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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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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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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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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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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방주 전투 (4)

DUMMY

적어도 네 갈래. 알베릭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가 벌어진 경로를 상정했다. 어렴풋한 화약 냄새와는 달리 놈들의 화력은 거대했다. 알베릭이 상정하지 못하도록 페이가 무슨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알베릭은 힘껏 주먹을 쥐었다. 한순간에 사라진 목숨은 세기도 힘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전선은 당황했다. 알베릭은 그들에게 경고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이 전장에서 페이보다 알베릭을 잘 아는 자는 없다. 의도한 바도 있을 테니 허점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알베릭은 여유롭게 간판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철혈을 경계했다. 페이를 먼저 끌어내야 한다. 페이가 마련했을 전장에 휘말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철혈이라는 이점까지 마련한 페이의 생각에 유도될 수는 없다.


[거대한 소리가 들리는구나. 괜찮으냐.]


속 편한 헌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릭은 둘러보지도 않았다. 그는 알베릭과 페이에게 접근하기를 조심하고 있으니 전장에서 제법 거리를 둔 곳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알베릭은 열이 끓는 것을 간신히 식히며 대꾸했다.


“놈들이 화약 무기를 전개했어요. 선봉이 무너졌습니다.”

[나도 살펴보겠다. 나를 포착하더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황제의 의지에 먹히고 만다.]


알베릭은 헌진이 운운하는 황제의 의지란 말이 낯설었다. 그것이 체화해 만들어진 것이 기사란 존재들이다. 황제의 의지에 따라 이곳에 선 알베릭에게 그 말은 중언부언에 불과했다.


선봉의 생존자가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탄환에 꿰뚫린 탓인지 어깨 부근이 너덜거렸다. 자랑하던 채색도 피로 물들어 검었다. 알베릭은 그가 힘겹게 올리는 보고를 들었다.


“나무 위에 매복이······사방에서 쏘아댑니다. 중진은 신중히, 나아가야······.”


생존자는 보고를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알베릭은 그의 심장이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상상을 넘어서는 위력에 제국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집정관과는 달리 군사훈련을 받은 그들도 그랬다. 낡은 문헌 속에서나 전해지는 잊힌 반란들에서 출현한 화약 무기는 명중률도, 위력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저 숲에서 도사리는 무기는 정반대였다.


“제2진을 꾸려라! 제3진도 준비!”


장교들의 상의는 길었고 명령은 신속했다. 우왕좌왕하던 움직임도 잠시였다. 물러날 수는 없었다. 4구역 내의 독립세력을 허용하고 마는 꼴이다. 알베릭은 심정적으로는 그들에게 동의했다.


“화약 무기는 재준비에 시간이 걸린다. 파상공세로 놈들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방패부대는 겹겹이 에워싸라. 방패를 들고 있는 이상 단 한 번의 공격에 죽지 않는다!”


성급하지만 최선인 수단이었다. 어느 정도는 유효할 것이다. 총기는 적병 모두에게 보급되지 못했고 재배된 화약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적이 무너진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알베릭은 페이를 노려보았다. 결국은 양측 기사의 초조함이 바닥을 드러낼 때 전세는 굳을 것이다.


[알베릭. 뭘 하는 거냐. 너는 왜 공격하지 않는 거지?]


헌진의 의문이 들려왔다. 알베릭의 집중력이 흔들렸다.


“보고도 모릅니까. 페이긴이 뛰쳐나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기사끼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달렸다고 말한 건 헌진 당신이에요.”


헌진은 늘 적을 이길 방법은 적에게 달려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알베릭은 은연중에 그것을 실천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을 먼저 알라고도 하지 않았더냐.]

“요점만 말해요, 헌진! 당신은 이제 제 스승이 아닙니다!”

[잘 살펴봐라.]


알베릭이 배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전장을 굽어보는 철혈 한 기가 있을 뿐이었다. 알베릭과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페이가 그곳에 있었다.


[페이긴은 저기에 없다.]

“뭐라고요?”


헌진의 지적에 알베릭은 경악했다. 운명을 결정할 전장에 본인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대장간은 알베릭의 의지에 따라 변형했다.


저격을 위한 형태가 된 대장간이 알베릭의 손에 감겼다. 알베릭은 총구 너머로 페이를 조준했다. 사격이 이루어진 순간 페이가 돌진해온다면 알베릭은 양이 감소한 대장간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격에 망설임은 없다. 오히려 페이의 기척이 없는 것은 철혈을 입었기 때문이기를 빌기까지 했다.


알베릭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적의 총기와는 다른 소리, 다른 색의 궤적이 철혈을 향해 쏘아졌다. 그 소리를 들은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 하늘을 향했다.


시선이 따라잡지 못할 궤적이 철혈을 강타했다. 알베릭이 바라던 반응은 없었다. 궤적이 강타한 철혈은 외부장갑이 검게 그을린 채 쓰러질 뿐이었다.


[빈 철혈이다.]

“······이런 빌어먹을.”


기사가 전장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달성해야 할 전투 목표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이가 설정할 목표는 단 하나였다.


알베릭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4구역의 성이 있었다.




칼을 쥔 헬무트의 손은 형편없이 떨렸다. 그것을 비웃을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헬무트의 앞을 가로막고 선 소규모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칼을 들었을 뿐인 병사들은 눈앞에 있는 적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반갑네, 집정관.”

“······그대가 페이긴이로군.”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잖은가. 아, 그때는 지금보다 내 키가 좀 더 컸겠군그래. 그 사이 그대는 더 늙었어.”


페이가 발을 가볍게 휘둘렀다. 배에 일격을 맞은 채로 정신을 잃은 병사가 나가떨어졌다.


성은 무의미했다. 페이는 성벽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어른 옷을 걸친 후줄근한 꼬맹이는 달려드는 병사들을 때려눕히며 유유히 걸어왔다. 몸에 걸친 장비라고는 걸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경갑뿐이었다. 그것이 페이에게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는 사실은, 외성에 있는 예비대 모두가 땅을 기어 다니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멈춰라, 역적아!”


집정관을 뒤로한 호위병 한 명이 윽박질렀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제법 용감한 목소리였다. 페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적이라, 무엇이 근거인가?”

“지금 네가 벌이고 있는 짓을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페이가 대답하자 용기를 냈는지 호위병은 한 걸음 나서기도 했다. 헬무트는 그를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극할 바에야, 최대한 시간을 끌어 알베릭이 이변을 눈치채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수동적으로 주입받았을 뿐인 가치관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말게나, 젊은 친구. 그대는 자유와 사람됨을 증명하려는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가?”


페이가 과장된 손짓으로 귓가에 손을 대며 말했다. 상황과는 달리 괴기하리만치 유쾌한 그 모습에 호위병은 애써 뻗은 걸음을 물렸다.


“미친놈.”


페이를 제외한 모두가 공감하는 말이었다. 페이는 머쓱하게 손을 내리며 뺨을 긁적였다.


“역시 그대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이 구역에 의인은 소녀 한 명뿐이란 말인가?”

“물러가라, 이 미치광이야!”

“부정은 못 하겠군. 나 또한 그저 그런 것일 뿐일지도 모르니 말일세.”


페이는 그저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다. 여유로운 태도에 호위병들은 쉽사리 움직이지도 못했다.


“들어보시게, 페이긴.”


헬무트 집정관이 앞으로 나섰다. 호위병들이 미처 말리기도 전이었다. 그는 칼을 늘어뜨리고 앞으로 나섰다. 다리가 시종 떨렸지만, 그는 태연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대는 날 만나러 오지 않았는가. 대화는 나랑 나누는 게 어떻겠나.”

“그래, 그렇고말고. 그대는 윗사람의 미덕을 아는군.”


페이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적이 다가오자 호위병들이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너무 늦었지만 말일세.”


헬무트가 소리를 질러 그들을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페이는 움직였다.


가장 앞서 달려들던 병사의 머리를 페이의 다리가 가격했다. 투구째로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이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 칼은 주먹으로 맞받아쳤다. 부러진 칼날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손바닥을 가볍게 병사의 배에 맞댔다. 그것만으로도 밀쳐진 병사가 벽에 부딪혀 미끄러졌다.


손짓 하나, 발길질 하나에 병사들은 앞다투듯 흩날렸다. 헬무트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눈앞의 광경에 넋을 놓았다. 부하 병사들 사이를 번개처럼 휘감는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집정관, 걱정하지 말게. 이 전투에서 자네가 할 일은 없으니.”


순식간에 병사들을 쓰러트린 페이가 헬무트에게 다가왔다. 헬무트는 물러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칼마저 떨어트렸다. 페이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저 편히 잠드시게나.”


페이의 손이 헬무트의 정수리로 뻗었다. 단순한 손짓에 헬무트의 무릎이 허물어졌다. 페이는 정신 잃은 집정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성 밖을 향해 걸었다.


“전장에는 깃발이 필요한 법이지.”


내성을 나선 페이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 짊어진 헬무트의 무게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고개를 든 페이는 머리 위에 보이는 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점 하나가 깜빡이는가 싶더니 그것은 내성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쓰러진 병사들 사이에 착지한 물체 주변에 먼지가 피어올랐다. 페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매로 부채질을 했다.


“이제 왔는가? 눈치채는 게 늦군.”

“페이긴!”


알베릭은 흙먼지 속에서 뛰쳐 나왔다. 움직이는 대장간이 장막처럼 펼쳐져 페이를 겨냥했다. 페이는 자신의 사방에 드리운 액체금속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적을 이길 방법은 적에게 있는 법이지. 안 그런가, 알베릭?”

“집정관을 내려놓으시죠.”

“내려놓으면, 그 흉기를 가동할 셈인가?”


페이가 바닥에 널브러진 병사의 몸을 발로 건드렸다.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릭은 이를 갈았다. 바닥에 쓰러진 모든 병사는 숨이 붙어있었다. 페이가 의도한 바였다.


“자네의 공격은 위력이 출중하지만 난잡하지. 내가 피하기라도 하면 이 숱한 죽음은 어떻게 보상할 셈인가?”


액체금속이 품은 살기가 멈칫했다. 페이는 헬무트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늙은 고목은 맑은 소리를 내며 부러지겠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군을 살해한 기사의 오명을 말일세. 아니면 정밀조준으로 태세를 변환하겠는가? 내가 자랑하는 이 다리보다 빨리? 그대는 처음부터 뽑을 무기를 잘못 골랐어.”


페이는 비릿하게 웃었다.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알베릭에게 입력된 설정은 아군오사를 금지했다. 페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집정관을, 내려놔라!”


쥐어짜듯 말을 내뱉는 알베릭에게 페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려놓을 걸세. 지금은 아니지만!”


페이는 다른 병사 한 명도 어깨에 짊어졌다. 두 인질을 확보한 페이는 가뿐하게 뛰어 성벽 위로 올라섰다.


“전장에서 보세, 젊은 기사.”


페이는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알베릭을 일별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제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배를 움직일 차례였다.


작가의말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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