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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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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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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6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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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7. 도서관의 아이 (2)

DUMMY

볼프람은 잠시 깃펜을 내려놓고 눈가를 주물렀다. 아직 들여다봐야 할 서류가 책상 한가득 놓여있었다. 그 모두가 전사자에 관한 기록이었다.


휘하 장교에게는 시킬 수 없는 일이다. 집정관의 의무는 구역을 관리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기록하는 일이므로, 전사자들 역시 기록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들여다봤을 때 이후로 서류는 무섭게 불어나있었다. 그만큼 죽음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볼프람은 침친한 눈으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숫자로 기록된 죽음은 초라해보였으나 그들에 관한 가족과 동료의 증언은 초라하지 않았다. 볼프람은 막상 하나의 작은 죽음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거대한지 알고 있다. 그것을 그냥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집정관의 자격이었다.


숫자로 기록된 죽음을 개별적인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전쟁보다 힘겹다. 볼프람은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은 아직 어수선했다. 감옥에 채 수용되지 못한 포로들이 울타리 안에서 관리되었고 한편에는 부상자를 치료하는 천막이 소란스러웠다. 이 순간에도 부상을 이겨내지 못한 병사들의 숨이 넘어가고 있을 것이다. 볼프람은 내일 추가로 쌓일 서류의 양을 가늠할 수 없었다.


둘러보던 시야 한 구석에 이색적인 장면이 보였다. 안도할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아랫구역의 기사가 데리고 다니는 소녀가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소녀의 품에는 식량이 한아름 들려있었다. 심지어 소녀를 수행하는 멜리시의 품에도 짐더미가 가득했다. 멜리시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런데도 멜리시는 충실히 짐을 날랐다.


매일같이 루미스에게 식량을 나르는 나리아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혈색이 밝아졌고 근육이 생겼는지 몸은 또래 아이들처럼 살이 붙었다.


처음 나리아를 보았을 때, 볼프람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문으로 듣는 아랫구역 사람답게 더러웠고 옷보다 흙먼지를 두텁게 감싼 몸이었다.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팔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눈빛은 유달리 형형했지만 그것은 으레 보는 공포에 질린 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꼬질꼬질한 머리카락이 희한한 빛을 발하며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나리아를 감싼 모든 것이 색채를 죽였다.


거지꼴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했다. 볼프람은 나리아에게는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광장에서의 전투 이후로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았을 전장 속에서 나리아는 겁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짐승을 상대함에도 불구하고 적을 노려보는 눈빛은 또렷했다. 겁이 없는 병사는 종종 있었지만,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나리아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말이었다.


나리아에게는 사람을 따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볼프람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멜리시가 저렇게까지 따르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한낱 소녀가 순식간에 전황을 파악하고 기사와 군대를 연계해냈다. 볼프람은 두 눈으로 전장에서의 나리아를 똑똑히 목격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볼프람은 기지개를 켰다. 오래 앉아있기 위해서는 가끔은 일어서야 하는 법이다.




“멜리시! 뭘 그렇게 꾸물대는 거예요?”

“내가 들고 있는 걸 봐라! 네 몸무게보다 많이 나갈 것 같지 않냐!”

“개미는 자기몸보다 20배는 들 수 있거든요. 개미를 본받아보죠. 봐요. 저도 노력중이잖아요!”


나리아가 앞뒤로 멘 보따리에 뒤뚱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멜리시도 그 배는 될 것 같은 짐을 짊어지고 힘겨워했다. 나리아는 땀을 흘렸지만 여전히 씩씩했다.


“도대체 내가 왜 짐꾼을 해야 하는지······.”


그들이 짊어진 식량은 모조리 루미스의 뱃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나리아는 끝없이 루미스를 먹였다. 기사는 먹지 않아도 되는 몸이었지만 주면 주는대로 먹으며 소화시킬 수 있었다. 나리아는 그것을 회복의 징조로 받아들였고 기뻐하며 식량을 공수했다. 볼프람이 부여한 특권으로 얻어낸 식량은 오늘도 루미스에게 갈 예정이다. 나리아를 귀여워한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식량도 적지 않았다.


“쉬었다 가지 않겠느냐.”


바삐 움직이던 나리아가 멈칫했다. 그늘진 나무 아래에서 볼프람이 손짓하고 있었다. 볼프람은 습관적으로 경례를 붙였고 나리아는 머뭇거렸다. 나리아는 늙은 볼프람을 어려워했다. 거대한 짐승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신분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멜리시는 나리아의 어깨를 찌르며 볼프람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가봐라. 짐은 내가 보고 있으마.”

“루미스가 먹을 거니까 멋대로 빼먹으면 안 돼요.”

“어떤 간 큰 놈이 기사의 물건을 건들겠냐.”


나리아가 짐을 내려놓으며 볼프람에게 다가갔다. 볼프람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선선한 그늘 아래에 앉아 나리아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성을 오고갔으니 지칠 만도 했다. 짐을 벗은 어깨가 떠오를 듯 가벼웠다.


“괜찮으냐? 원한다면 병사 몇을 붙여줄 수도 있다.”

“뭐, 다들 바쁜 거 아니에요? 저 혼자서도 해낼 수 있어요. 볼프람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에요.”


서슴없이 이름만으로 부르는 그녀의 태도는 당연해보였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볼프람은 새삼 그것을 지적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기새한테 먹이를 물어다주는 어미새가 딱 너와 같겠구나.”

“루미스가 아기새라고요?”


나리아는 땀을 닦아내며 작게 웃었다. 그늘 사이로 새어나는 햇살에 머리카락이 빛났다. 옅은 금빛에 볼프람은 잠시 눈이 부셨다.


“근데 왜 불렀어요?”


나리아가 볼프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을 보는 시선이 올곧다. 볼프람은 얼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에게 누군가 다가오지 않도록 경계를 서고 있는 멜리시를 흘깃 보았다.


“앞으로 무얼 할 계획이냐.”

“앞으로요? 지금은 하루빨리 루미스가 낫기를 바라는 게 계획이죠.”

“기사를 걱정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다친 사람을 걱정하는데 기사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요. 볼프람이 저 사람들을 걱정하는 거랑 똑같죠.”


나리아가 쪼그려 앉은 무릎에 턱을 받친 채로 한곳을 가리켰다. 부상자를 수용한 야전병원이었다. 볼프람도 나리아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보았다. 아무래도 나리아에게는 기사와 병사의 목숨이 똑같은 무게인 모양이었다.


“전쟁에서 다치거나 죽은 병사들은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내 책임을 다하고 있을 뿐이란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기사에게 책임감을 느낀단 말이냐.”

“그런가봐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니?”


볼프람이 나리아를 응시했다. 나리아는 발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제가 루미스를 너무 좋아하니까요? 아닌가? 모르겠어요. 왜일까요?”


나리아가 오히려 되묻자 볼프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덕목은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지. 그건 이유 없이 발생해야 가장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덕목이요?”

“사람을 이끄는 덕목 말이다.”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여기에 남을 생각은 없느냐.”

“······무슨 뜻이죠?”


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순수한 의문을 담은 눈빛이었다.


“네가 무슨 목적으로 기사와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란다. 네가 원한다면 이곳에 남아 다음 집정관이 되지 않겠느냐?”

“잠깐만요. 집정관을 그렇게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거예요? 황제의 허가는요?”


황제에게조차 경칭을 붙이지 않자 볼프람은 그것을 지적해야 하는지 짧게 고민했다. 그러나 나리아는 그 누구에게도 경칭을 붙이지 않을 것 같았다. 볼프람은 잠시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모르느냐? 황궁과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다. 나도 선대 집정관이 전사하실 적에 멋대로 임명되고 지금까지 역할을 수행했지. 각종 권한은 그 다음에 처리되더구나. 황궁의 인가 없이도 말이다. 황궁이 모든 구역에 개입한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란다. 관례만이 남아 스스로 운영되고 있는 형국이지.”


낯선 말은 아니었다. 7구역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각 구역이 황궁으로부터 고립된 상태가 줄곧 이어졌다. 그러나 새삼 집정관의 입으로 그렇게 듣자 무게감이 달랐다.


그 말을 되새기자 볼프람의 뒷말이 다가왔다. 나리아는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저보고 집정관을 하라고요?”

“그래.”

“싫어요!”

“생각은 좀 해보고 말해주지 않겠니?”


이미 예상한 대답이었기에 볼프람은 낙담하지 않았다. 기사의 동료이니만큼 그가 상상하지 못할 목표가 있을 것이다. 그런 나리아에게 집정관이란 지위조차 불필요할 터였다.


“말은 고맙게 받을게요. 근데 저한테는 할 일이 있거든요.”


결코 가벼운 제안이 아닌데 나리아는 쉽게 털어냈다. 볼프람은 수긍하고 개인적인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그게 뭔지 물어도 되겠느냐.”

“비밀······까지는 아닌가? 황제를 만나야 하거든요.”


막연히 상상했던 일이다. 아랫구역에서 윗구역으로 거스른다면 그 종착점은 황궁일 것이다. 동시에 볼프람이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한 목적이었다. 황제를 만나러 윗구역으로 간다는 것은, 마치 태양을 향해 뛰어오르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폐하를 만나서 무엇하려느냐.”

“그냥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더는 물어봐서는 안 된다. 볼프람은 쉽사리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을 엿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 물음에 답을 얻기를 바라마.”

“이야기 끝났어요?”


나리아가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볼프람은 이 흥미로운 소녀와 대화를 더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더는 붙잡을 화제가 없었다.


“그래. 붙잡아서 미안하구나.”

“아녜요. 저도 쉬어서 좋았어요. 대낮에 나무 그늘에서 쉬어본 건 처음이었어요. 7구역에는 나무가 없거든요. 아니, 대낮에 지상으로 나온 적도 없지만.”


다른 구역의 일은 소문으로만 안다. 볼프람은 그에 대해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루미스에게 신경이 쏠린 나리아를 붙잡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볼프람.”


멜리시에게 다가가던 나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밤샘은 좋지 않아요. 몸을 소중히 하세요.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도 좋지만 더 오래 기리려면 그만큼 오래 살아야 하니까요.”


볼프람이 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능숙하게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피로가 묻어나온 모양이다. 아니면 나리아에게 간파당했거나. 볼프람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어주었다. 나리아는 방긋 웃고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물러났다.


“멜리시! 쉬는 시간은 끝났어요! 짐 들어요.”

“오냐. 알았다.”


멜리시가 다시 짐을 짊어지고는 볼프람에게 경례했다. 두 사람은 곧 사이좋게 뒤뚱거리면서 성을 향해 돌아갔다.


“볼프람 장군께서 뭐라 하시든?”

“글쎄요. 저보고 집정관이 되라던데요.”

“뭐?”


나리아와 멜리시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볼프람은 나리아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말대로 오래 살아야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잠시 눈을 붙여둬야 좋을 것이다.


작가의말

금요일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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