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4,939
추천수 :
304
글자수 :
612,952

작성
21.04.19 23:58
조회
29
추천
2
글자
12쪽

48. 도서관의 아이 (3)

DUMMY

루미스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수복을 마친 다리는 어느정도 움직여주었다. 그러나 근육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루미스는 벽에 손을 짚었다. 나리아가 황급히 루미스의 팔을 받쳐주었다.


“그러니까, 기사단 시술은 내장을 덜어내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루미스는 발로 바닥을 두들기며 감각을 일깨웠다. 입으로는 기사단을 설명하던 도중이었다. 기사단의 규율은 특별히 비밀을 두지 않았다. 으레 그렇듯 밝혀졌을 때 훼손당할 여지가 있는 사실을 비밀로 두기 마련이다. 기사와 기사단에 대해 누가 알더라도 해를 끼칠 리가 없으니 루미스의 설명에도 숨기는 부분은 없었다.


“헌진이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까.”

“헌진은 저를 어린애로만 알아요. 새삼스럽게도 말이에요.”


루미스는 헌진의 방침을 이해했다. 비밀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알아봤자 무익하다는 말이었다. 옛 관념을 알고 있는 나리아에게는 기사라는 존재가 비인도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헌진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헌진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했지만 루미스는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나리아라면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을 테고, 어차피 알게 될 사항이라면 늦든 빠르든 별 다른 차이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소화기관을 극단적으로 압축하거나 생식기관을 적출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추가될 장기의 공간을 마련하고, 기존의 장기를 강화시킵니다.”

“그거 참 무시무시하네요.”

“그것이 이 도시를 세운 근본적인 기술입니다. 황제 폐하가 최초의 기사단으로 이 땅을 개척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다시 번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세상에 비하면 한줌짜리 도시지만요.”

“그 한줌이, 기사단이 보전해야 할 모든 것입니다.”


나리아는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미안해요. 기사단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라······.”

“아닙니다. 그 한줌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루미스가 천천히 떼는 걸음을 나리아가 보조했다. 오늘 루미스가 부상을 딛고 일어섰을 때, 나리아는 기쁨에 겨워했다. 루미스는 갓난아기 취급을 받는 것 같다며 도움을 거절했지만, 늘 그랬듯 나리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지금은 얌전히 팔을 맡기고 재활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헌진이 최초의 기사라면서요?”


미르돈과 헌진의 전투에서 들은 말이었다. 관여는 하지 않되 시종 듣고 있던 나리아는 그 내용을 모두 기억했다.


“······그 시절 기사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첫 원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헌진은 최초의 시절을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저를 비롯한 현세대 기사단이 겪은 것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기록 같은 건요?”


나리아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 묻어나왔다. 루미스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습니다.”

“흠, 언제 한 번 또 헌진을 괴롭혀봐야겠어요. 뭐, 그래봤자 지금까지 안 가르쳐준 걸 이제 와서 가르쳐줄 것 같진 않지만요.”

“왜 옛날 일을 궁금해하는 겁니까.”


루미스의 물음에 나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지금까지 생각도 못했던 사실을 지적당한 눈치였다.


“글쎄요. 도서관의 천성이 그런 게 아닐까요?”


루미스는 도서관 섬멸작전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대략적인 상황만 알았다. 기사단 후보를 주축으로 편성된 군대가 8구역을 휩쓸었다. 몇 남지 않은 고대의 기계와 무기로 저항하던 도서관은 전멸당했다. 오랜 침묵을 뚫고 내려진 황제의 명령은 출처를 더듬을 수 없었으나 어쨌든 작전은 완수되었다. 그리고 나리아는 그 도서관의 생존자다.


루미스는 작전이 완수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공식적으로 도서관은 섬멸되다. 더군다나 도서관 섬멸은 루미스에게 내려진 명령이 아니다. 따라서 나리아는 루미스의 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이 루미스에게 닿는다면, 그때도 나리아의 손을 이렇게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괜찮아요?”


나리아가 루미스를 올려다보았다. 루미스는 나리아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었다. 움직임을 기억한 근육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설 수 없었던 다리가 이제는 가뿐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벌써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거예요?”

“달리거나 도약할 수는 없겠지만, 걸을 수는 있습니다.”


기사의 몸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 나리아는 입을 벌리고 가볍게 발을 놀리는 루미스를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헌진이 들어왔다. 그는 루미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리아에게 말했다.


“나리아, 준비 다 됐다.”

“벌써요? 눈치껏 좀 천천히 하면 안 돼요?”

“그 말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구나.”


헌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리아도 자신이 떼를 쓴다는 것을 안다. 어리광을 부려도 될 일도 아니었다.


“가자. 4구역으로 갈 시간이다.”

“알았어요.”


나리아가 루미스를 돌아보았다. 시무룩한 눈빛이었다. 오랫동안 쌓여있던 5구역의 연기가 걷혔다. 헌진은 며칠동안 5구역에 머무르며 위협을 점검했고, 안전하다고 판단하자 이동할 채비를 했다. 그것이 오늘이었다.


“마린이랑 헤어질 때도 그랬지만, 전 아무래도 이런 게 평생 안 익숙해질 것 같네요.”


나리아가 루미스의 손을 잡았다. 루미스는 엉거주춤한 손을 어쩌지 못했다.


“4구역으로 향하는 관문까지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래서 루미스는 억지로 회복력을 끌어올렸다. 기사는 항상 임전태세를 갖추어야 하니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도 어쩐지 변명처럼 들렸다.




성앞에는 헌진이 꾸린 짐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처럼 장만되어있었다. 수레는 그때보다 더 크고 튼튼했고, 짐도 늘었다.


“정말 가져가도 돼요?”


나리아가 수레에 올라타서 커다란 짐짝 하나를 두들겼다. 기사의 갑옷, 루미스의 것이었다.


“어차피 폐기된 물건입니다. 이곳에 두는 것보다 활용할 길이 있을 겁니다.”


헌진이 짐을 엮은 끈을 점검하며 말했다.


“수리할 수 있다면 전달할 방법을 찾아보지.”

“그렇게까지 해서 철혈까지 입어야 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동감이다.”


나리아가 가장 높은 짐짝 위로 올라갔다. 성을 빠져나가는 출구까지 병사들이 도열해있었다. 콘츠나 명우, 멜리시 같은 낯익은 얼굴이 많았다.


“집정관.”


헌진이 수레 점검을 마치고 한편에 서있던 볼프람에게 다가갔다.


“아직 구역 전체가 정화되었을 리는 없다. 수복할 계획이 있다면 며칠을 더 두고보고, 루미스에게 확인을 구하도록.”

“알겠소. 내가 살다가 조공 이외의 목적으로 구역을 오르는 일행은 처음 보는군. 그대들의 여정이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볼프람이 헌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운을 빌겠소.”

“무운이라.”


황제에게 칼을 들이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볼프람은 모른다. 헌진은 볼프람의 말을 받으면서 손을 마주 잡았다.


“집정관에게도 무운을 빌지.”

“끔찍한 소리 마시오. 이제는 남은 내 임기를 평화롭게 마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오.”

“그러면 그렇게 되기를 빌지.”

“잘 가시오.”


헌진이 수레를 끌었다. 나리아는 짐짝 위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멜리시가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명우와 콘츠가 헌진에게 경례를 붙였다. 수레가 구르는 소리와 함께 얼굴들이 멀어졌다. 몇 개의 전장을 넘어 5구역으로 이르는 다리에 도착하자 함께 걷는 사람은 루미스만 남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침묵이 어색했다. 나리아는 수레 앞부분에 앉아 헌진의 뒷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세 번째 폐, 여기가 해독기, 여기가 두 번째 심장.”

“기사의 해부도라도 배웠냐.”

“적을 알기 전에 아군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헌진의 내장을 하나하나 가리키던 나리아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신장이 어디로 옮겨졌다고 했죠?”


나리아의 질문에 루미스가 대답했다.


“배꼽보다 조금 아래쪽입니다.”

“그럼 여기군요.”


복습재료로 활용되는 입장에 서자 헌진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기사를 사귈수록 나리아가 더 알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기사의 입으로 기사에 대해 알게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 또한, 나리아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헌진의 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언가를 따져보는 나리아를 앞질러 루미스가 다가왔다.


“미르돈의 머리로 문이 열린다는 게 사실입니까.”

“관문이 미르돈의 눈에는 반응하더군.”

“기림 제국의 시스템이 기사조차 걸러낸다는 말로 들립니다.”

“선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애매하지만 불길한 말에 루미스가 헌진을 보았다.


“······제가 준비할 게 있습니까.”

“나도 모르겠다.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른다. 제국민들이 무엇을 대비해야하는지도. 하지만 닥쳐올 일이 무엇이든간에 평화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볼프람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헌진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루미스는 헌진의 말끝이 몰고 온 어렴풋한 피냄새를 맡았다.


“당신이 황제 폐하께 다시 칼을 내민다면, 저는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내가 너에게 할 말은 옛날과 다르지 않다.”


헌진이 루미스를 돌아보았다. 어떠한 작전이나 임무일지라도 변칙적인 세상에서 일정할 수 없다. 헌진은 항상 현장판단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네 뜻을 가장 먼저 헤아리고, 우선해라.”

“······알겠습니다.”

“무슨 얘기해요?”


나리아가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헌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관문에 이르기까지 세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헌진은 연기가 걷히지 않은 지역을 피하면서 나리아에게 해가 되지 않을 길을 골랐다. 아직 수거되지 못한 시체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담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리아는 역겨워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시선을 돌리기에는 루미스와의 이별이 가까웠다.


5구역의 성 내부는 비교적 깨끗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독이 되기 쉬운 시체는 헌진이 진작에 치워두었다. 나리아는 성 내부를 둘러보며 움찔했다. 얼굴 없는 황제를 나타낸 조각이나 그림은 헌진의 말로 듣던 것보다 기괴했다.


“미르돈이 무엇을 바랐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나리아가 묘사하는 말을 듣고 루미스는 중얼거렸다. 보이지 않는 눈이었지만 이곳에 있었던 광기를 상상할 수는 있었다.


“아무도 모를 일이죠. 아주 먼 옛날에, 조각상을 빚어 아내로 삼으려던 사람이 있었어요. 미르돈도 그러려던 게 아닐까요? 황제를 빚으려던 거죠.”

“불경한 일입니다.”

“이미 여기가 불경한 걸요!”


나리아의 대꾸에 루미스도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관문 앞에 도달하고 나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헌진은 망설이지 않고 짐더미에서 미르돈의 머리를 꺼냈다. 부패하지 않은 머리는 원형이 깨끗하게 유지되었다. 눈꺼풀을 들춰 눈동자를 내보인 헌진은 관문에 인식시켰다.


소리없이 열리는 문 너머로 끝 없는 복도가 이어졌다. 헌진은 그 앞으로 한걸음 내밀었다.


“루미스. 제가 준 거 잘 갖고 있죠?”


루미스는 말없이 귀를 가리켰다. 나리아가 남긴 통신기 하나가 귀에 꽂혀 있었다.


“잘 있어요.”


영구적인 이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찌됐든 루미스는 이런 상황에서 해야 할 말을 모른다. 다만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적어도 어떤 손짓이 작별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수레는 복도를 나아갔다. 문은 열렸을 때처럼 천천히 닫혔다. 나리아는 루미스의 얼굴이 문에 가려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루미스가 볼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공기의 흔들림은 전달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단 둘이 남게 되자, 헌진은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나리아는 가까스로 울지 않았다.


“제가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나봐요.”


헌진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나리아는 변명처럼 속삭였다.


작가의말


좋은 한 주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주기 21.02.14 129 0 -
116 115. 언령 (3) +2 21.08.31 48 3 12쪽
115 114. 언령 (2) 21.08.03 31 2 11쪽
114 113. 언령 (1) 21.08.02 29 1 11쪽
113 112.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7) 21.07.27 33 1 11쪽
112 111.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6) 21.07.21 21 1 11쪽
111 110.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5) 21.07.20 26 1 12쪽
110 109.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4) 21.07.16 49 1 13쪽
109 108.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3) 21.07.15 24 1 12쪽
108 107.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2) 21.07.14 31 2 12쪽
107 106.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1) 21.07.13 46 1 11쪽
106 105. 마고 (3) 21.07.10 24 2 12쪽
105 104. 마고 (2) 21.07.08 32 2 10쪽
104 103. 마고 (1) 21.07.07 34 2 11쪽
103 102. 폐기물 (7) 21.07.06 29 2 12쪽
102 101. 폐기물 (6) 21.07.02 19 2 11쪽
101 100. 폐기물 (5) 21.07.01 25 2 11쪽
100 99. 폐기물 (4) 21.06.30 25 2 10쪽
99 98. 폐기물 (3) 21.06.29 25 2 12쪽
98 97. 폐기물 (2) 21.06.29 24 2 11쪽
97 96. 폐기물 (1) 21.06.25 25 2 10쪽
96 95. 2구역 (3) 21.06.23 24 2 11쪽
95 94. 2구역 (2) 21.06.22 27 2 11쪽
94 93. 2구역 (1) 21.06.22 32 2 12쪽
93 92. 탑 (8) 21.06.18 24 2 10쪽
92 91. 탑 (7) 21.06.17 28 2 12쪽
91 90. 탑 (6) 21.06.16 28 2 10쪽
90 89. 탑 (5) 21.06.15 24 2 11쪽
89 88. 탑 (4) 21.06.14 49 2 11쪽
88 87. 탑 (3) 21.06.11 29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