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4,940
추천수 :
304
글자수 :
612,952

작성
21.04.30 23:55
조회
26
추천
2
글자
12쪽

57. 두 기사 (2)

DUMMY

과일을 줍던 아이가 자연스럽게 알베릭에게 다가갔다. 알베릭이 막 주운 과일에 내미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고맙구나.”


알베릭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이는 알베릭의 목덜미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그 모습을 빠르게 포착한 사람은 없었다. 머릿속으로 새로운 기사와 페이를 끊임없이 의식하던 나리아가 유일했을 것이다. 나리아는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질렀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과일을 줍고 집정관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알베릭의 목에 단검이 한치쯤 파고들고서야 이변이 감지되었다.


알베릭이 주먹을 휘둘렀다. 아이는 미련 없이 단검을 놓고 뒤로 뛰어올랐다.


“큭······.”

“알베릭 경?”


알베릭의 몸짓에 헬무트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그가 보기에는 한 아이가 잠깐 다가왔다가 펄쩍 뛰며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베릭이 손으로 감싼 목에서 핏물이 울컥거리자 사태를 깨달았다.


“아, 알베릭 경을 보호하라!”

“아무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성대를 다쳤는지 알베릭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일그러진 기사의 일갈에 사람들은 붙박인 듯 멈추었다.


“알베릭! 하필이면 자네일 줄이야!”


물러선 페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리아가 알고 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평소와는 달리 곱상한 복장을 갖춘 소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나리아는 물론이고 알베릭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알베릭이 조금이라도 늦게 반응했다면 단검은 목을 꿰뚫었을 것이다.


“환영 인사가 지나치시군요, 페이긴.”


알베릭이 목을 감싼 채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페이는 빈정거리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오히려 모자라지 않은가? 지나쳤으면 그대는 이곳에서 침묵했을 걸세.”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압니까.”


알베릭이 짊어지고 있던 긴 상자를 땅에 세웠다. 페이는 알베릭의 빈틈을 노리듯 좌우로 느긋하게 움직이면서도 그 상자를 경계했다.


“알다마다. 내 공격이 명확하지 않던가? 아니면, 그것까지 모를 만큼 그대도 늙었는가?”


페이가 농담을 지껄이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자 알베릭은 피 섞인 침을 거칠게 뱉었다.


“페이긴, 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의미 없는 물음일세.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나. 그대들이 내게 건 모든 혐의를 인정하는 바일세.”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 할 일을 하지요.”


알베릭이 상자의 머리 부분에 손을 얹자 그것은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리아는 그제야 그 상자가 마치 시체를 담는 관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림 제국의 수사관으로서, 준호와 두르간을 살해하고, 반란을 모의한 죄를 물어.”

“그대는 항상 예의가 바르군.”


페이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다리를 감싼 경갑이 열기를 내뿜으며 궤적을 그렸다. 알베릭은 쇄도하는 페이를 노려보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철혈 갑종 경급 일등기사 페이긴, 당신을 처형하겠습니다.”


페이의 발이 정수리에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알베릭의 관이 반응했다.


탕!


공기를 찢는 굉음이었다. 나리아는 그 소리를 알았다. 숲에서 들었던 화약 무기의 격발음이었다.


알베릭이 고개를 젖혀 보이지 않은 궤적을 피해냈다. 그리고 페이의 다리가 알베릭의 정수리에 꽂혔다.


알베릭은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관에서 분리된 금속 일부가 그의 팔에 장착된 상태였다. 나리아는 알베릭과 페이의 싸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지만, 관의 변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격발음이 울려 퍼졌다.


“흠.”


짧은 한숨과도 같은 소리가 페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페이가 걷어찬 반동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움직이는 대장간이로군.”


액체처럼 변한 금속이 알베릭의 몸을 자유자재로 기어 다녔다. 페이의 적의에 반응해 갑옷으로 변하기도 했고 날붙이로 변하기도 했다. 본체는 바닥에 고정된 채 흐물거리며 페이를 겨누었다. 나리아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무기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금속액체를 바탕으로 한 변형체. 본체의 반응으로 볼 때, 포탑 역할도 수행하는 갑옷이자 무기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괴한 물건에 시선을 빼앗겼다. 전투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도망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움직이지 말라는 알베릭의 명령에 충실했다. 알베릭이 살기에 가까운 단호함으로 윽박지른 덕분이기도 했다.


“이래서 그대는 첫수에 죽였어야 했는데.”


페이가 옆구리를 후벼 탄환을 빼냈다. 탄환은 녹아내리는 듯 떨어지더니 바닥을 흘러 본체에 흡수되었다. 페이는 낭패한 듯 살짝 인상을 썼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왜지? 내게 선고까지 내려놓고서는, 나를 죽이지 않을 생각인가?”


페이는 능글맞게 웃었다. 알베릭이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다. 이 주변에는 지나치게 사람이 많았다. 단숨에 고화력을 뿜어내는 것이 특기인 움직이는 대장간을 가동하면 애꿎은 피해자가 발생한다. 알베릭은 이곳에서 페이를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을 등진 이상 알베릭이 마음 놓고 화력을 개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페이 역시 기습 시점을 지금으로 정했다. 그러나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한 순간 페이의 기습도 실패한 셈이었다.


페이의 발이 움찔했다. 금속이 변형해 일부는 갑옷으로 변해 알베릭을 감쌌고 일부는 칼로 변해 손에 들렸다. 알베릭이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는 모습으로 볼 때 금속은 의지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페이는 알베릭을 공격하는 궤적 몇 가지를 그려보았다. 페이의 반응을 감지한 금속은 방향을 바꾸며 페이를 대비했다. 본체에서 돋아난 총구는 페이를 놓치지 않았다.


“나 참.”


페이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역시 안 되겠어. 물러나도록 하지. 다음에는, 그래. 집정관이라도 노리는 수밖에 없겠군.”


페이의 지적에 알베릭의 뒤에 섰던 헬무트가 움찔했다. 알베릭의 몸을 감쌌던 금속액체가 요동쳤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페이를 죽여야 하는지 갈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페이는 알베릭이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하나 충고하도록 하지.”


페이가 몸을 반쯤 돌리고 알베릭에게 말했다. 등을 보이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에서 멀뚱거리던 병사들 몇이 달려들었다. 기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턱이나 배를 걷어차여 그 자리에서 엎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늘 하나일세. 나를 내버려 두게.”

“제가 그럴 수 없다는 건 페이긴도 아실 겁니다.”

“그래, 항상 그게 문제야.”


페이는 언뜻 씁쓸하게 미소 짓고는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물러났다. 페이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갈라지며 길을 비켜섰다. 알베릭은 추격하지 않았다. 어차피 페이의 발은 기사단 누구도 쫓아가지 못했다.


페이가 모습을 감추자 멈춰있던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그제야 주저앉거나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병사들이 집정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괜찮으세요?”


알베릭이 페이에게 걷어차인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알베릭의 손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가 차마 참지 못하고 토를 쏟아냈다.


페이가 그러고자 했다면 위액이 아니라 내장을 쏟아냈을 것이다. 알베릭은 병사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집정관에게 다가갔다.


“헬무트 집정관,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소. 경께서는?”

“제가 조금 더 빨리 눈치채야 했는데, 면목 없군요.”

“하지만 경은 목을······.”


헬무트가 반역자의 단검이 파고들었던 목을 가리켰다. 알베릭은 대수롭지 않게 목을 쓸었다.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에요.”


피는 이미 멎었고 상처는 재생을 시작했다. 헬무트는 알베릭의 목덜미를 들여다보고 질린 얼굴이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 알베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리를 수습한 알베릭은 다시 관을 짊어졌다. 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한 고체상태였다. 부상자를 옮기던 병사들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베릭은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알베릭은 황실의 부름을 받고 5구역에서 1구역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짧게 4구역을 지나쳤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시선 저 멀리 숲이 있을 곳에서 느닷없이 솟은 돛대가 보였다.


“도대체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그때 문득 시선을 느끼고 알베릭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 거기에 서서 자신을 구경하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알베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리아는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알베릭 경.”


병사들을 추스른 헬무트가 다가왔다. 오랜 기억을 헤집던 알베릭은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성으로 가서 긴히 얘기를 나누어야겠소.”

“그러시죠. 상의할 일이 제법 많겠군요.”


헬무트가 알베릭을 성으로 안내했다. 알베릭은 집정관의 시답잖은 말에 맞장구를 치며 최대한 주변을 경계했다. 다음에 집정관을 노리겠다던 페이의 말을 조심해야 했다.


주변을 감싼 알베릭의 감지범위 내에서 소녀는 쉬지 않고 달려갔다.




“이상한 기사였어요.”


한참을 달린 나리아는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녹슬지 않았더구나.]


행여나 알베릭에게 들릴까 싶어 말을 아끼고 있던 헌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감상은?]

“어······저렇게 정상적인 기사도 있네요.”

[별난 감상이로구나.]


알베릭의 별난 무기도 무기였지만, 성격 역시 만만찮게 별났다. 헌진을 포함해 지금까지 본 기사 중에서도 지나치게 예의 바른 기사였다.


“무서운 무기를 다루네요.”

[그래, 우리는 움직이는 대장간이라고 부른다. 황제가 그렇게 이름 붙였다. 전방위요격, 화력, 그 어느 것도 해낼 수 있고, 부족함이 없다. 그걸 그렇게 다룰 수 있는 건 오직 알베릭뿐이었지.]

“대체 어떻게 다루는 거죠? 보고서도 믿지 못하겠어요. 마치 몸의 일부를 다루는 것처럼 금속이 자유자재로······.”


나리아는 설명하려다가 어휘력의 한계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보았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복귀하자. 여관에서 만나지.]

“이제부터 어떡하죠?”

[생각해보자꾸나. 당장은 페이를 도와 알베릭을 쳐서 관문을 열게 하거나, 관문을 여는 대가로 알베릭을 도와 페이를 치는 수가 있겠군.]


그 어느 쪽도 두 사람에게는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뜩잖았다. 나리아는 둘 중 한쪽이라도 적대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지금까지 나쁜 사람을 상대한다고 생각했어요. 무르히나 미르돈이 그랬던 것처럼요. 페이와 알베릭 중 누가 나쁜 사람이죠?”

[대답할 수 없는 말이구나.]


나리아는 호흡이 진정되자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떼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구역을 오르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각오했어야 하는 일이다. 윗구역으로 오르다 보면 무고한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일 따름이다.


“알아요. 저도 알아요.”


나리아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알베릭과 페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주기 21.02.14 129 0 -
116 115. 언령 (3) +2 21.08.31 48 3 12쪽
115 114. 언령 (2) 21.08.03 31 2 11쪽
114 113. 언령 (1) 21.08.02 29 1 11쪽
113 112.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7) 21.07.27 33 1 11쪽
112 111.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6) 21.07.21 21 1 11쪽
111 110.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5) 21.07.20 26 1 12쪽
110 109.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4) 21.07.16 49 1 13쪽
109 108.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3) 21.07.15 24 1 12쪽
108 107.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2) 21.07.14 31 2 12쪽
107 106.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1) 21.07.13 46 1 11쪽
106 105. 마고 (3) 21.07.10 24 2 12쪽
105 104. 마고 (2) 21.07.08 32 2 10쪽
104 103. 마고 (1) 21.07.07 34 2 11쪽
103 102. 폐기물 (7) 21.07.06 29 2 12쪽
102 101. 폐기물 (6) 21.07.02 19 2 11쪽
101 100. 폐기물 (5) 21.07.01 25 2 11쪽
100 99. 폐기물 (4) 21.06.30 25 2 10쪽
99 98. 폐기물 (3) 21.06.29 25 2 12쪽
98 97. 폐기물 (2) 21.06.29 24 2 11쪽
97 96. 폐기물 (1) 21.06.25 25 2 10쪽
96 95. 2구역 (3) 21.06.23 24 2 11쪽
95 94. 2구역 (2) 21.06.22 27 2 11쪽
94 93. 2구역 (1) 21.06.22 32 2 12쪽
93 92. 탑 (8) 21.06.18 24 2 10쪽
92 91. 탑 (7) 21.06.17 28 2 12쪽
91 90. 탑 (6) 21.06.16 28 2 10쪽
90 89. 탑 (5) 21.06.15 24 2 11쪽
89 88. 탑 (4) 21.06.14 49 2 11쪽
88 87. 탑 (3) 21.06.11 29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