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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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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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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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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67. 출항 (4)

DUMMY

기사단 내에서 알베릭만큼 움직이는 대장간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황제가 제작한 무기 중 가장 기괴한 그것은 소유자의 정신에 반응해서 형태를 변환한다. 액체금속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을 만큼 부정형인 대장간은 의지에 따라 반응하는데, 오직 알베릭만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헌진은 움직이는 대장간으로 칼밖에 생성해내지 못했고, 루미스는 긴 막대만을 만들어냈다. 차례차례 시험해나가던 기사단은 미르돈에 이르렀고, 그는 황제와 비슷한 인물상을 만들어냈다.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으로 기사단의 막내인 알베릭에게 움직이는 대장간을 맡겼다.


알베릭은 선배들을 보고 다소 기죽은 채로 대장간에 임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며 기사단을 놀라게 했다. 온갖 무기와 형태, 심지어 여러 갈래로 분리해 여러 물건을 동시에 생성하기도 했다. 다른 기사는 해내지 못했던 동작이었다. 황제는 만족스러워하며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네가 생각하는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떠올려보아라.’


알베릭은 황제의 지시를 따랐고, 황제는 그것을 보고 대장간을 알베릭에게 수여했다.


‘그것의 주인은 너다. 기사단에 부족한 저격병에 임명하마.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하도록. 오직 저격에만 임하고, 동료들과 함께할 때는 최대한 절제하며 사용해라.’


알베릭은 자신이 떠올린 이미지로 변한 대장간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알베릭은 헌진을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전류가 일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펼쳐지는 이미지를 가두었다. 그러나 그것을 강제로 열어젖히듯 황제의 의지는 작동했다.


‘헌진을 죽여라.’


황제의 의지는 확고했고, 알베릭은 늘 그랬듯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알베릭은 헌진을 과거의 헌진으로 상정했다. 헌진이 기사단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단신으로 기사 마흔 명을 상대했고 스무 명을 살해했다. 그런 헌진을 죽이기 위해서는 빠르고 강력하게, 넓고 깊게 파헤쳐야 한다. 대장간이 황제의 의지를 따르려는 알베릭의 의지를 따랐다.


“멈춰!”


알베릭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대장간을 향해 외친 것이 아니다. 자신을 뒤따르던 제국군을 향해 외친 명령이었다. 그러나 몇몇 제국군은 섣부른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움직이는 대장간이 가동했다. 그것은 알베릭을 가리듯 넓은 면을 펼쳤다. 수만 조각으로 갈라진 금속들이 맹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이한 안개와도 같이 변한 금속에 겁을 먹은 반란군이 총이나 활을 쏘아냈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닿기도 전에 으스러져 흩어졌다.


“모두 엎드리게!”


페이가 난간 끝에 서며 외쳤다. 그 의미를 깨달은 반란군은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진동하는 무수한 금속이 쏘아졌다. 페이는 팔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억제되지 않은 파괴의 강림이었다. 그 광경을 본 온 구역민이 몸을 떨었다. 조각이 쏟아지며 일으킨 충격파가 퍼지며 공기를 찢고 대지를 갈랐다. 멋모르고 뛰쳐나갔던 제국군 몇의 몸이 증발하며 피 안개를 흩뿌렸다.


무차별 폭격은 가 닿는 면적을 파괴했다. 그 앞에 선 것이 건물이든 돌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았다. 파괴적인 흐름이 지나가는 모든 것을 휩쓸었고 집어삼켰다. 태양이 떨어진 듯한 충격에 알베릭의 눈앞은 폐허가 되었다.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영겁의 파괴가 지나간 듯한 광경 속에서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없다. 지진과도 같은 땅 울림에 제국군은 땅을 굴렀고, 귀에서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페이는 들어 올렸던 팔을 내렸다. 철혈의 장갑조차 너덜거렸다.


“세하라?”


페이의 바로 뒤에 있던 세하라는 주저앉은 채 페이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무사했다.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몸이 굳었다.


헌진에게 쏘아진 대장간은 배를 노리지 않았다. 그러나 배는 폭격의 면적 일부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휘말린 부분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배를 구성한 단단한 목재조차 방호벽이 되지 못했다. 대장간의 파편이 뚫고 간 반란군 몇의 몸이 뒤늦게 무너졌다. 그들의 몸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난간과 함께 온몸으로 받아낸 운 없는 누군가는 산산이 조각난 채 흩날렸다.


처참하기로는 살육이란 말도 부족했고, 끔찍하기로는 파괴라는 말도 부족했다. 그리고 그 흔적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헌진이 몸을 일으켰다.


“헌진!”


눈에 핏발이 선 알베릭이 뛰쳐 나왔다. 지금 그는 자신이 일으킨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제국군이 폭격에 휩쓸린 것도, 페이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치솟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는 오직 본능에 가까운 명령에 따라 헌진을 노렸다.


난사한 뒤 남은 한 줌의 대장간이 알베릭의 손에서 칼로 변했다. 칼은 헌진의 톱니칼과 닮아있었다.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헌진이 칼을 들었다. 톱니칼이 그의 방패가 되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스친 탄환은 살을 찢어발겼다. 헌진의 몸 외곽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헤쳐진 상태였다. 어깨나 허벅지가 뜯겨나간 몸은 전보다 줄어있었다.


알베릭은 앞뒤 가리지 않고 헌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헌진이 어째서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을 노출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헌진의 목숨만을 목표로 돌진했다.


“알베릭.”


헌진은 뼈가 드러난 팔을 휘둘러 알베릭의 칼을 쳐냈다.


“전술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동료조차 버릴 줄 알아야 기사다.”

“닥치십시오, 헌진! 나는 당신과는 달라!”

“그래, 나도 그때의 나와는 다르다.”


쏘아진 대장간이 되돌아오기 전에 헌진은 할 일을 끝내야 했다. 헌진은 걸음을 내디뎌 알베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폭격을 뒤로하고 천천히 나아가던 배가 정지했다. 한동안 멈춰있던 페이는 힘겹게 바닥을 두들겼다. 시암의 응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세하라가 갑판을 열어젖혔다.


“페이.”


갑판 아래에는 피에 물든 시암이 누워있었다. 복잡한 기계로 얽힌 배의 내부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페이는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구멍 하나가 시암의 가슴께에 열려있었다.


“밖에······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시암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지 꿈틀댔다. 그러나 이미 힘이 빠져나간 몸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암은 힘겹게 손가락을 들어 배의 내부 어딘가를 가리켰다.


“무언가가 번쩍이더니······동력원이 정지했습니다. 왜 몸이 안 움직이는지 모르겠군요. 다, 다른 녀석을 좀 내려보내 주시겠습니까?”


페이가 갑판 아래에 내려섰다. 터무니없는 명령에 따라 배를 건조한 노인의 몸이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지금 페이의 머릿속에서 황제의 의지는 작동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능가하는 감정이 황제의 의지마저 짓눌렀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직접 살펴보겠네.”

“페이가 말입니까? 하지만 페이는 배를 지켜야······.”

“그대보다 배가 중요하겠는가?”


페이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지 않았다. 시암은 떨리는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 갑옷을 입은 채로는 페이의 표정조차 볼 수 없군요. 장벽은 아직입니까? 곧 이 도시를 나갈 수 있는 거겠지요?”

“그래, 자네는 피곤한 모양이니 눈 좀 붙이게.”

“거참, 늙으면서 잠도 부쩍 줄었건만 왜 이제야······.”


시암이 페이의 손을 쥐었다. 그러나 곧 힘이 빠진 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페이는 핏물이 지나간 자신의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시암은 먼 시선으로 페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시, 밖으로······.”


페이가 고개를 들었다. 갑판 아래를 보는 세하라의 얼굴은 공허했다. 페이는 그 너머로 흐린 하늘을 보았다. 멀리서 알베릭과 헌진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세하라.”


페이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세하라가 페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력원 일부가 파괴된 모양일세. 이제 이 고철 덩어리를 벗어야겠군. 내려와서 나 대신에 파워팩을 설치해주겠나?”

“페이, 그러나 그 갑옷 없이는······.”

“세하라, 부탁하네.”


세하라가 마지못해 갑판 아래로 뛰어내렸다. 뒤늦은 신음이 그제야 갑판 위를 가득 메웠다. 세하라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암의 시신을 구석에 옮긴 페이가 갑옷을 벗었다. 전면부가 개방되자 작은 몸이 밖으로 나섰다. 페이는 철헐의 뒤에서 무언가를 조작하더니 자그마한 원통을 꺼내 세하라에게 내밀었다.


“이것일세.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면 충분할 거야.”

“페이께서는······.”

“나에게는 할 일이 있네.”


페이가 싱긋 웃어주고는 순식간에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세하라는 잠시 페이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시암은 지식을 세하라와 공유했다. 작업에 문제는 없다. 세하라는 구멍 뚫려 빛이 들어오는 배의 내부를 나아갔다.


갑판 밖에 나선 페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격에서 벗어난 반란군이 영문도 모른 채 부상자를 펼쳤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그들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릭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배 아래에서는 알베릭과 헌진이 뒤섞이고 있었다. 페이는 분노했다. 황제의 의지는 헌진에게 분노했고, 페이의 의지는 알베릭에게 분노했다. 두 사람을 향한 살의는 스스로 주체하지 못했다.


배는 중요하다. 도시 밖으로 나가려는 해방군의 지침에 변화는 없다. 그러나 페이는 자신의 감정을 해소해야만 했다. 산산이 조각난 동지들을, 갑판 아래에서 차게 식어가고 있는 시암을 떠올리는 순간, 페이는 폭발했다.


어린 몸으로는 전력은 열세. 그러나 알베릭이 쏘아낸 대장간은 아직 복귀하지 않았고, 헌진의 몸은 너덜거렸다.


페이의 다리에 장착된 경갑이 분사했다. 난간을 가볍게 박찬 페이가 다리를 휘둘렀다. 탄환처럼 쇄도한 페이가 헌진의 무방비한 등을 타격했다. 헌진은 상처를 입은 몸으로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바닥을 굴렀다.


“알베릭, 이 멍청한 것이!”


공중에서 몸을 회전한 페이의 발이 알베릭에게 꽂혔다. 알베릭은 칼을 들어 간신히 튕겨냈다.


“비키십시오, 페이! 지금은 당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헌진을 죽여야 해요!”

“그것인가? 그래서 그대는 그 끔찍한 무기를 가동했는가? 지금 네 주변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냔 말일세!”

“비키란 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장간이 다시 움찔거렸다. 페이는 흠칫하며 알베릭을 몰아붙였다. 저 무기를 다시 가동하게 둘 수는 없다. 최소한 배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는 봉인해둬야 한다.


알베릭은 이성을 잃었다. 그는 페이처럼 황제의 의지에 저항하지 못했다. 두 기사는 곧 어지럽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금요일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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