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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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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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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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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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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6. 두 기사 (1)

DUMMY

4구역을 담당하는 기사는 오랫동안 부재했다. 그 기간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최소 40년에 이르렀다. 그 사이 황실에서 두 기사가 파견되었지만 그들의 부임도 길지 않았다.


“그 기사들은 어떻게 됐는데요?”

“암살당했다.”


나리아는 막 입에 넣으려던 떡을 놓치고 말았다.


“암살당했다고요? 기사가?”

“그래, 페이긴의 소행이겠지.”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묻지 못했다. 외모가 고정되지 않은, 세월이 몸을 되돌리는 육체, 모든 기사를 파악하고 있을 머리. 나리아는 어쩐지 페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는······나쁜 사람인가요?”


나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도시에서 좋고 나쁨으로 재단하기에는 많은 것이 막막했다. 헌진도 그 말에는 뚜렷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모르겠다. 그걸 논하려면 이 도시에 대해서부터 논해야 할 거다.”


페이와 대화를 나누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목격하고 만 것을 무시할 재간이 나리아에게는 없었다.


헌진은 병영을 뒤지며 얻어낸 정보를 나리아에게 말해주었다. 제대로 관리 되지도 않은 문서는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과거에 관심을 두지 않는 도시로서는 기록을 폐기한다는 작업조차 소홀히 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헌진은 가까운 과거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4구역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기사 없는 군대가 기사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겠지. 그런 곳에서 페이긴은 활동했고, 그 결과가 지금 저 숲에 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페이는 저 배를 바다에 띄우려는 걸까요?”

“바다라.”


헌진이 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 시야의 끝에는 항상 장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누구도 그 너머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마지막 대원정 시절, 우리는 바다를 보았다. 그건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물이 아니야. 모든 것을 녹이는 산성용액일 뿐이다.”


헌진은 잠시 팔짱을 끼고 상념에 잠겼다.


“페이긴은 유달리 바다에 시선을 빼앗기고는 했지. 오히려 모든 것을 거절하는 물에 유혹된 것일지도 모른다.”


반역을 체화하려는 페이의 말은 스스로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다. 페이는 진심이다. 반란을 일으킨 것도, 황제에게 저항하는 것도, 숲에서 독립세력을 이끄는 것도 그 과정일 뿐이다.


“어떠냐, 나리아. 페이긴이 저 배를 바다에 띄울 방법이 있겠냐.”

“어, 모르겠어요. 배를 옮기는 건, 그만한 인력과 페이가 있다면 가능이야 하겠죠. 하지만 장벽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장벽을······.”


나리아는 어떤 장면을 상상하고는 짧게 오한을 느꼈다.


“장벽을 무너뜨린다?”


헌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뿐이다.”


페이는 화약을 재배하고 있다. 얼마나 비축했고 얼마나 생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페이가 진심으로 장벽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애초에 그런 계산도 하지 않고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리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장벽은 도시 바깥의 유독한 공기와 검은 비를 걸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거름망에 구멍이 뚫린다면, 최소한 4구역에서 일반인이 살 방법은 없다.


“4구역을 몰살시킨다. 그게 페이의 목적인가요.”

“목적은 탈출이겠지. 그러나 무엇이 목적이든 간에 그 결과는 그것밖에 남지 않는다.”


그만한 배를 통과시켜야 할 테니 대폭발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장벽에 구멍이 뚫리면 그 여파는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다른 구역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나리아는 끔찍한 상상에 손톱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려야 해요. 도시를 파괴하게 둘 수는 없어요.”

“어떻게 말이냐.”

“페이를······.”


페이를 죽여야 한다? 나리아는 적으로 규정되지도 않은 페이에게 그런 생각을 품고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까지는 적이 명확했다. 7구역의 제국군, 6구역의 허수, 5구역의 미르돈. 그러나 페이는 적의 조건을 갖추었는가. 나리아는 확신하지 못했다.


“페이는 제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친구랬어요.”

“그래, 그랬지.”

“헌진도 알고 있었어요?”


나리아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헌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리아도 제 머리색깔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 헌진도 모를 리 없다.


헌진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남과 다름없는 조상 시대의 일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리아는 다만 헌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헌진은 신중하게 답했다.


“지금까지 벌인 내 모든 행동이 틀렸다면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서라도 황제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고, 옳았다면 그것을 확인받기 위해서라도 황제에게 가야 한다는 것뿐이다.”


헌진답지 않게 장황한 말이었다. 나리아는 손바닥에 고개를 묻은 채 잠시 웃었다. 헌진 나름대로 애를 쓴 답변이었다. 지금은 그 태도만으로 족했다. 도시제국을 향한 헌진의 각오는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3구역에서 기사가 올 것이다.”


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헌진은 병영에서 엿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도시제국 입장에서 저런 불경한 물건을 두고 볼 리 없겠지. 황제가 침묵하고 있다지만 기사단은 독자적으로라도 움직이게 되어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기사가 내일 도착한다.”

“그 기사가 해결할 수 있을까요?”

“페이를 사냥할 수 있는 기사다.”


사냥. 불길한 단어였지만 그만큼 어울리기에 헌진은 그런 말을 썼을 것이다. 나리아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는 물었다.


“이름은요?”

“알베릭.”


헌진은 짧게 덧붙였다.


“기사단의 저격수다.”




제국군 한 무리가 3구역과 연결된 관문 앞에 늘어섰다. 그들의 복색과 깃발은 한층 더 밝았고, 그것을 엿보던 나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더욱 화려해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공경의 표시인 모양이었다.


“나도 가고 싶지만 알베릭의 감지를 피해낼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하겠구나.”


헌진은 그렇게 말하고 정탐을 나리아에게 맡겼다. 신중한 판단이었다. 나리아는 모자를 눌러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 말고도 구경나온 사람들은 많았고 통제되지 않았다. 사이에 숨어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페이는 새로이 올 기사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곳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페이를 말려야 한다. 나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수단을 알지 못한다 말로 설득하기에는 확고하고, 제압하기에는 강력하다. 멈추게 할 수 있다면, 오직 죽이는 수밖에 없다. 나리아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이다.


헌진은 끝까지 싸운다면 페이를 이길 수 있다고 확언했다. 빈말일 리는 없으니 어쨌든 살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무르히 때처럼 제압만 할 수 있다면 고려해볼 법하다. 그러나 두 기사를 암살한 페이를 제국군이 내버려 둘 리는 없다. 게다가 페이를 따르는 사상범들은 또 어찌해야 할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복잡해져만 갔다.


[페이긴이 보이냐.]

“아뇨, 안 보여요. 뭐, 저한테 보일 정도면 기사도 아니지 않겠어요?”

[그도 그렇군. 모자를 벗지 말고 길에서 벗어나지 마라.]


이제는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이다. 나리아는 피식 웃으며 귓가를 두들겼다.


나리아는 길을 헤매는 척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장소에 천리안을 설치했다. 사람들에 가려져 시야는 확보되지 않았지만, 귀가 밝은 헌진이라면 관문 근처의 대화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들으시오, 신민 여러분!”


줄무늬 옷을 일곱 가지 색깔로 물들인 병사 한 명이 군중 앞을 오갔다.


“영광된 제국 기사께서 오늘 이곳으로 행차하오. 우리를 지키고 보듬어줄 황제 폐하의 은총이니, 열과 성을 다해 그분을 맞이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이오!”


사람들은 작게 웅성거렸다. 그중 일부는 옛적에 왔던 기사들은 어찌 되었냐며 의문을 표했다. 기사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민간인들에게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평범한 삶을 산다면 기사에게 관심을 가질 리 없을 테니 숨기기고 쉬웠을 것이다.


“오십니다!”


관문에 귀를 대고 살피던 병사 한 명이 외쳤다. 길 한가운데에서 몇몇 부관을 대동한 집정관으로 보이는 노인이 허리를 곧게 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적이 찾아오고 얼마간 지나자, 관문이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리아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그곳에 집중했다.


관문을 열고 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혼자였다. 젊은 청년이는데, 긴 상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주머니를 손에 꽂고 여유로워 보였다.


청년은 제 눈앞에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보고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기, 뭡니까?”

“경례!”


집정관이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이 일제히 경례를 붙였다. 제법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일제히 기합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리아의 귀까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병사가 손짓을 보내자 군중들도 환성을 내지르거나 꽃잎을 뿌렸다.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럭저럭 환영이라는 모양새는 갖추었다.


청년은 어깨를 움츠리며 손가락으로 귀를 쑤셨다. 기사라기에는 다소 얼빠진 사람이었다. 나리아는 기사를 관찰하며 귓가를 두들겼다. 헌진도 보고 있는지 신호를 보내왔다.


“알베릭 경. 집정관인 헬무트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황제 폐하께 영광을.”


노인이 알베릭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알베릭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가 그제야 반색하며 헬무트의 손을 맞잡았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알베릭입니다.”

“우리 병사들과 신민들이 경을 맞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몰려들었다오. 놀라게 했다면 내 사과드리리다.”

“아뇨, 아닙니다. 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알베릭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이제까지 보아온 기사와는 또 다른 성격이었다. 그를 보던 군중들이 벌써 호감을 느꼈는지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저렇듯 비교적 예의 바른 기사는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성으로 안내하겠소. 그곳에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오.”


헬무트가 알베릭을 안내했다. 알베릭은 여전히 산책이라도 나온 양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헬무트를 뒤따랐다. 앞을 지나칠 때마다 병사들이 속속 알베릭의 뒤를 따랐다. 군대의 절도 있는 동작은 장관이었다.


완벽한 환영식이 진행되고 있다. 헬무트는 나름대로 흡족한 얼굴이었고, 주변을 둘러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알베릭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나리아는 기사를 구경하려는 다른 아이들과 섞여 자리를 이동하며 알베릭을 관찰했다.


그 완벽한 환영식에 금이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길 한쪽에 서 있던 아낙네가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숱한 과일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고, 유감스럽게도 가장 앞서있던 집정관과 기사의 앞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헬무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낙네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과일을 주워 담았다. 돌발적인 일에 병사들도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집정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군중들 몇도 알아서 뛰쳐 나와 일을 거들었다. 어린아이 몇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굳은 헬무트 곁에서 알베릭이 걸어왔다. 기사를 마주하자 민간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그가 허리를 굽혀 과일 줍는 일을 거들자, 집정관도 화들짝 놀랐다.


“거참, 분위기 한 번 살벌하네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안 그래요?”


눈을 찡긋하며 알베릭이 미소짓자 사람들은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무안해진 쪽은 집정관이었다.


“겨, 경께서 그러실 필요까지는······.”


헬무트가 헛기침했고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화기애애한 표정이었다. 과일을 줍던 꼬마 아이 한 명이 행동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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