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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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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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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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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5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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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60. 방주 전투 (2)

DUMMY

“누님, 괜찮겠소?”


수풀에 엎드려있던 숲지기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나리아는 깨닫지 못했지만, 모습을 감춘 숲지기는 다수 있었다. 오랫동안 매복해있던 숲지기들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들은 저마다 어깨에 총 한 자루를 매고 있었다. 세하라는 활을 다시 어깨에 메며 대꾸했다.


“페이의 손님이라면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지. 그리고 내기를 했다잖아. 이 중에 페이랑 내기 안 해본 사람 있어?”


물을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숲지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페이와의 내기 없이 이곳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세하라는 4구역의 감옥에서 페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대, 이 감옥을 빠져나가게 해주겠네.’

‘헛소리하지 마. 너 따위 꼬맹이가 뭘 어쩌겠다고?’

‘그럼 내기하겠는가?’


철창 너머에서 쪼그려 앉은 페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지었다.


‘그대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면, 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게나.’

‘못 빠져나가면?’

‘그건 그대가 정해야 할 문제겠지.’


세하라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페이는 맨손으로 철창을 일그러트리는 것으로 가볍게 내기에서 승리했다. 그 후로 세하라는 페이를 따랐다. 다른 대부분의 동료가 그러한 것처럼.


“페이가 저 아이에게 내기를 걸었다면 우리와 함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저런 꼬맹이가?”

“꽤나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세하라는 멀리서 달리고 있는 나리아의 등을 보았다. 길을 헤매는지 입구 부근에서 머뭇거리는 듯했다. 세하라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휘파람을 불었다. 나무 한 그루 위에서 숲지기가 몸을 내밀더니 나리아에게 방향을 지시했다. 나리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수룩한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하라는 저 아이에게서 페이와 닮은 부분을 느꼈다.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누구도 닮지 못할 페이와 가장 닮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런 아이일지도 모른다. 세하라는 잠시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상상했다.


멀리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숲 외곽에서 제국군이 포착되었다는 신호였다. 세하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장비를 점검했다.


“가자.”


세하라 인근의 숲이 요동쳤다. 나무에서, 수풀에서 느닷없이 떨어지거나 솟아난 숲지기들이 세하라 부근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마디 없이 조용했다.


그저 도시 바깥으로 나가고 싶을 뿐인 집단은 숲에 이는 바람처럼 차분하게 전장으로 나아갔다.




헉헉거리며 갑판에 오른 나리아는 곧 페이를 발견했다. 페이는 은빛으로 빛나는 거인 곁에 말없이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던 나리아는 상처투성이인 철혈과, 섰다기보다는 그에 반쯤 기댄 페이를 보았다.


“어서 오시게. 이 수다쟁이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페이가 나리아를 돌아보고 빙긋 웃었다. 얼굴이 창백했고 철혈에 기댄 몸에는 힘이 없었다. 나리아에게는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지난밤부터 이어진 알베릭과의 공방은 갑옷뿐만이 아니라 페이의 얼굴에서도 흔적으로 드러났다.


“세하라가 그대를 들여보내 주던가? 그녀도 참, 여전히 배려심이 깊은 아이로군.”

“페이, 말해야 할 게 있어.”

“나는 항복하지 않을 걸세.”


페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리아는 선수를 빼앗기자 입을 뻐끔거렸다.


“······헌진도 너를 상대할 거야.”

“당연한 소리를. 물론 알고 있다네. 그의 행동원리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

“그래도 괜찮아? 헌진은 어찌 됐든, 알베릭은 네 동료잖아.”

“동료라.”


페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사전적인 의미로 우리 관계는 동료였지. 하지만 그대가 착각하는 게 있군.”


마무리작업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배는 가까스로 완성되려는 참이었다. 숲 저편에서는 대규모 이동이 감지되었다. 그 모두를 돌아보는 페이의 시선은 먼 기억을 좇았다.


“기사는 본질이 도구일세.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끈끈한 전우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서로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최우선이고, 그밖에 부산물은 존재하지 않지. 도구 간에 연계란 그런 것일세.”


페이의 말은 담담했다. 그러나 나리아는 루미스와 알베릭을 떠올렸다.


“하지만, 알베릭은 헌진과 네가 동료들을 살해했다고 분노했어. 루미스도 동료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괴로워했어.”

“그것이 효율적이기에 그렇게 설정됐을 뿐일세.”


페이가 철혈을 쓰다듬었다. 기백의 전장을 넘어섰을 거대한 갑옷은 페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컸다. 아직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시절부터 새겨진 상처를 페이의 손가락이 문질렀다.


“루미스는 유격대의 특성상 빠른 움직임이 중요하다네. 동료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를 누구보다 서두르게 움직일 수 있게 했지. 알베릭도 동료를 효과적으로 보조하기 위해서라면 기사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지. 저격수라는 성질상 적의 접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그건 당연한 기능이야. 이 모두가 개개인에게 부여된 조그마한 특성일 뿐이야.”

“기사는 기계가 아니잖아.”

“날 보게. 그대는 내 몸을 보고도, 기사의 인위적인 요소가 눈으로 보일 거라고만 생각하는가?”


페이의 머릿속에는 황제의 의지가 심어졌고, 몸은 해를 거듭할수록 어려져만 간다. 눈에 보이는 단단한 육체만이 기사의 전부가 아니다. 기사는 기계가 아니라는 말은 검증되지 않은 말에 불과했다.


“그대, 기사를 이해하게. 그게 내 마지막 가르침일세. 개개인의 삶이란 이 도시의 세포에 불과하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혼으로 이해하고, 분노하게나.”

“그러면, 네가 반역을 일으키고 도시를 탈출한다는 계획도 설정에 불과할 수 있잖아.”


나리아가 쥐어짜듯 말하자 페이가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머릿속 어딘가에 심어진 황제의 의지를 가리키는 듯했다.


“그걸 증명하려는 것일세. 가설이네만, 이것은 오직 헌진에게만 적의를 드러내고 있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황제에게는 헌진만큼 커다란 위협이 없다는 소리겠지. 그렇다면, 이 도시에서 벗어난 진정한 삶은 헌진이라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이 도시가 가장 경계하는 자유의지는 헌진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헌진처럼 된다면, 나 역시 이 도시의 적의를 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페이가 두 팔을 벌렸다. 처음 놀이터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거창하고 요란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때처럼 여유와 즐거움은 보이지 않았다. 나리아에게는 오히려 처절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진정 나인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제조된 기사는 과연 도시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그 부분만은 온전히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일세.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 도시를 나가야만 한다네. 그대도 알 것일세. 인간성의 확인은 저항에서 오는 법이지!”

“그렇다면 같이 황제를 만나러 가자.”


자그마한 나리아의 말에 페이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간곡한 부탁이기도 했다. 나리아는 페이의 탈출극 끝에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헌진처럼 황제를 베면 되잖아.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벌일 필요는 없어. 헌진과 나랑 같이, 황궁으로 가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가 있단 말이야.”


바다는 배를 녹일 것이고, 도시 바깥은 삶을 환영하지 않는다. 자신을 알기 위해 도시를 나가더라도, 모두 죽을 테니 아무도 그 사실을 관측할 수조차 없다. 나리아는 그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죽음으로 확인되는 삶이 있다면, 더더욱 죽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페이가 두 팔을 내렸다. 그 얼굴은 잠깐 서글프게 보였다.


“나는 내 안에서조차 황제를 베지 못하네.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장면은, 황제를 거스르지 못하고 자네의 목을 베는 모습뿐이야.”


그때 숲에서 함성이 일었다. 봉쇄를 풀고 숲으로 진입하는 제국군의 소리였다. 전투가 가까워지고 있다. 페이는 정면을 노려보았다.


“이제 가시게. 그대와의 시간은 이것으로 끝일세. 나는 마지막으로 내 동료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삶을 알려주어야 한다네. 나와 내 동료들의 앞길에, 그대는 들어올 수 없을 걸세.”


페이가 갑판 아래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배의 만듦새를 확인하던 노인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시암, 이야기는 끝났다네. 숲 바깥까지 정중하게 안내해주겠나.”

“알겠습니다, 페이.”


시암의 억센 손이 나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리아는 잠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가볍게 들린 몸은 속절없이 페이와 멀어졌다. 나리아는 발악하듯 소리질렀다.


“페이! 소원을 말해!”


페이가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있었던 내기를 떠올렸는지 잠시 환하게 웃었다.


“기억해줬는가? 그래, 소원이라. 많은 것이 떠오르네만.”


시암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나리아는 노인의 팔에 매달려 허공에 뜬 채였다. 페이는 잠시 턱을 손으로 짚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밝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우리를 기록해주게. 그게 도서관에게 바라는 내 소원일세.”


페이가 고갯짓을 했다. 시암이 다시 움직였다.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페이의 모습은 가려졌다. 나리아는 힘없이 흔들리면서 외쳤다.


“페이, 죽지 마!”

“불가능한 부탁일세.”


갑판 위에서 먼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아는 그 태연함에 발끈했다.


“아무튼, 죽지 마! 삶을 증명하고 싶다면, 삶으로 증명해!”

“그대는 말솜씨를 좀 길러야겠군.”


나리아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페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며칠째 미끄럼틀을 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기구의 정상에 오르고 기분 좋게 미끄러지며 느끼는 바람이 간절했다. 이곳에 부는 바람은 지나치게 거칠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에게 미끄럼틀을 태워주지 못했군.’


의미 없는 감상을 떠올리며 페이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제국군의 침입에 숲이 반응했다. 성급한 총성이 몇 발 터져 나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페이는 그리움마저 느낄 만큼 친숙한 전투의 소음을 느꼈다.


“폐하.”


페이는 기사의 시야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구름 위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폐하, 황제 폐하! 이것이 당신이 택한 기사이자, 당신께 저항했던 페이긴의 선택이오! 나를 혐오하시오, 황제 폐하! 그것으로 나는 내 삶을 긍정할 것이오!”


페이가 철혈을 돌아보았다. 이제 기사로서 움직여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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