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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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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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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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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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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8. 출항 (5)

DUMMY

두 기사의 결투에는 아무도 끼어들지 못했다. 거리를 벌리려는 알베릭에게 적극적으로 따라붙으며 페이는 호각을 유지했다. 어차피 자신의 어린 몸으로 기사를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기 위한 근접전이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페이는 헌진의 생각을 헤아리고 경악했다. 알베릭이 지닌 무기와 성향, 머릿속에 있는 황제의 의지를 알고 있다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일 테지만,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수단이었다.


알베릭은 인질로 잡힌 집정관을 의식해 망설였다. 헌진은 그런 알베릭을 상대로 앞에 나서서 광범위 포격을 유도했다. 배가 포격 범위에 들어오도록 등지고 선 채, 자신의 몸 일부가 찢기는 것을 감수했다. 페이는 헌진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헌진의 생각대로 페이는 뛰쳐 나와야 했다.


‘모조리 미쳐버린 게야.’


헌진도 알베릭도 다른 두 기사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 황제의 의지 때문이든, 개인적인 욕망이든 동기에는 변함이 없다. 페이는 자꾸만 헌진에게 쏠리려는 몸을 가다듬으며 알베릭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움직이는 대장간이 한 줌뿐인 알베릭은 특기를 살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배의 동력부를 파괴하기에는 충분하다. 페이는 세하라가 서둘러 동력을 복구하기를 바랐다.


“알베릭, 나를 보내주게. 헌진을 상대하는 건 그 후에도 충분하지 않겠나!”


가당찮은 말이라고 알면서도 페이는 외쳤다. 핏발 선 알베릭의 눈동자가 굴렀다. 그의 머릿속에서 전자음이 들려왔다. 알베릭의 사고회로가 간섭당하는 소리였다. 페이의 것과 똑같은 고통이다. 그러나 알베릭은 페이처럼 황제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황제를 향한 새삼스러운 분노를 느끼면서, 알베릭은 페이의 가슴께를 걷어찼다.


“언제까지 황제에게 삶을 지배당할 셈인가!”

“폐하를 모욕하려 한다면 당신 또한 죽어 마땅하죠!”


헌진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움직이는 대장간이 수복되기 전에 페이와 반란군은 벗어나야 한다. 철혈을 벗은 지금, 두 조건 중 하나라도 달성되면 대적할 수가 없다. 기동력을 살려 버티는 것은 페이의 장기였지만 시간이 적의 편이라면 오히려 독이다. 페이는 대장간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알베릭에게 따라붙었다.


그 순간 헌진의 기척이 사라졌다. 헌진이 어떤 행동에 나섰다. 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페이의 의식이 후방에 쏠렸다.


자신의 어리석음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설픈 공격을 알베릭이 잡아냈다. 자신의 다리를 붙잡은 알베릭과 눈이 마주쳤다. 알베릭의 칼이 페이의 몸을 길게 그었다.


경갑을 분사시켜 공중에서 간신히 몸의 궤도를 꺾었다. 그러나 얕지만 긴 참격이 몸에 새겨졌다. 페이는 다리를 붙잡힌 채 버둥거렸고, 알베릭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집어던졌다.


‘나도 늙었군.’


오랜만에 맛보는 고통이었다. 페이는 허공을 날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단 한 번의 공격이라도 허용하기 아쉬운 몸이었다. 바닥에 몇 번 튕기면서 자세를 잡은 페이는 착지하자마자 뛰어올랐다.


“페이!”


세하라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배의 동력부를 고쳤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야 끝에서 배를 향해 달려가는 헌진과 그를 뒤쫓는 알베릭에게 액체금속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출발하게, 세하라!”


배 위에 있던 반란군이 헌진을 향해 총이나 활 따위를 쏘아댔다. 그러나 궤적이 읽히는 한 기사에게 명중하는 일은 없다. 헌진은 비처럼 쏟아지는 투사체를 피하며 배에 근접했다.


바닥을 흐른 액체금속이 알베릭의 손에서 형태를 갖추었다. 페이가 알베릭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떼어냈다. 헌진은 다시 알베릭의 공격을 유도하고 있다. 허용한다면 예비동력마저 잃은 배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페이는 두 다리에 장착한 경갑을 최고출력으로 올리며 거칠게 달려들었다.


“헌진!”


페이의 발이 등에 꽂히려는 순간, 헌진이 뒤를 돌며 칼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부딪친 두 기사의 무기가 불꽃을 튕겨내자 바닥이 들썩였다.


헌진을 향한 살의가 들끓었다. 페이는 이성을 조절하며 황제의 의지와 맞섰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닌 살의가 머릿속에 남아있다. 페이는 시동이 걸린 배를 힐긋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헌진,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이러한 짓은 그대의 전술에 해당하지 않을 터! 그대는 죽음이 도피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나!”

“내 목적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알베릭을 상대로 간신히 직격을 피해낸 헌진의 몸은 너덜거렸다. 기사의 일반적인 회복속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의 살과 근육은 지금도 재생하고 있었다. 죽일 수는 없더라도 무력화해야 한다. 페이는 전투를 위한 자세를 취하고 헌진을 노려보았다.


“내 목적은 항상 이 도시를 지켜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피에 물든 머리카락 사이로 헌진의 눈이 번뜩였다. 페이가 알고 있는 헌진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는 핏물이 스며든 이를 드러내며 속삭였다.


“방해되는 기사 또한 전부 죽여야 한다.”

“바로 그 점이 그대답지 않단 말일세! 그대가 데리고 다니던 그 소녀는 그대의 생각을 알고 있는가? 그 애가 알면 어찌 생각하겠는가!”

“이 또한 나리아를 위한 일이다.”

“하! 황제가 그대의 머리에도 장난을 쳤군!”

“말해도 넌 이해하지 못할 거다, 페이긴.”

“지금 자네 꼴을 보니 동감일세!”


여린 몸은 페이의 격투술을 펼치기에는 조잡하다. 제법 큰 상처를 입었지만 헌진은 여전히 단단했다. 페이는 힘겨운 공방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만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페이의 철혈에서 떼어낸 낡은 파워팩 하나로는 속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충분한 힘이 받쳐줄 때까지 페이는 홀로 버텨내야 했다.


배 위에서 세하라가 헌진을 향해 결단을 겨누는 모습이 보였다. 페이는 짧은 눈짓을 했다. 결단의 탄환은 아껴야 했다. 세하라는 입술을 깨물며 결단을 거두었다.


그때 페이의 귀가 자그마한 금속음을 감지했다. 제 몸의 안전보다 그것이 위협적이었다. 페이는 뛰어올라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헌진과 페이의 사이로 파고들던 대장간의 궤적이 발끝에 닿아 꺾였다. 헌진은 당연히 피해낼 냉정하지 못한 공격이었고, 당연히 배에 꽂힐 탄환이었다. 페이는 어리석은 알베릭에게 새삼 분노를 느꼈다. 알베릭의 사격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페이가 탄환을 쳐내는 동안 헌진의 칼이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에는 저격, 앞에는 기사. 이제까지 없던 지독한 전술요소였다. 동시에 감당하지 못한 페이의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 헌진은 배 위로 뛰어올랐다.


갑판에 올라선 헌진을 목도한 반란군은 허둥지둥 물러섰다. 몇몇이 헛된 사격을 해댔지만 헌진은 고갯짓만으로 피해냈다.


“물러서! 맞설 생각은 하지 마!”


세하라가 헌진에게 결단을 겨눈 채 외쳤다. 페이를 접해 알고 있으니 무의미한 저항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헌진은 칼을 쥔 채 달려드는 자를 벨 자세를 취했지만, 모두가 물러설 뿐이라는 사실에 주저앉고 뱃머리를 향해 달려갔다.


“무, 무슨 짓이오! 자네는 도대체······!”


선수상에 묶여있던 헬무트가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헌진의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페이는 섣불리 그를 추격했다가 동지들이 휘말릴까 봐 속절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순식간에 헬무트를 짊어진 헌진은 배 아래로 뛰어내렸다. 집정관이라는 방호벽마저 사라진 지금, 후방에서 대기하던 제국군이 공격해오는 것을 막아낼 자는 없다.


“공격!”


누군가의 외침이 병사들을 자극했다. 기사들의 싸움에 굳어있던 제국군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헌진을 겨누려던 알베릭은 시야가 병사들에게 가려지자 혀를 차며 그 흐름에 섞여 들어갔다.


헌진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헬무트와 함께 붙잡혀있던 호위병의 애처로운 비명은 소란 속에 묻혔다.


“페이! 돌아오십시오!”


페이는 배 위에서 손을 뻗고 있는 세하라와 달려드는 제국군을 번갈아보았다. 배가 충분한 속력을 내기 전에 제국군은 도달할 것이다. 사다리나 밧줄을 걸어 오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헌진이 휘저은 선상은 혼란이 아직 수습되지 않았고, 알베릭이 뚫은 구멍을 보수하기에는 여유가 없다. 종합적인 상황판단은 페이를 세하라가 아닌 제국군을 향해 돌아서게 했다.


“나는 괜찮네, 세하라. 배를 지켜내게. 그 배는 우리의 유일한 보금자리일세.”

“페이!”

“내가 저런 송사리들에게 물어뜯길 것처럼 보이나?”


페이는 세하라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제국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하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하릴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작은 몸은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곧 사라졌다.


사라졌나 싶은 순간, 제국군의 선두에서 굉음과 함께 병사들이 솟구쳤다.


“놈을 상대하지 마라! 반란군의 이동요새부터 공격해!”


장교의 필사적인 명령도 돌연 끊겼다. 황급히 소리쳤던 장교의 앞에 페이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누군가의 턱에서 뽑혔을 어금니가 페이의 머리에서 굴러떨어졌다.


“쉽사리 우리를 판단하려 들지 말게. 우리는 해방군이라네.”


페이의 작은 주먹이 얼굴에 꽂히자,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장교가 나가떨어졌다.


수많은 제국군을 상대하는 페이의 전투는 일방적인 구타와 닮아있었다. 그 상대가 얼마나 많든 병사와 기사간의 전투는 성립되지 않았다. 주먹 한 번, 발길질 한 번에 여러 병사가 공중에 튀어오르거나 나뒹굴었다. 그 모습은 파도를 걷어내는 조약돌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동시에 세하라의 어두운 상상을 걷어내는 것처럼 밝기도 했다.


페이가 홀로 제국군 전체의 움직임을 종횡무진하며 막아내는 사이, 배는 점차 전장에서 벗어나고자 속도를 내려 했다. 힘겹게 가동하기 시작한 동력은 그래도 충분하다는 듯 움직였다. 세하라는 정면과 전장을 번갈아 보며 초조함을 느꼈다. 5구역에 이르는 장벽은 머지않았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제국군 전체를 두들기듯 휘젓던 페이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졌다. 새삼 자신의 늙음과 어림을 실감했다. 그러나 그 둔화한 움직임을 세하라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페이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눈앞을 지나가려는 병사들을 억척스럽게 잡아챘다.


그 미묘한 차이를 노리듯, 날카로운 살기가 페이의 뒤에서 불현듯 솟아났다. 페이는 황급히 뛰어올라 살기의 반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아주 약간, 전투를 거듭하며 소모된 몸의 반응은 느렸다. 찰나에 불과한 그 시간은 헌진에게는 충분했다.


고개를 돌린 페이는 병사들 틈에 선 헌진을 보았다. 은밀기동에 특화한 헌진이라면, 이 난전 속에서 병사들 틈에 섞여 페이에게 도달하기에 충분했다.


“이 도시를 위협하는 꿈도 여기까지다.”

“헌진······!”


헌진의 톱니칼이 회전했다. 주변 병사들이 휘말려 살갗이 찢기든 창칼이 뜯기든 헌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단호한 칼질은 페이의 정면을 베어 오르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페이!”


유달리 짙은 핏물이 허공에 치솟자, 세하라는 단숨에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배가 기어코 충분한 속도를 내는 시점이었다.


작가의말

월요일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이제 장마가 시작된다더군요. 비는 줄창 내리고 습해 빨래를 해도 만족스럽지 않아서 코인세탁방에서 건조기를 돌리고 온 참입니다. 다들 뽀송뽀송한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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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7. 폐기물 (2) 21.06.29 24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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