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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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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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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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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6. 출항 (3)

DUMMY

“뭐해요, 마린. 많이 바빠요?”


나리아는 창틀에 얼굴을 얹은 채로 중얼거렸다. 창밖에서 벌어지는 괴상한 광경은 알 바가 아니라는 눈치였다. 건물을 으깨며 나아가는 전함과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주민들, 필사적으로 그들을 통제하려는 제국군의 아우성도 멀게만 느껴졌다.


[뭐야, 너야? 갑자기 말 걸지 말아줄래? 야! 사쿠마, 저 새끼 도망가잖아!]

[지금 가고 있습니다, 보스!]


4구역 못지않게 아랫구역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나리아는 마린과 연결된 채널 너머로 들려오는 소음이 문득 멀다고 느꼈다.


“많이 바쁜가 보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할까요?”

[뭐? 이제 더 바빠질 예정이거든? 할 얘기 있으면 지금 끝내! 그리고 너, 어딜 도망치려고? 약 팔아먹고 살면서 재미 좀 봤으면 책임도 져야지? 끌고 가!]


나리아는 마린이 자신에게 하는 말과 남에게 하는 말을 구별해야 했다.


비명 같은 소리가 한참을 뒤섞이더니 간신히 소란이 가라앉았다. 마린을 부르는 목소리가 몇 번인가 들려왔지만 금방 사라졌다. 마린이 물렸거나 사쿠마가 제지했을 것이다. 나리아는 마린이 어째서 통신을 끊지 않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나리아를 배려하고 있었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제 목소리가 왜요?”

[다 죽어가는 애새끼 같잖아.]

“······.”


나리아는 부정하지 못했다. 기죽은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애새끼라는 점 때문이었다. 나리아는 창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소란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원망했다. 어린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누구라도 세 기사가 날뛰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손을 놓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상상 이상의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쪽은 어때?]

“여기요? 어, 창밖에 거대한 배가 도시를 가르면서 지나가고 있어요. 지금 여관에 있는데, 여관주인은 진작에 도망쳐서 텅 비었고요. 총소리가 가끔 들려오고, 세 기사가 서로 죽이려고 하는 점을 제외하면, 뭐, 특별할 건 없네요. 거기랑 비슷해요.”

[······뭐가 비슷하다는 거야? 거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거기는 뭐 살기 좋나요?”


나리아는 작게 웃었다. 전혀 유쾌하지 않은 마른 웃음이었다. 마린은 조용한 곳에서 멈추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뭐가 문젠데?]

“저는 제가 이 여행에서 뭔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아요. 헌진이 하려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손 놓고 볼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그냥 헌진 귓가에서 재잘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나 봐요.”

[그게 뭔 개소리야?]


나리아는 아차 싶었다. 마린을 불쾌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 미안해요. 갑자기 재수 없는 소리 해서, 마린한테 화풀이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지랄을 하는 건데?]

“네?”


나리아가 반문하자 마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는지 뜸 들이는 듯하더니 자그마한 심호흡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지랄을 하는 건데? 잘 생각해봐. 처음에 나는 그냥 잘난 놈들한테 엿 먹이려고 시작했어. 그런데 지금은 주변 서류쟁이 놈들은 날 집정관이라고 부르고, 아랫구역 전체를 우리 구역으로 만들려고 온종일 개고생하고 있어. 이게 누구 때문인데?]

“음······누구 때문이죠?”

[나보고 왕이 되라고 한 건 너야!]


마린은 버럭 외치고 돌연 침묵했다. 주변은 조용했다. 마치 누가 들었을까 봐 경계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젠장, 내 입으로 말하니까 쪽팔려 뒤지겠네.]

“왕이······될 거예요?”

[그래, 그게 뭐 하는 건지도 몰랐는데 8구역의 어떤 늙은이가 알려주더라. 아니, 사실 몰라. 나도 모르게 그냥 되어가는 중인가 봐! 그렇대!]


나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억지웃음이 아니었다. 왕이 되겠다고 선언한 주제에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럴 수야 있지. 그래도 넌 여기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빨빨거리고 잘만 뛰어다녔잖아? 지금도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

“그치만······상대는 기사에요. 그것도 둘이나 있어요.”

[여기 성에 대가리 따이고 누워있는 놈처럼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그놈도 어쨌든 살아있다며.]

“헌진은 두 사람을 안 죽이는 게 죽이기보다 어렵다고 했어요.”

[대체 뭔 상황이람?]


나리아는 어느새 즐거움을 느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마린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6구역과 5구역 간에 벌어진 전투, 거대 괴수, 4구역의 풍경, 그러나 모든 것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나리아가 지상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뭐든 하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그 말대로, 나리아는 뭐든 하고자 했다.


[기사라, 재수 없지. 난 기사란 족속들이 마음에 안 들어. 그만한 힘을 지녔으면서 멍청하게도 자기 생각으로 움직이지를 않잖아. 힘만 센 무식한 것들.]


마린은 기사를 향한 욕을 한참 내뱉었다. 그동안 나리아는 창틀에서 멀어졌다. 배가 있는 방향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건물에 가로막혀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기사는 기사만 상대할 수 있다며? 네가 따라다니는 그 자식은 어떻게 된 거야?]

“헌진은······좀 이상해요.”


헌진은 주저 없이 두 기사를 죽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얼핏 합리적으로 보였으나, 오랫동안 헌진과 함께한 나리아가 보기에는 그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는 무르히를 죽이지 않았다. 도시 전체에 확실한 위협이 되는 미르돈을 살해한 것은 이해되었지만, 페이만으로도 모자라 알베릭을 죽이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나리아는 아직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페이를 제지하고 알베릭을 설득할 아주 약간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자식 꿍꿍이가 뭔지 영 의심쩍긴 했지. 그럼 다른 사람은 없어? 그동안 거기서 뭘 한 거야?]

“있을······걸요?”

[말이 뭐 그러니?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있어요. 아니, 아마도 있어요.”


나리아는 방문을 열었다. 여관 안은 조용했다. 남쪽에서 올라오거나 북쪽에서 내려온 상인들은 모두 도망친 지 오래였다. 여관주인이 있어야 할 아래층도 텅 비어있었다. 나리아는 조급해하며 거듭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에는 헌진과 나리아의 거대한 수레가 보관되어 있었다.


“마린, 저도 이제 바빠질 거 같아요.”

[그래. 나도 가봐야겠다.]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연락할 수 있으면요.”

[그러든지 말든지.]


마린은 시큰둥하게 대꾸했지만 통신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나리아는 수레 구석에 던져진 주머니 하나를 뒤졌다. 그 안을 더듬거리던 나리아의 손끝에 소름 끼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리아는 흠칫하면서도 마린에게 말을 건넸다.


“마린, 우리 친구죠?”

[뭐? 닭살 돋게 갑자기 뭔 소리야?]

“아니에요?”

[어······그렇지 않지만은 않는 것도······아니려나?]


나리아는 주머니에서 찾던 물건을 꺼냈다. 미르돈의 목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나리아는 흠칫하며 떨어트릴 뻔했다. 잘린 단면도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나리아는 자그마한 주머니에 옮겨 담고 창고를 뛰쳐 나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리아는 주머니를 소중히 안은 채 여관 밖으로 달려나갔다. 발걸음은 배를 향하지 않았다. 나리아가 달려가는 방향 저 멀리에는 5구역으로 향하는 관문이 있었다.





페이는 배를 향해 뛰어오른 헌진을 노려보았다. 그를 겨냥한 숲지기들의 총구나 화살촉은 허공을 향했다. 기사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 사수는 없다. 그러나 페이는 그 어느 때보다 헌진의 움직임이 느리게만 보였다.


기사의 육체는 철혈을 착용해야 가까스로 인지를 따라간다. 페이는 선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것만으로도 코앞에 헌진이 보였다. 헌진도 비슷하게 눈치챘지만 몸이 반응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페이의 발이 헌진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헌진은 톱니칼로 타격부위를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철혈의 타격에 헌진은 쏘아지듯 나가떨어졌다.


“배는 건드릴 수 없네.”


페이는 멀어지는 헌진을 보며 중얼거리고 다시 배 위에 착지했다. 발끝에서는 작동하는 분사장치는 어느 정도 공중기동을 가능하게 했다. 배 위에 착지한 페이는 가볍게 목을 까닥였다.


“흠, 부정할 수는 없겠군. 그대를 후려갈기니 어느 정도 상쾌해졌다네.”


헌진을 공격한 것만으로도 황제의 의지를 잠시나마 달래기에는 충분한 모양이었다. 격렬한 살의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코피도 멎었다.


“장벽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5구역입니다.”


세하라가 담담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희미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구역을 나눈 벽을 무너트려 강에 오르고, 도시를 가둔 장벽마저 무너트리면 자유다. 해방은 완수될 것이고, 도시의 지배에서 벗어난 그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도시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진정한 삶에 목숨을 건 자랑스러운 동지들이다. 페이는 세하라를 내려다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철혈에 가려져 보여주지 못해 아쉬울 정도였다.


“끝까지 방심하지는 말게. 이 정도로 끝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 잘 풀렸으니.”

“알고 있습니다.”


페이는 갑판을 두들겼다. 아래에서 다시 시암이 고개를 내밀었다.


“시암, 신호를 보내면 최대출력으로 높이고 포격을 준비하게. 장벽을 무너트릴 때가 왔다네.”

“드디어! 신호만 기다리겠습니다, 페이!”


시암이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페이는 반란군에게 명령을 내리려 했다. 장벽을 무너트리는 순간에는 큰 충격이 있을 것이다. 난간에 서 있다가는 자칫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집정관을 잊을뻔했군그래.우선 선수상에서 인질들을 내려서······.”


페이는 멈칫했다. 이곳으로 엄습하는 빠른 기척이 있었다. 헌진이 분명했지만 페이는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진로 방향은 이상했다. 그는 배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배를 쫓는 제국군의 선두, 알베릭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흠, 멍청하긴, 알베릭에게 가봤자 공격당할 뿐인데······.”


페이에게는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전성기의 헌진이라면 이 낡아빠진 철혈로는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있었던 타격으로 페이는 헌진과의 격차를 깨달았다. 지금은 아득히 페이가 위다. 따라서 페이는 머릿속에서 헌진의 위협수준을 알베릭보다 아래로 보았다.


먼지를 흩뿌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 헌진은, 그러나 페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페이는 배의 끄트머리에 서서 헌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배와 제국군 사이에서 알베릭을 보고 있었다.


“알베릭!”


헌진의 고함은 근방에 있는 누군가가 똑똑히 들었다. 알베릭의 시선이 드디어 헌진을 포착했다. 통신기로만 들었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자, 배를 쫓아 달리던 알베릭조차 멈칫했다.


알베릭의 머릿속에서 황제의 의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설마.”


페이는 동시에 맹렬한 위협을 느꼈다. 헌진의 계획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움직이는 대장간이 헌진을 향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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