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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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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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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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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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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두 기사 (3)

DUMMY

밤, 알베릭은 성 꼭대기 위에 섰다. 그의 눈은 어둠 너머 아른거리는 배를 살피고 있었다. 곁에 내려놓은 움직이는 대장간이 알베릭의 의지에 따라 꿈틀거렸다.


성 정상에 부는 바람에서 알베릭은 불길한 냄새를 맡았다. 아랫구역에서는 비릿한 냄새와 썩은 냄새가 풍겼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림 제국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 수 있다. 알베릭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정해진 순서였다.


최후의 대원정이 실패한 이후 황제는 황궁에 틀어박혔다. 불길한 소문은 황제가 죽었다고도, 도시를 포기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알현했을 때 황제는 다행히 제정신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인류의 수호자는 인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알베릭이 황제를 따르는 최소한의 근거였다.


그런 황제가 오랜 침묵을 깨고 알베릭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까지처럼 서면으로 전달된 명령이 아니다. 육성을 통한 확고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4구역의 혼란을 제거하라. 불명확한 명령이었지만 알베릭은 4구역에 도착하자마자 그 원인을 파악했다.


알베릭은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상처는 사라졌지만, 목을 파고든 날붙이의 감촉은 남아있었다.


움직이는 대장간이 요동쳤다. 액체화한 금속이 꿈틀거리며 알베릭이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갖추었다. 배와의 거리는 멀다. 총신은 최대한 길게, 총강에는 강선을 새긴다. 표적과의 거리를 고려한 대장간은 최적의 형태를 갖추었다.


대장간은 알베릭의 몸에 붙었다. 알베릭은 자세를 취했다. 총구 너머로 배를 포착했다. 장탄 수는 많지 않다. 대장간의 몸체는 곧 한계다. 먼 거리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을 파괴해야 하는 만큼 총신과 파괴력에 치중한 형태는 상당한 비중을 할애했다. 탄약으로 쓸 금속액체는 얼마 남지 않았다.


알베릭은 신중하게 목표를 조준했다.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한 거리에서도 저격을 성공한 적이 있다. 저격이라는 물리적인 행위가 그에게는 정신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대장간과의 연결상태만 잃지 않는다면 어느 상황에서도 맞출 자신이 있었다.


알베릭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쳤다. 천천히 힘을 주다가 확신이 든 순간, 알베릭은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천둥과 같은 소리가 터지며 번개가 쏘아졌다. 그때 4구역에 있는 누구나 시선을 하늘에 두었다면 밤을 가르는 은빛 궤적을 보았을 것이다. 알베릭은 쏘는 순간 명중을 확신했다.


사격과 동시에 착탄이 이루어질 만큼 비상식적인 속도는, 그러나 알베릭의 기대와는 달리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갑판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 한 줄기가 느닷없이 어둠을 찢고 뛰쳐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알베릭의 궤적과 부딪쳤다.


“페이긴······.”


유성과 강철이 충돌하는 굉음이 4구역을 메웠다. 기사단 시술이 부여한 고막이 스스로 닫혔음에도 걸러지지 않은 소리가 알베릭의 뇌를 뒤흔들었다. 그래도 그는 침착했다. 대장간 일부가 다시 총구로 스며들어 새로운 탄환을 생성해냈다.


알베릭은 순간 번뜩인 불빛 속에서 어렴풋이 본 것을 의심했다. 그가 본 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빠르게 페이긴을 끝장내야 했다. 다시 조준을 마친 알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은빛 번개는 이번에도 배를 부수지 못했다. 그림자가 튕겨낸 탄환이 애꿎은 지면을 강타해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나무 몇 그루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똑똑히 보였다. 불빛 속에서 보인 것은 대장간의 궤적에 버금가는 은빛 거구였다.


“철혈······.”


대원정에서 대다수가 가동 불능 판정을 받은 기사단의 갑옷이었다. 그것이 배의 갑판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림자에서 나와 달빛 아래에서 요격태세를 취한 철혈의 눈동자가 빛났다. 두꺼운 장갑판은 대원정 시기 숱한 전투 속에서 금이 갔고, 본래 색도 흙바람에 깎여 풍화되었다. 그러나 달빛을 머금은 강철 거인은 여전히 품위와 경외를 담고 당당했다.


알베릭은 혀를 찼다. 온전한 철혈이 황궁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예상외였다. 그러나 속을 알 수 없는 페이긴이라면 능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오랫동안 꾸린 계획이라면 철혈 한 기를 감춰두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사격은 가하지 못했다. 탄환으로 소모된 대장간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철혈이라면 이 정도 거리는 단숨에 좁힐 수 있다. 알베릭은 자신이 공세의 주도권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철혈의 모습을 확인한 지금 그 생각은 자만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대장간을 아껴야 했다.


페이긴이 탑승한 철혈이 알베릭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알베릭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서로 화력을 알고 있다. 알베릭은 철혈을 입은 페이긴과 정면승부를 벌일 생각은 없었고, 페이긴은 자리를 잡은 알베릭의 화망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다. 두 기사는 그저 서로를 노려본 채 적의를 불사를 뿐이었다.


‘쉽지 않은 임무가 되겠군.’


알베릭보다 앞서 4구역에 배치된 두 기사가 페이긴에게 살해당한 이유를 깨달았다. 병사와 기사의 차이가 까마득하듯, 기사와 철혈을 입은 기사의 차이 역시 까마득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매복과 기습의 형태라면, 황제가 벼려낸 강화 갑옷을 입은 기사를 당해낼 것은 없다.


알베릭이 4구역에 돌입한 순간 페이긴이 기습을 시도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맨몸으로 기습을 벌이고, 성공하면 그만이고 실패하더라도 어차피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숲으로 올 것이다. 무방비하게 숲으로 들어온 기사를 철혈로 상대한다는 전략이다. 만약 알베릭의 전술적 특성이 아니었다면 똑같은 수에 당했을지도 모른다. 페이긴은 알베릭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철혈을 입고 관문 앞에서 알베릭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페이긴의 철혈은 겉보기에도 손상이 심해 보였으니, 이대로 저격을 통해 갉아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페이긴은 잔탄과 공격의 간격을 고심하며 페이긴을 노려보았다. 페이긴에게 패착이 있다면, 철혈을 아끼기 위해 맨몸으로 행한 기습에 있을 것이다. 알베릭은 페이긴이 그 사실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생각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나리아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꿈인 줄 알았던 굉음이 눈을 뜨자 다시 들려왔다. 졸음을 물러나게 한 소리에 아직도 얼떨떨했다. 창밖에서도 나리아와 마찬가지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릭의 저격이다.”


창가에 둔 의자에 앉은 채 바깥을 보고 있던 헌진이 중얼거렸다. 나리아도 창가에 매달려 바깥을 살폈다. 은빛 궤적이 성과 숲이 있는 방향을 이었다. 전쟁의 냄새를 품었지만 6구역과 5구역의 전쟁에서조차 느껴보지 못한 굉음과 폭발이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철혈의 소리로군.”

“철혈이라고요?”


나리아는 눈을 비비며 창밖으로 한껏 몸을 내밀었다. 기사의 눈을 가지지 못한 나리아는 헌진과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여관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헌진과 루미스의 철혈이 저런 광경을 벌이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숲 한쪽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금방 잦아들었다. 나리아는 숲에서 마을을 짓고 사는 페이의 추종자들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나리아는 그들이 저 격렬한 공방에서 무사할지 문득 걱정이 들었다.


“생각보다 페이긴은 위험하구나.”

“위험하다구요? 왜?”

“저건 단순한 강화복이 아니다. 도시 바깥에 도사리는 위협에 맞서 제작된 동력 갑옷이자 이동 요새다. 페이긴이 철혈을 지니고 있다면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지.”

“기사는 기사만이 상대할 수 있듯이, 철혈도 철혈만이 상대할 수 있다는 건가요?”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렇다.”


헌진은 자신의 턱을 쓸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리아는 헌진의 고민을 들여보다가 다시 창밖을 보았다. 거리 곳곳에서 불이 켜지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반복되는 사격과 받아치는 소리가 땅과 공기를 흔들었다. 저런 광경을 본 이상 4구역은 오늘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생각을 굳힌 헌진이 중얼거렸다.


“페이긴을 쳐야겠다.”

“네? 그 말은, 페이긴을 죽이겠다고요?”

“철혈을 입은 기사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 죽일 수밖에 없겠지.”


나리아는 당황했다. 페이를 옹호하려는 말이 나오려다가 들어갔다. 나리아는 겉모습으로밖에 철혈을 모른다. 헌진이 저렇게까지 반응한다면 위험한 물건일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나리아가 알고 있는 페이는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일 뿐이다. 그런 아이를 죽인다는 계획은 쉽사리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료였잖아요.”


어설픈 반박이었다. 헌진은 이미 옛 동료였던 미르돈을 살해했다. 페이가 미르돈처럼 일그러졌다면, 도시를 위해서라도 살해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저울질 상대로 올라올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게 설령 옛 동료라 하더라도 말이다.”


헌진의 짧은 말에 나리아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머리로는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은 멋대로 또 다른 말을 꺼내려 했다.


“제가 페이랑 얘기해볼게요.”


다시 밤하늘을 가르는 궤적이 지나갔다. 긴 간격을 두고 무시로 벌어지는 사격이 이어졌다. 나리아는 순간 번뜩인 빛에서 하얗게 보이는 헌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페이긴과 얘기할 여지가 있다고 보는 거냐.”

“적어도 말은 통하는 상대잖아요? 미르돈과는 달라요. 페이는 괴물도 아니니까요.”

“페이긴이 너에게 보이는 호감은 이해한다. 그러나 알베릭이 온 이상 두 사이의 전투는 시작된 것과 다름없지. 그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방법이다.”


헌진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나리아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알베릭이 참전했으니 4구역의 군대도 움직이겠지. 곧 대규모 작전이 펼쳐질 것이다. 알베릭도 페이긴도 영원히 저 짓거리를 반복할 수는 없다. 두 기사의 거리에도 변화가 있겠지. 그 사이에 알베릭과 협상을 하고 페이긴을 칠 방안을 모색하겠다. 어떻게 생각하냐.”

“정말 그럴 수밖에 없다면······.”


헌진과 나리아의 편제를 굳이 구분하자면, 작전권은 오로지 헌진에게 달려있다. 나리아의 역할은 기껏해야 정탐이나 첩보에 불과했다. 행동에 옮기는 것은 헌진이었으므로 토를 달 수는 없었다. 헌진은 항상 확신을 두고 가능성이 큰 방법만을 골라왔다.


“알베릭의 무기라면 철혈을 상대하는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이제 그 방법을 생각해야겠구나.”


알베릭과 연계해야 한다는 난관이 남아있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가 없다. 헌진은 지금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헌진은 창밖에서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알베릭과 페이긴의 간격을 쟀다. 페이긴의 사격과 페이긴의 반응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사격이 이어질수록 그 차이는 아주 미세하게나마 벌어지고 있다. 페이긴의 반응이 둔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알베릭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눈치챘다면 알베릭은 당장이라도 몰아쳐야 했다. 그러므로 헌진만이 눈치채고 있다고 봐야 한다.


페이긴이든 페이긴의 철혈이든 알베릭은 효과적으로 깎아내고 있다. 헌진은 그것을 바탕으로 페이긴을 칠 작전을 구상하기로 했다.


작가의말

5월입니다. 행복한 어린이의 날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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