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13
건국력 139년(서기 918년) 겨울
여수, 해군 사령부
“이거 참 지원을 받아도 문제군. 전 연합함대장께서 보셨으면 무어라 하셨을지.”
이제는 뒷선으로 물러난 연합함대장 장건영이었지만 능력만큼은 전능창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 능력에 비하면 본인의 능력은 확실히 뒤쳐졌다. 애초에 지금 해군사령관 자리에 앉을 생각도 없었고.
“쯧, 해군 총사령관이면 자신감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선배님!”
“확실히,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 이제는 그 자리가 퍽 잘 어울리는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니, 아니지. 일단 앉으시죠. 당번병, 녹차 두 잔 부탁하네.”
장건영은 사양하지 않고 부드러운 의자에 걸터앉았다.
“뭐, 이제 거의 은퇴한 퇴물이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이유가 있나. 그냥 할 일도 없고 해서”
“퇴물이라니, 그런 말씀 마십쇼. 지금도 충분히 지휘봉 잡고 움직일만 하잖습니까.”
“미련이지, 미련이야.”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미끄러졌다는 것을 아는 장건영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녹차의 맛을 음미했다.
“선배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어. 예전처럼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돌아다닐 때는 지났지. 살다 보면 포기라는 것도 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십 년도 넘게 붙어있다 보니 나를 너무 잘 아는군.”
“애초에 포기하셨으면 해군에서 떠나셨을 테니까요.”
“그래.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세. 그냥... 내가 해군에 몸 담고 있을 때 대양해군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냥, 그런 걸세.”
그리 말하는 장건영의 눈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생각해보면 해군의 입지 확보를 위해 얼마나 싸돌아다녔는가. 지금 해군의 입지가 올라간 데에는 국가 정책의 영향도 있지만 장건영의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걸 전능창은 모르지 않았다.
“하아... 저 역시도 그걸 보고 싶습니다만... 쉽지 않더군요.”
“신형 함선을 배치했다고 들었는데? 아... 그렇군.”
장건영의 깨달음에 전능창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분명 신형 함선이 배치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문제라면 이 신형 함선, 새누리급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함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배 자체는 이전의 배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지만 구조의 차이와 대포의 도입으로 기존의 운영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특히 함포가 문제입니다...”
육군의 포격은 해군보다 간편한 편이었다. 본인들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고, 지형을 분석하기도 쉬운 편이었으며, 적의 움직임 또한 어지간해서는 제한적이었다.
반대로 해군의 포격은 본인과 적의 위치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제한된 함선의 환경에서 운용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파도까지 쳐서 좌우이동과 함께 상하이동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왜 해군이 한 번 기르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하겠는가.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나마 육군은 남북전쟁에서 비뢰포긴 하지만 포격을 해 본 경험이 있었으며 95MM의 개발 역시 육상에서 이루어졌기에 비교적 이른 시일 내에 포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으음... 그건 심각한데.”
“옥해도 총독부에서는 최대한 빠르게 신형 함선이 본인들을 지켜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만... 굳이 숙달되지도 않은 신형 함선과 해군을 보내서 아까운 충격 효과를 낭비할 필요는 없겠죠. 새누리급은 강력한 무기지만 무적은 아니니...”
전능창은 인사명부를 뒤져 한 장의 서류를 건넸다.
“그러니, 어떠십니까? 해군 혁신 본부장 노릇 한번 해 보시는 건?”
“농담이 지나치군.”
“농담이라뇨. 저, 해군 사령관입니다. 그 정도 힘은 있어요.”
“힘들 걸세. 내가 복귀하면 육군의 아자개 장군도 복귀해야 해.”
“상황이 다릅니다. 육군 혁신 본부는 이미 그 일을 마치고 마무리에 들어간 조직이죠. 아마 다음 개각 때는 해체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최승우 방위성 총리는 다음 임기 때 높은 확률로 내무성 총리에 오를 가능성이 크지요. 내무성 총리는 타 총리가 없을 땐 사실 국무총리나 다름없잖습니까?”
“흠”
“그에 반해 저는 아마 다음 임기 때도 해군 사령관을 맡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 발해의 제독 중에 저만큼 적당한 나이는 없잖습니까? 다들 너무 젊거나 너무 늙었죠. 아무튼, 발해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을 최 총리가 굳이 해군과 각을 세울 생각은 없을 겁니다. 해군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커질 테고, 지금도 커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런 억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거죠.”
그 말을 다 들은 장건영은 못 당하겠다는 듯 픽 웃었다.
“자네도 꽤 정치적이 되었어.”
“해군 사령관 노릇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장건영은 전능창이 내민 보직 변경 서류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포기하지 않은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으면 좋겠네. 그렇게만 된다면야...”
“걱정 마십쇼. 저, 해군 사령관입니다.”
전능창은 보직 변경 서류를 조심스레 받으며 환히 웃었다.
건국력 139년(서기 918년) 겨울
서울, 경복궁 국왕 집무실
“지금... 해군 사령관이 전능창 대장이었나.”
“예, 폐하.”
“많이 컸군.”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해군 사령관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해군 사령관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하지만 폐하-”
“무슨 말인지는 알아. 하지만, 그 정도 눈치가 없을 만한 친구로는 보이지 않아. 그리고 신 함대 편성도 이제 막 궤도에 올랐지 않나. 적어도 다음 임기까지 해야 매듭짓지 않겠나?”
내 말에 왕건은 딱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내 포기하고선 내게 서류를 건넸다.
“그래도 해군 사령관의 계획을 한 번쯤 멈추긴 해야 합니다. 육군도 사단 편제로 전환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습니까. 하물며 해군인데도 아주 거창한 계획을 썼군요. 아예 의료 시설만을 담당하는 함선이라니...”
난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범선, 낭만 가득한 함선이지만 보통 ‘낭만’ 이 한 단어로 설명되는 물건들은 이래저래 하자가 있기 마련.
범선의 시설은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하기 힘들다. 식량, 식수, 잠자리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러니 이 부분을 개선해야 작전한계점이 올라갈 것은 자명한 이치인데...
그걸 한 범선에서 하기에는 기술적인 무리가 있으니 이래저래 분리를 하는 거다.
그저 간단한 처치만 하는 각 함선의 의료 시설을 대체하기 위한 병원선, 부족한 보급품을 보급해줄 보급함 등으로.
“그거야 해군이 알아서 할 일이야. 너무 신경쓰지 말게.”
“...제가 곧 재무부 장관이 되는 건 아십니까?”
“그럼 그때 돼서 논의하도록. 아, 그리고 보여줄 게 있다면서.”
왕건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나에게 논문 하나를 내밀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석? 뭔가 이건?”
“논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왕건은 종종 내가 흥미롭게 볼 만한 논문을 긁어오고는 했다. 나 역시 학계에서 뭔 생각을 하는지 단편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 흠, 호오... 아. 비서실장, 이 논문을 쓴 사람과 만나고 싶은데.”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흠, 일정상 내일 오후 3시에 약속 잡겠습니다.”
“그래, 내 일정이야 알고 있으니 그쪽도 배려해서 잘 조율하게.”
왕 무게도 있으니까 상냥하게 대해야지. 안 그러면 다 쫀단 말이야.
... 그리고 나는 예정대로 다음날 3시에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흠, 미묘하게 압박을 넣은 건 아니겠지.
자신을 신강이라고 소개한 교수는 애써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걸 보아서는 분위기를 좀 풀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좋네. 나는... 흠, 학자들과 가끔 이렇게 학문을 논하거든. 혹시 주위 학자들에게 들은 적 없는가?”
“소, 송구합니다만....”
“그건 아쉽군. 하지만, 진짜일세. 내 집무실을 거쳐 간 학자들만 수백 명이 넘지. 그러니 그대는 안심해도 좋다네. 아무튼, 자네의 논문에 대해 말인데 굉장히 기발하더군.”
“그것이... 그러니까... 어...”
음, 왜 저리 떠는 거지?
아! 논문 내용이 조금 민감하긴 했군. 이런, 이건 내 실수다.
“오해하진 말게. 이건 진심이니까. 경의 논문대로 사회라는 것은 결국에 커다란 계약 관계 아니겠나? 그들은 충성하고 나는 보호한다.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한없이 간단하지.”
“허억...”
“그렇잖나. 국가라는 게 갑자기 뿅 하고 생겨날 리 없지. 다 필요에 의해 나온 것 아니겠나? 경도 그리 생각하기에 이런 논문을 썼고.”
“아, 예에... 그... 렇기는 합니다만.”
“들려주게. 그 입으로 직접. 꼭 듣고 싶네.”
나는 기쁨을 한껏 담아 그에게 요구했다.
알고는 있었다.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당나라에 대한 완연한 인정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걸.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아시아 문화의 중심지이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그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문화, 철학으로부터 주변의 문명이 시작되었으니.
그렇기에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그간 중국 철학자의 의견에 기반해서 자신들의 철학을 펴 갔다.
“그렇다면 우선 자연 상태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아무런 질서가 없다면 인간의 삶은 피폐해지고 비참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연 상태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폭력과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
그렇기에 결국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그 대가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리는 오롯이 한 사람, 즉 군주에게만 양도되고 군주는 그 책무를 다해 국가를 운영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을 다 들은 나는 작게 박수치며 그를 격려했다.
“훌륭하네.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군. 헌데 이러한 생각은 어쩌다 했나?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것 아닌가.”
“개인적인 일로 당나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폐하고 참담한 현실을 마주했지요. 절대적인 군주가 부재하고 질서가 무너진 그곳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한 무리를 발견했는데 그들은 나름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호, 어떻게?”
“그들은 스스로 농군이라고 칭하며 한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그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의 삶이 썩 좋다고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은 것이었죠. 그들이 하늘의 뜻을 받들었다고 보기엔 어렵지 않겠습니까?
분명 그의 설명은 이곳 저곳이 비어 있었고 허술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홉스의 사상과 닿아 있다는 것을.
- 작가의말
홉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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