴, 공주님께서 좀 현명하시긴 하지...?’
‘똑똑하신 분이니 아예 대놓고 밀어주는 것도?’
‘저분이 왕태녀 되시고 한자리하시면 퇴근을 조금 더 일찍 할 수 있을지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관료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하기 시작했다.
“공주께서 현명하시고 열성적이시니 옳다고 생각됩니다. 각국의 귀빈들을 초청하고 신민들에게도 널리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각국 공관에 서신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영은 대강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작게 웃으며 사과주를 들이켰고 이다연도 내심 마음을 놓았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 문제는 일단락된 것으로 알겠네. 그리고 외교부 장관? 고무나무를 얻었다고 들었는데.”
“예, 폐하. 이번 보고서에 고무나무를 얻었다고 주월 공사가 보고를 했습니다. 현재는 산자부와 협력해 고무나무 농장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월에서의 고무나무 농장이 성공을 거두면 옥해도 쪽에도 농장을 건설해보려 합니다.”
“좋군, 고무는 굉장히 유용한 자원이니 최대한 연구하도록 하시오.”
고무가 상용화되면 가능한 것이 확 많아지게 되기에 지영은 최대한 고무를 빠르게 상용화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과기부의 협조까지 빌려도 좋소. 예산 또한 넉넉히 줄 터이니 중요한 것은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오, 알겠소?”
“예, 폐하.”
예산을 넉넉히 준다는 말에 왕건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는 의자에 축 늘어졌다.
무작정 반대하기엔 지영이 고무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가를 알고 있었고 지영이 말한 대로 그 타이어? 라는 것만 만들어지면 자전거나 수레의 효율이 확 올라가는 것도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아, 자전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영은 그토록 바라던 자전거를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문제라면 승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느꼈기에 힘들게 만든 자전거가 창고에서 먼지만 먹고 있는 게 문제지.
“자자, 고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진짜 중요한 일이 남았지. 남방은 어찌 되어가오?”
“현재 교역품의 독점과 보조금을 이용한 할인 정책을 이용해 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다만 상인들의 불만이 있는 만큼 해군력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뜬금없이 상인들의 불만에 해군력을 강화해야 하나 싶었지만, 근대 이전까지는 상선이 포 달면 해적선이고 해적선이 포 내리면 상선인 시대였던지라 이는 당연한 조치였다.
특히나 해양에서 중계 무역을 해온 만큼 분명 만만치 않은 해군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해군 사령관은 신형 함선이 포함된 2함대에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진행하고 싶어합니다만”
“하지만 옥해도에는 변변한 해군 공창이 없잖소. 한다고 하면 대만도까지 올라가서 수리를 받아야 할 텐데... 해군은 그러한 문제에 대비가 되어 있소, 총리?”
한 대도 안 맞고 해상 세력을 이겨낼 수 있느냐의 질문에 이기민 방위성 총리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발해 해군은 정예다. 신형 함선에 적응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동안 쌓아온 경험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잔뼈 굵은 해상 세력들을 상대로 먼저 치고 들어가 해군 공창이 필요 없을 정도로 경미한 손해만 입고 승리할 수 있냐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정비함이라도 만들어졌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목제 함선에 무슨 정비함인가 싶겠지만 그냥 구멍 난 곳에 판자 몇 개 덧댄 것과 해군 공창과 유사한 수준으로 수리를 진행하는 것은 꽤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안 보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쨌건 현 남방 정책을 고수하는 경우 그들의 분노는 결국 옥해도 제해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폐하, 총리의 말도 옳습니다. 방어를 한다면 조금 더 유리한 상황이겠지만 결국에는 해상력의 증강이 필요합니다.”
“기존 2함대로는 부족하오?”
“그렇다면 2함대의 본래 임무를 해제하시겠습니까?”
지영은 그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2함대의 주 임무는 남해의 제해권 확보다. 발해에게 굉장히 중요한 해역인 만큼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신형 함선을 2함대 소속으로 완전히 변경해 군사작전을 명령하시거나, 아니면 타 함대에서 전단을 차출해 2함대를 돕거나...”
“... 이는 내가 오늘이 가기 전에 방위성 총리에게 답을 주리다.”
체인도 없이 자전거를 만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놀랍게도 그러합니다(자료 조사할 때 저도 놀랐습니다). 조금 더 현대적인 예시를 들자면 커크패트릭 맥밀란의 자전거도 있죠. 애초에 맥밀란 자전거 이전에는 페달도 없었습니다. 물론 지영이 만든 건 맥밀란의 자전거에 더 가까운 느낌이긴 합니다.
- 작가의말
사장님이 미쳤어요 급 할인행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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