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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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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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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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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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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9. 4구역 (1)

DUMMY

4구역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리아는 한가했다. 이곳은 7구역에서 6구역의 복도보다 길었다. 옛 기술의 흔적에 감동한 것도 잠시였고 나리아는 이내 하품을 했다. 벽 너머나 환기구에서 들리는 은은한 기계음도 괜스레 졸음을 부추겼다.


수레 위에 엎어진 채 꾸벅거리던 나리아가 눈가를 비비며 통신기를 조작했다.


“여보세요? 마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죠. 지금 한가해요? 통신기 끼고 있었네요? 고마워요.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이게 누구 비명소리죠? 네? 누구 대가리를 깨고 있다고요? 어······또 연락할게요!”


나리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통신을 끊었다.


“마린이 많이 바쁜가 봐요.”

“누구 대가리를 깨고 있다더냐.”


수레를 끌던 헌진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4구역의 관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9구역을 접수 중이라던데요?”

“생각보다 빠르구나.”


아랫구역의 제국군이 잡배에 불과하다지만, 마린의 확장 속도는 예상을 넘었다. 머지않아 아랫구역을 통일하게 될 것이다. 나리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린이 다스리는 아랫구역은 어떤 모습일까요?”

“모를 일이다. 제국의 가장 큰 생산지를 점거한다는 말이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권력이겠지. 권력이 마린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흐음, 저는 마린을 믿어요.”

“제국이 마린의 행보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문제겠군.”


자연스럽게 전쟁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나리아는 침울해졌다. 6구역에서 나리아는 전쟁의 일면을 맛보았다. 7구역에서 있었던 패싸움과는 격이 달랐다. 만약 그러한 것이 아랫구역을 휩쓸고, 그 중심에 마린과 사쿠마가 있게 된다면, 나리아는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을 굳이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헌진의 속도가 차츰 느려졌다. 관문이 가까워졌다. 나리아는 몸을 뒤집어 엎드린 자세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4구역은 어떤 곳이죠?”

“이미 내가 알던 도시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들을 보아왔으니 확신할 수는 없다.”


헌진이 관문 옆의 단말기를 조작했다. 주머니에서 꺼낸 미르든의 목이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나리아는 목의 단면도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가려 하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기사의 장기 배치를 외우는 것과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은 역시 실감이 달랐다. 시선이 스친 것을 잊기 위해 나리아는 서둘러 말했다.


“아랫구역은 생산, 5구역과 6구역은 전쟁. 그럼 4구역은 뭘 담당하죠?”

“내 기억과 다르지 않다면······.”


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헌진은 미르돈의 목을 갈무리했다.


“생활이다.”


나리아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관문이 열리고 4구역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장 먼저 색채로 깨달았다.


눈이 아플 정도의 색채가 다가왔다. 나리아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것은 가히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랫구역은 무채색에 가까운 곳이었다. 흙먼지에 뒤덮인 사람은 물론이고, 건물과 옷, 구역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그저 기능할 뿐인 덩어리였다.


6구역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온전한 시기를 알지는 못했지만 오랜 전쟁이 고인 그곳은 폐허와 파편, 강철과 핏물만이 가득했다.


“······색이 너무 많네요.”


그러나 4구역은 달랐다. 눈이 부시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수많은 색으로 자신들을 치장했다. 온갖 염료로 물들인 옷이 몸을 감쌌고, 건물마다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 건물 지붕에서 나부끼는 각기 다른 깃발은 바람에 펄럭이며 저마다의 문양을 뽐냈다.


“눈이 아플 지경이에요.”


나리아는 눈가를 감쌌다. 헌진은 담담했지만 나리아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보아온 것들에 비하면 이 알록달록한 색깔들은 얼핏 기괴하기까지 했다.


“생활이라고요?”

“그래. 적응하려면 시간 좀 걸릴 거다.”


헌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단의 무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4구역을 담당하는 병사들로 보였는데, 느닷없이 관문이 열리고 나타난 두 사람에게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댁들은 누구요?”


병사 하나가 헌진에게 다가왔다. 관문이 통하는 곳은 성이 아니었다. 대로 한복판이었다. 다행히 기사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구역을 넘나드는 유일한 방법의 문제점이 지금은 발생하지 않았다.


“공물이오, 수출품이오? 사전 연락이 없었는데.”


헌진이 대답하지 않자 병사는 우물쭈물했다. 짐이라고는 커다란 수레 하나와 소녀일 뿐인데 쉽사리 건들지 못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헌진은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병사가 그를 제지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몸에 부딪치고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쇳덩이와 부딪친 듯 손이 얼얼했다.


“호, 혹시 기사십니까?”


그제야 헌진의 정체를 추측하고 병사가 물었다. 헌진은 말없이 그를 지나쳤다. 병사들은 감히 말릴 생각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보았다.


“우리 너무 대놓고 이동하는 거 아니에요?”


나리아가 묻자 헌진이 대답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전에 몸을 숨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이곳의 기사가 루미스처럼 우리에게 호의적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으으, 눈이······.”


나리아가 눈을 감싸 쥐고 신음했다. 방금 병사는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가 각각 붉은색과 파란색이었고, 심지어 상반신도 정반대의 배색이었다. 한낱 군복조차 대여섯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적응하려면 한동안 고생할 것 같았다.


나리아는 수레에서 내려 헌진의 옆을 걸었다. 눈은 눈이었고, 직접 걷고 보며 관찰하고 싶었다. 헌진이 나리아의 걸음에 맞춰 느긋하게 나아갔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생활을 목적으로 한 4구역이었고, 대로는 헌진처럼 온갖 수레와 인파가 몰려들어 발 디딜 곳 하나 없었다. 숨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이 평화로운 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나리아는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도시의 모습이 이곳에 구현되자 감탄했다. 지금까지 있던 곳이 특수한 상황이라는 실감이 새삼 와닿았다.


“이 사람들은 다 어딜 오고 가는 거예요?”


헌진은 인파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며 빠져나갈 골목을 찾았다.


“각자 목적이 다르다. 염료와 가죽, 고기의 냄새 같은 것들이 나는구나. 아마 시장을 오고 가는 길이 아니겠냐.”

“시장이라! 그건 다행히 제가 알고 있는 거네요.”


아랫구역에도 시장은 있었다. 주로 제국군이 민간인을 등쳐먹기 위해 술 따위의 물건을 팔거나 허가를 받고 합성식을 파는 곳이었다. 지나치게 낯선 이곳에서 그나마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리아는 머릿속으로 4구역의 지도를 더듬었다. 도시제국의 북서쪽에 있는 4구역은 완만한 곡선으로 길쭉했다. 외곽에는 제국군이 직접 관리하는 넓은 숲이 있어 목재를 제공했다.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전쟁터와는 다른 모습에 눈이 얼얼했지만, 나리아는 점차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나리아가 헌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아이답게 천진한 모습에 헌진도 미소를 지었다.


“미아가 되지 않게 조심하거라.”

“걱정 마요! 구경만 할 테니까.”


인파 속을 헤치며 나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건물 창문으로 몸을 내민 사람들이 빨랫감을 널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길가 곳곳에 열린 좌판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병사들 몇이 몰려있는 여인들에게 무언가를 떠들어댔고 서로 웃음을 터트렸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떠들어대서 내용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눈이 아플 만큼 주변은 색으로 넘쳤다. 그러나 나리아는 이곳에서 혼란보다는 평화를 느꼈다. 4구역에는 도시라는 집단의 정상적인 모습이 있었다.


시장의 끝자락에 이르자 소음이 더욱 거세졌다. 휘황찬란한 물건들은 감히 용도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나리아는 헌진의 옷소매를 당겼다.


“헌진, 저게 뭐죠?”


나리아가 헌진을 올려다보고 흠칫 놀랐다. 헌진이 아니었다. 험상궂은 얼굴의 상인이 나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어, 아니, 미안해요. 사람을 잘못 봐서······.”


상인이 소매를 털고 나리아를 지나쳤다. 나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헌진이 보이지 않았다. 길 한복판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갖 사람과 수레뿐이었다.


“헌진?”


나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지나치며 나리아의 어깨를 쳤다. 길 한복판에서 멈춰있는 것은 위험하다. 나리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못마땅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투덜대는 소리를 들었다.


“헌진!”


나리아는 아무리 둘러봐도 낯익은 모습이 보이지 않자 길 한구석으로 물러났다. 미아가 되지 말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미아가 되다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리아, 어디 있냐.]

“아 참!”


통신기에서 헌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둥지둥하던 와중에 가장 먼저 써야 할 수단을 잊고 있었다.


“헌진은 어디에요? 저는 지금······어······ 모르겠어요. 여기가 어디죠?”

[일단 같은 방향으로 계속 와라. 합류할 만한 지점이 보이면 연락하마.]

“알았어요.”


나리아는 불안한 마음에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인파에 휩쓸려 한참을 걷는 동안, 이곳이 맞는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반대로 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기에는 그들 모두가 바빠 보였다. 헌진이 기사의 감각으로 찾아주지 않을까 한구석에 서서 기다리기도 했지만 아무리 헌진이라도 힘든 일이었다. 이곳에는 너무 많은 기척이 있었다.


“으으······미안해요, 헌진.”

[괜찮다. 아무래도 내 감각도 생각보다 많이 녹슨 모양이군. 일단 짐을 놔둘 곳을 찾아봐야겠구나.]

“알았어요. 일단 전 정지할게요.”


나리아는 결국 길가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있기를 선택했다. 인파에는 끝이 있을 테니 조만간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고쳐먹고 사람들이나 구경하고 있기로 했다. 나리아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생소한 옷차림과 색깔의 조합을 불만 섞인 목소리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무슨 공작새도 아니고,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대요?”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나리아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리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 줄 알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을 때도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오히려 무례하지 않냐는 듯 마주 노려보았다.


그중 일부가 나리아에게 동전을 던졌다. 이마에 맞은 동전이 바닥을 구르자 나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깨달았다.


“세상에! 이 사람들 저를 거지 취급하고 있어요!”

[그렇게 보여도 무리는 아니지.]

“저도 돈이라면 헌진한테서 받은 월급이 있거든요!”

[그래, 그리고 그 돈은 나에게 있고 말이다.]


나리아는 수레에 올라가 있는 돈주머니를 떠올리고 시무룩해졌다.


눈앞을 아이들 몇이 우르르 지나갔다. 나리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비교적 얌전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서로 떠들고 까불거리며 뛰어갔다. 나리아는 저렇게 한데 뒤섞여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아랫구역에서는 아이들조차 퀭한 눈으로 공장에서 노동했다. 알 듯 모를 듯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헌진과 만나야 하는데, 발걸음이 홀린 듯이 아이들을 따라가려 했다.


“다시 돌아오면 돼. 잠깐만, 아주 잠깐만.”


나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이들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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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89. 탑 (5) 21.06.15 24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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