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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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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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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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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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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50. 4구역 (2)

DUMMY

골목길 몇 가닥을 지나가는 동안 길거리의 소음은 사그라졌다. 나리아는 미행하듯 아이들의 뒤를 밟았다. 아이들은 집마다 문을 두들기며 또 다른 아이들을 불러냈다. 나리아는 침을 흘릴 듯 집중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는 놀이터에 몰려갔다. 몇 가지 놀이기구로 이루어진 제법 널찍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무리를 나눠 놀기 시작했다. 씨름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먼저 와있던 아이들은 저마다 놀이기구를 잡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리아는 스스로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놀이터 한구석에 끼어들었다. 부드러운 모래는 생소한 감촉이었다. 손끝으로 모래를 그으면서 나리아는 멍하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나리아, 어디냐.]


헌진의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들렸다. 나리아는 귓가에 손을 짚었다.


“어, 놀이터에요. 네, 놀이터······.”

[놀이터? 알았다. 찾아보겠다.]


나리아는 그 말을 듣고 현실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그 감정은 두 가지가 복잡하게 뒤섞였다. 부드러운 부분은 부러움이었고, 날카로운 부분은 질투였다.


짧게 보았을 뿐이었지만 이곳에는 평화가 넘쳤다. 제국군이 길거리에서 사람을 패거나 끌고 가지도 않았고, 창칼을 든 병사들이 서로 겨누지도 않았으며, 지하에 숨어서 멍청하게 도서관만 들여다보는 소녀도 없었다. 여기서 아이는 아이다웠고, 세상은 세상다웠다. 그리고 나리아는 이곳에 섞여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쟤 누구야?”


아이들 몇이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의미 없는 손장난이 애꿎은 모래더미를 파냈다.


“이상한 냄새 나.”


한 아이가 나리아를 힐끔거리며 과장되게 코를 쥐었다. 나리아는 몸을 움츠렸다. 몸이 머금은 냄새를 나리아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지만, 그것이 이 아이들과의 차이점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나리아는 멀찍이 물러선 아이들의 발끝을 보고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해왔고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것을 부러워해봤자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고 막상 떠나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이 공간은 달콤한 꿈과 같은 공간이었다. 나리아는 조금은 평범해질 수 있는 이곳에서 헌진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는 자기합리화를 했다.


“이봐들. 슬슬 나도 끼워주지 않겠나?”


그때 한 아이가 미끄럼틀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답지 않게 목청이 좋았고 늙은 말투를 썼다. 곱상하게 생겨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나리아는 그 아이를 범상치 않은 애늙은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옷차림이었다. 상의도 하의도 지나치게 컸다. 소매가 한 뼘이나 길어 나풀거렸고 바지도 종아리만큼 길어 바닥을 질질 끌었다. 어쩌다 부모의 옷을 입었다고 하기에는 몸놀림이 자유로웠다. 만약 그것이 취향이라고 하면 상당히 괴상한 일이었다.


“비석치기, 씨름, 땅따먹기 뭐든 좋네. 거기 꼬맹이, 저번에 나한테 졌잖나. 복수하고 싶지는 않은가?”


애늙은이가 지목한 소년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질렀다. 덩치가 컸고 주변에 아이들을 거느린 것으로 보아 제법 골목대장처럼 보이는 소년이었다.


“시끄러, 페이! 미끄럼틀에서 비키기나 해!”

“미안하지만 이 미끄럼틀은 내가 아침부터 첫 번째로 차지한 특등석이라네. 아니면 겸허하게 내 도전을 받아들일 텐가? 어떤 놀이든 날 이기면 미끄럼틀을 양도하지.”

“싫어! 너랑 비석치기 하면 죄다 부서지고 땅따먹기하면 우리 집 앞마당까지 차지하잖아!”

“저런, 난 정당한 놀이계약에 따라 모두 끝나고 땅을 반환하지 않았나.”

“시끄러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애늙은이 페이는 소년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미끄럼틀을 내려오고는 다시 올라갔다. 미끄럼틀에서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페이의 모습은 짐짓 왕처럼 보였다.


“별 거지 같은 애도 끼어들고, 아무튼 너랑은 안 놀아!”


소년이 씩씩대더니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우르르 몰려갔다. 페이는 개의치 않고 소매와 바짓자락을 펄럭거리며 끊임없이 미끄럼틀을 탔다. 모호한 표정이라 즐거워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옷소매를 휘젓는 모습을 보니 제법 만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가락만 빨며 미끄럼틀이 비기를 기다리던 아이들 몇이 시무룩하게 놀이터를 나갔다. 이제 주변에는 얌전히 뛰어노는 몇 무리만 남았다. 나리아는 혼자서 잘도 노는 페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오늘도 나와 맞붙어줄 용맹한 꼬맹이는 없는 모양이군.”


페이가 남들이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페이를 어려워하지 않는 아이들이 깔깔댔다. 나리아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네 하나를 조심스럽게 차지했다.


[놀이터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구나.]

“괜찮아요. 혼자서 잘 놀고 있어요.”


천천히 땅을 차면서 나리아는 흔들렸다. 난생처음 타는 그네였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의외로 신이 났지만, 나리아는 웃을 수 없었다. 페이가 미끄럼틀 위에서 나리아를 빤히 보고 있었다.


‘설마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나리아는 페이를 힐끔 보며 그네를 흔들었다. 슬며시 미소를 짓고 이쪽을 바라보는 페이가 거슬렸다.


아이들의 수는 부쩍 줄어있었다. 속속 찾아오는 어른들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둘 데리고 갔다. 해가 천장을 지나 서서히 기울어졌다. 오늘은 검은 비가 내릴 모양인지 하늘이 뿌옇다. 건물의 그림자가 놀이터에 드리웠다. 나리아는 그늘진 페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봐?”


참지 못한 나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페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한 냄새가 나는군그래.”

“너도 나한테서 냄새가 난다는 거야?”

“나다마다. 그렇게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어디 보자, 먼지 냄새, 땀 냄새, 음식 냄새, 쓰레기 냄새.”

“뭐라고?”


사람한테 쓰레기 냄새라니, 나리아는 4구역의 무례함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페이는 아랑곳하지 음미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 냄새.”


나리아가 발을 멈췄다. 천천히 흔들리던 그네가 정지했다. 문득 주변이 너무 고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놀이터는 텅 비어있었다. 멀리서 점심 식사에 대해 떠드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지금 이곳에는 페이와 단 둘뿐이었다. 나리아는 왠지 모르게 그 사실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페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미끄럼틀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나리아는 섬뜩함을 느꼈다.


“기사의 냄새.”


도망가야 한다. 나리아는 그네에서 뛰어내려 내달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과정 없이 순식간에 결론을 내렸다. 기사를 눈치챌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사뿐이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건가.”


페이가 나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모래조차 흩날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나리아는 그제야 페이와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엇비슷한 키였지만 나리아는 페이가 지나칠 만큼 크게 보였다.


“볼 일이 생각났거든.”


나리아는 뒷걸음질을 치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페이는 넘치는 소매를 휘저으면서 다가왔다.


“한낱 꼬맹이가 이렇게 진한 냄새를 풍길 리는 없지. 몇 번의 죽음이 그대를 스쳐 갔지? 말해보게, 어째서 그대에게서 기사의 냄새가 나는 건가?”

“너도 꼬맹이잖아. 너, 기사야?”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지 말게나.”


몇 걸음이나 되는 거리였는데 페이가 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나리아는 코앞에 다가온 페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말하게. 이곳은 놀이터. 놀이가 목적인 곳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다네.”

‘헌진, 지금 여기로 오면 안 돼요!’


나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페이가 기사라면 헌진과 정면승부를 벌이게 될 것이다. 적에 대한 정보도,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지금의 헌진이 기사와 겨룰 수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의 냄새인가?”


나리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나아가는 수뿐이다.


“······맞춰봐.”

“응?”


페이가 흥미롭다는 듯 나리아를 들여다보았다. 나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맞춰보라고!”

“호오. 그대는 나와 수수께끼 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놀이터라며! 노는 곳이라며! 맞추지 못하면 더 이상 묻지 말고 날 보내줘.”

“내가 맞춘다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아무렇게나 막 내뱉은 말이었다. 나리아는 페이에게서 대답이 없자 슬며시 눈을 떴다. 페이가 얼굴을 거두고 소매를 휘젓고 있었다.


“실로 꼬맹이다운 제안이로군. 좋네, 좋아. 이래서 꼬맹이가 좋은 게야.”

‘먹혔나?’


나리아는 슬며시 걸음을 물렸다. 페이는 팔짱을 끼고 나리아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리아의 제안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단, 세 번 안에 맞춰야 해.”

“세 번은 너무 적은데?”

“그럼 기사단 전원 이름을 대면 언젠가 맞출 거 아니야? 그건 내가 불리하잖아.”

“음, 타당한 말이네. 삼세판은 어디에나 통용되는 규칙이지.”


페이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나리아의 냄새를 맡았다. 나리아는 질세라 눈을 부릅뜨고 페이를 노려보았다.


“오랜 먼지, 그리고 녹슨 냄새. 공장인가? 그럼 무르히?”

“땡! 틀렸어!”


나리아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들고 외쳤다.


“두 번 남았어.”


페이는 소매로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코끝에 집중했다.


“내장의 냄새, 불꽃, 피 냄새. 단테? 카타린? 린첸? 아니, 아니야. 루미스로군!”

“그것도 틀렸어.”


나리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루미스와도 제법 지냈으니 거의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틀렸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냄새가 밸 만큼 오래 지냈다면 헌진밖에 없었다. 그리고 헌진은 잊힌 기사다. 페이가 맞출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 한 번이야.”


나리아는 페이를 재촉했다. 빨리 오답을 유발하고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했다. 헌진과 페이를 마주치게 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도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냄새. 오래된, 낡은 쇠 비린내. 그렇다면······.”


페이가 눈을 뜨고 미소지었다. 기분 좋다는 듯 휘젓던 소매가 정지했다.


“헌진이로군.”


나리아는 황급히 물러나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페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듯 허공에 손을 올렸다.


“내가 맞췄나? 맞췄나 보군. 그럴 줄 알았어!”


페이는 나리아를 보지 않았다. 시선이 구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리아는 그곳을 따라 보고 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다가올 수 있는 건 오직 그대뿐이지 않겠나!”


놀이터 입구에는 헌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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