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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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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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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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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8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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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69. 출항 (6)

DUMMY

“흠.”


페이는 뒤로 물러선 채 담담히 상처를 막았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이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울컥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려는 내장을 쑤셔 넣었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회복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페이는 눈앞에서 다가오는 헌진에게 애써 초점을 맞추었다. 제국군의 흐름 속에서, 두 기사에게 접근하려는 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페이와 헌진을 피해 앞으로 쏠려갔다. 배가 있을 곳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선두는 배에 도착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도시에서.”


페이는 순간 목에서 치솟은 피거품을 뱉어냈다.


“사람은 고이고, 소모되고, 죽으며, 썩는다네. 헌진, 우리가 지키고 싶었던 인류의 요람은 어디로 갔는가. 사람을 연료 삼아 연명할 뿐인 이 도시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우문이다, 페이긴. 인류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이 도시 없이 인류는 성립되지 않는다. 도시 없이 인류가 존재할 수 없다면,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이 도시를 지켜야만 한다.”

“그것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어도 말인가.”

“물론이다.”


피가 서서히 멎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흘린 피에 시선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페이는 헌진과의 거리감을 잡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한 번 기습을 허용한 지금 충돌할 수는 없다.


“헌진, 그대는 모른다네. 그대가 없는 동안 이 도시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일세. 기사단은 구역별로 흩어졌고 황제는 스스로 유폐했지. 이 도시는 자네가 알던 도시가 아니야.”

“예견된 바다.”

“알고 있었다고?”


헌진이 칼을 들어 올렸다. 닿는 거리인가? 페이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헌진은 그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황제 폐하는 이 도시를 해체하려 한다. 그것이 내가 황제 폐하를 베려 한 이유다.”

“······그렇군.”


헌진으로부터 입력된 정보가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황제의 의지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그 정보를 왜곡시키고자 했다. 헌진을 죽이라는 명령이 멋대로 살의를 일으켰다.


‘내 머릿속에서 건방 떨지 말게, 황제.’


페이는 그 반발을 단호하게 억눌렀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뇌를 파괴할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페이는 눈과 코로 피를 흘리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죽이려는 이유인 게로군.”

“너에게는 알 자격이 있다.”


헌진의 발이 조금 뒤로 뻗었다. 끝을 볼 심산이다. 헌진이 쇄도하려는 순간, 페이는 힘껏 발을 굴렀다. 바닥이 갈라지고 솟구치며 파편이 서로의 시야를 가렸다.


주변에 알짱거리던 제국군이 일시에 넘어질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다. 헌진은 멈칫했다. 페이를 시야에서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서 헌진을 위협할 만한 또 다른 살기가 후방에서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헌진!”


알베릭이 병사들 틈에서 튀어나왔다. 아직 수복이 덜 된 대장간 때문이었는지 그의 진입은 뒤늦었다. 그러나 페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페이는 알베릭과 헌진이 얽히는 틈을 타 전장에서 이탈했다. 지금은 배를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헛수고일 뿐이다, 페이긴.”


헌진은 페이를 흘깃 보고는 알베릭에게 집중했다. 제 특기를 살리지 못할 만큼 이성을 잃은 알베릭을 상대로 헌진은 밀리지 않았다.



“갈고리를 걸어라!”


배를 기어오르려는 제국군이 아우성쳤다. 사다리를 걸기에는 배가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여러 갈래에서 던져진 밧줄만이 유효했다.


기어오르려는 제국군을 상대로 반란군은 선전했다. 수없이 쏘아대는 탄환이나 화살이 병사들의 몸을 꿰뚫었고 밧줄을 끊어내는 움직임이 신속했다. 그러나 제국군이 구멍 뚫린 배의 뒷부분으로 진입하자 내부에서는 난전이 벌어졌다. 세하라는 적의 진입을 제지하려는 내부 전투에서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바깥은 동지들에게 맡겨라, 눈앞에만 집중해!”


일직선으로 늘어선 사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적의 선진이 우르르 무너진 자리로 세하라를 비롯한 반란군이 칼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밀어붙여!”


저들이 동력부를 건드리게 둘 수는 없었다. 근접전에서는 약세인 반란군이었으나 몸으로나마 틀어막겠다는 의지로 그들은 앞으로 나섰다. 일제히 들이닥친 반란군의 충격에 운 없는 병사 몇이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떨어졌다. 그러나 밀집대형에는 제국군이 더 익숙했다. 그들은 곧 힘을 모아 반란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세하라는 앞으로 구르며 앞에서 달려드는 병사의 옆구리를 길게 베었다. 갑판에서 벌어지는 전투 역시 걱정스러웠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마지막으로 본 페이는 적에게 몸을 베였지만 애써 기억에서 밀어냈다. 헌진은 세하라에게 배를 맡겼다. 지금은 오직 그것만이 세하라의 버팀목이었다.


순간 어깻죽지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어닥쳤다. 세하라는 제 몸에 칼을 꽂은 병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 역시 필사적인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세하라는 고통을 견디며 칼을 내질렀다. 적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지만 그만큼 세하라도 뒤로 물러났다.


“세하라!”


곁에 선 동료가 세하라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 자리를 다른 동료들이 메웠다. 세하라는 신음을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견디게, 곧 페이께서 오실 거야!”


갑판으로 향하는 계단에 몸을 기댄 채 응급처치가 행해졌다. 세하라는 전장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고통을 견뎠다.


“갑판의 상황은?”

“걷어내고 있습니다!”


계단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지어 이어지는 사격의 소음이 점차 잦아들고 있다. 갑판의 전투는 성공적인 모양이었다. 화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으니 지키는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문제는 배의 내부에 있었다. 바깥과 내부로 이어지는 구멍을 수리하지 못하면 놈들은 집요하게 들이닥칠 것이다.


“숱하게 떨어질 걸 알면서도 달리는 배에 잘도 기어오르는군. 그렇지 않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치료하던 동료가 말을 건넸다. 세하라의 의식을 고통에서 돌려내기 위해서였다. 세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가려는 것처럼 저들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어리석은 자들이로군.”

“그래, 그것도 우리처럼.”


동료가 세하라의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세하라도 희미한 미소를 돌려주려다가 인상을 썼다. 파고든 상처가 제법 깊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오른팔을 마음껏 쓰지 못할 상처였다.


“버텨라! 물러서지 마라!”

“반란군은 우리 상대가 안 된다! 밀어!”


전선이 점차 밀려나고 있다. 접전이 벌어지는 틈에서 양측의 비명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세하라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다.”

“나중으로 미루지.”


곁에 선 반란군이 세하라에게 창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세하라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반란군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첫 번째 전선이 무너지고, 가뜩이나 좁은 내부는 제국군이 더 많았다. 세하라는 창을 세우고 앞을 막아섰다. 쓰러진 동지들을 짓밟으며 적이 전진했다. 그나마 신음을 내던 쓰러진 자들이 곧 침묵했다. 세하라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그러나 분노를 숨기지 않고 창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님들이 많군.”


막 격돌하려던 순간에, 제국군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은땀을 흘리던 세하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국군의 통로 역할을 하던 구멍에 자그마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페이!”


그림자를 알아본 세하라가 소리를 질렀다. 페이는 자신의 뒤에서 기어오르려던 병사의 얼굴을 뒷발로 걷어찼다.


“무임승차는 거절하는 바네.”


페이가 날뛰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병사들은 바깥으로 내던져지거나 바닥에 쳐박혔다. 반란군에게만 신경을 쏟던 제국군이 채 뒤로 돌기도 전이었다. 앞뒤에서 적을 맞이한 제국군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손쉽게 제압당했다. 페이가 그들 모두를 밖으로 집어던지는 동안, 세하라는 창을 휘두를 필요조차 없었다.


페이가 지키는 동안 구멍을 틀어막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페이는 시체들 사이를 건너며 세하라에게 말을 건넸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세하라.”


세하라의 상처를 보는 페이의 표정은 서글펐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잘 버텨주었네.”

“하지만 페이의 상처도······.”


페이의 몸을 가른 상처는 아직 채 낫지 않았다. 상당 부분 아물었지만 크나큰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세하라의 걱정을 눈치 챈 페이는 과장스럽게 팔을 걸렸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세. 그래, 침 바르면 낫는다는 상처란 이런 걸 말하지.”


그러나 페이의 얼굴도 세하라 못지않게 창백했다.


“자, 가지. 출구가 코앞이야.”


페이는 몇몇을 내부에 남기고 갑판으로 이어진 계단에 올랐다. 세하라가 페이의 손을 잡고 힘겹게 발걸음을 떼었다.


갑판 위에서는 총성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제국군은 아직도 공격을 포기하지 못했는지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오를 수단도, 화력을 막아낼 수단도 없으니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페이는 갑판에 오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판 위에서는 창칼에 맞은 동지들은 없었다. 쓰러진 자들은 제각각 몸에 화살이 꽂혀있었다. 내부와는 달리 사격전이 벌어진 결과였다.


“이 또한 내 어리석음이로군.”

“또 다른 기사는 페이의 예측 밖이었습니다. 탓하실 필요없습니다.”


페이는 배의 뒤편에 섰다. 헌진과 알베릭의 전투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헌진은 물러설 기회를 엿보는지 주춤거렸다. 흩어진 대장간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창이나 칼, 갑옷이나 방패 따위로 형태를 바꿔대며 헌진을 밀어붙이는 알베릭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웠다. 두 기사가 벌이는 결투의 결과가 궁금했지만 페이는 더 이상 그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벽이 가까워진다. 5구역을 감싼 장벽이다. 그 너머에는 강이, 또 강을 막은 장벽 너머에는 바다가 있다. 페이는 숲에서 이곳까지 이르는 길이 대원정을 떠났던 길보다 까마득히 길게 느껴졌다.


“함포 준비.”


벽이 충분히 가까워지자 페이는 손을 들었다. 그러나 페이는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기묘한 감각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페이는 순간 그 감각을 의심하고 싶었다.


또 다른 기사의 기척이다. 페이는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배의 앞머리에 섰다.


장벽을 향해 돌진하는 길 위에서, 배에 비하면 하찮을 만큼 가녀린 누군가가 막아서고 있었다.


“이런 젠장.”


페이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대가 왜 거기에 있는 겐가.”


그곳에는 루미스가 창을 든 채 배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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