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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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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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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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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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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6. 도서관의 아이 (1)

DUMMY

그로부터 며칠, 크고 작은 전투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5구역 군대의 잔당이 숨어들어 무의미한 저항을 했고, 볼프람은 그들을 진압하거나 때로는 회유했다.


카얄란의 중독증세가 경미한 병사들은 대부분이 항복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일부 격렬한 저항을 하는, 심지어 동료들과도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은 죽어서야 잠잠해졌다.


사로잡은 포로들이 매일같이 성으로 호송되어왔다. 약물의 출처와 침식당한 미르돈에 대해 추궁하고자 헌진이 매일같이 감옥을 들락거렸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집정관의 변화나 카얄란의 출처를 몰랐다. 막연하게 몇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였기에 서서히 스며들어왔다고 추측하는 증언만 있을 뿐이었다.


헌진은 성 위에 올라서서 강 너머를 관찰하다가 내려오고는 했다. 4구역으로 올라가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카얄란의 연기가 아직 5구역을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부유하는 지면이라도 되는 양 낮고 짙게 깔려있었다. 원액을 혀로 섭취하는 것만큼은 못되니 헌진에게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리아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몇 차례 검은 비가 내렸고 연기는 나날이 줄어갔다.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헌진은 강 너머에서 시선을 돌려 오늘도 전사자들의 추모가 이루어지는 화장터를 내려다보았다.


“캡틴!”


성 아래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헌진이 고개를 빼들었다. 명우가 병사 몇을 이끌고 있었다.


가볍게 뛰어내린 헌진이 명우 앞에 착지했다. 명우는 성과 지면의 높낮이 차이를 계산해보다가 포기했다. 흉내내다간 다리뼈가 남아나지 않을 높이였다.


“무슨 일이냐.”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사에게도 접수되어야 할 일인 것 같아서 말이죠. 루미스 경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루미스는 아직 요양이 필요하다. 내가 가서 보고 전해주지.”


루미스의 몸은 나날이 회복되어갔지만 아직 만족스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볼프람의 배려로 마련된 첫 가구인 침대 위에서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지금도 나리아가 수발을 들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명우가 헌진을 안내했다. 이동하는 동안 지나치던 병사들이 바쁜 와중에도 헌진에게 경례를 붙였다. 기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는 과하게 빛났다. 5구역의 기사와 벌인 격전은 소문으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었다. 헌진은 묵묵히 그들의 경례를 받아주었다.


“전장의 시체들을 옮기고 소독하는 작업이 드디어 광장에 이르렀는데 말입니다.”


명우가 말하는 광장이란 거대 허수와 루미스가 싸움을 벌였던 장소를 말했다. 가장 많은 인력이 투입된 곳이기도 했다. 명우는 설명하면서도 말을 고르느라 뜸을 들였다.


“그 짐승의 몸이, 아니, 체액이? 녹아내리는 게 느려서 오늘 막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걷히고 나니······.”

“놈의 몸이 채 사라지지 않았단 말이냐.”

“어······변했다고 해야할까. 뭐, 일단 직접 보시죠. 저한테는 그걸 설명할 도리가 없거든요.”


광장에서 빠져나오는 병사 몇몇이 골목길에 기대 구토를 했다. 웬만한 광경도 견딜 병사들이다. 헌진은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썩은내를 감지했다. 단순히 시체 썩는 냄새가 아니었다. 끔찍한 것이 뒤섞인, 성밖에서나 맡을 수 있는 시즙과 독의 냄새였다. 헌진은 나리아를 배려해 통신기를 껐다. 요 며칠 나리아는 루미스를 보살피느라 도서관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광장에는 짐승과 루미스의 전투가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헌진은 흔적만으로도 루미스의 동선과 싸움의 과정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음미할 여유는 없었다.


“저겁니다.”


명우가 코를 감싸며 손끝으로 가리켰다. 거대 허수가 쓰러진 건물이었다. 놈의 흔적은 건물에 늘어붙어 지면을 향해 사선으로 흘러내렸는데, 지금은 말라가고 있었다.


냄새의 원인은 그것이었다. 헌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것에 다가갔다.


“살이군.”


헌진이 무릎을 꿇고 바닥을 쓸었다. 짐승의 체액이 사라진 곳에는 살이 남아있었다. 사람의 형체는 아니다. 사람의 살을 발라내 이어붙인 것 같은 거대한 살덩이였다. 헌진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것을 살폈다. 살덩이는 이음새 없이 하나로 이루어졌고 마치 거인의 일부분처럼 보였다.


“역시 그렇습니까?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명우가 인상을 썼다. 건물 한 채의 높이와 면적을 지닌 살덩이가 검은 비를 머금고 썩어가는 광경에서 비위를 챙길 자신이 없다. 캡틴 앞에서 구역질을 하기보다 명우는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헌진은 눈앞에 있는 거대한 부패를 이해하려 애썼다. 짐승의 구성물질은 액체에 가까운 무기물이라고 나리아는 추측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대한 짐승이 그저 열화된 것이라면, 눈앞에 있는 것이 진정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것일 수밖에 없는 살덩이가 짐승의 앙금을 보니 그 제조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무엇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헌진이 살덩이를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황제를 입에 올렸다.


황제의 생명공학은 인간을 기사로 개조해냈다. 도시가 처음 세워질 때 인류를 번식케했다. 그것은 업적이라고 불리울 만했다. 그러나 이제 그 기술은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났다. 미르돈을 변형시켰고, 짐승을 출현시켰다. 헌진은 눈앞에 있는 살덩이에서 악의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을 보았다.


헌진은 문득 살덩이 틈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살덩이에 파묻히듯 꽂혀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살덩이와 일체화되어있던 이물질은 헝겊조각이었다. 손끝으로 쓸어보니 헌진에게는 익숙한 재질이었다. 그것은 옷감이었다. 이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입는 질좋은 재료가 아니다. 아랫구역 사람들이 간신히 걸치고나 다니는 거적데기의 일부였다.


또 한 가지 명백해졌다. 이 짐승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공된 것이다. 재료는 대량의 사람, 공급처는 아랫구역. 아랫구역의 범죄자와 사형당한 시체는 윗구역으로 수출된다. 헌진의 머릿속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단서들을 조합해냈다. 그들의 결말이 이런 식이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명우가 입가를 닦으며 다가왔다. 그의 안색은 다소 창백했다. 헌진은 주먹을 쥐어 옷감을 감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한 살이다. 태울 수밖에 없겠군.”

“알겠습니다. 냄새가 지독하니 좀 걷히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애들도 못 버티더군요.”

“이해못할 짐승의 잔해다. 보여봤자 좋을 것 없으니 처치가 완료될 때까지 이 광장은 폐쇄하는 게 좋을 것이다.”

“볼프람 장군님에게 말씀드려 인원을 차출하도록 하죠.”


명우는 핼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상상의 범주가 기사와 다르니 이것을 사람이 가공된 살덩이라고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헌진은 차라리 그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구역에 동요는 적을수록 좋았다.


헌진은 옷감을 품속에 넣어두고 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통신기를 꺼두어서 다행이었다. 나리아에게는 보여줄만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채 성으로 돌아온 헌진은 루미스의 입에 햄버거를 들이밀고 있는 나리아를 보았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루미스는 굳게 입을 다물고 저항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곧 함락될 처지로 보였다.


“먹어야 한다니까요! 살과 뼈의 구성성분이 뭔지 알아요? 몸이 그냥 알아서 회복하는 게 아니라고요!”


패색이 짙은 루미스가 헌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사의 몸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냐는 질책처럼 보였다. 헌진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어깨만 으쓱였다. 나리아도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 또한 이해했다.


“루미스!”


나리아가 다그치자 루미스는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나리아는 루미스의 입에 햄버거를 쑤시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사를 과보호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햄버거가 절반쯤 루미스의 입 안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헌진이 말을 걸었다. 나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헌진, 왔어요? 오늘은 어땠어요?”

“별 일 없었다. 강 너머로 건너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 같더군.”

“그래요? 하긴, 서쪽에서 바람이 부는 철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낮게 깔려있다면서요? 한동안 5구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카얄란의 연기라면, 연기라기보다는 가루에 가까울 테니까요.”


나리아는 건성으로, 하지만 나름대로 도출한 결론을 중얼거리며 루미스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루미스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평생 받아본 적 없는 배려에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즐거워보이는군, 루미스.”

“······그래보입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헌진은 살기를 느끼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떠냐.”

“이틀 정도면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루미스는 아직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무리하면 움직일 수 있을 테지만 잃은 뼈와 근육이 완전하지 않았다. 지금 루미스의 몸은 단단하기보다 흐물거렸다.


“목 마르지 않아요?”


루미스가 햄버거 하나를 다 먹어치우자 나리아가 물컵을 내밀었다. 루미스는 저항하는 듯 고개를 물렸다가 쓸데없는 드잡이질만 길어진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받아마셨다.


나리아는 텅 빈 물컵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들었다. 루미스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선명한 나리아의 웃는 얼굴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가져올게요. 먹을 거는요?”

“괜찮습니다.”

“그럼 물이라도 가져올게요!”


나리아가 물잔을 안고 잰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헌진이 대신해 루미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루미스는 멀어지는 나리아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아이입니다.”

“네가 감당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겠지.”

“나리아는 누구입니까.”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헌진이 시치미를 떼듯 팔짱을 꼈다. 루미스는 그를 노려보듯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나리아가 알고 있는 것들은 이 기림 제국에 허락된 지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리아를 처리하겠다는 거냐.”

“그 뜻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네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내가 곁에 있어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루미스가 입을 다물었다. 루미스는 침묵으로 헌진을 몰아붙였다. 헌진은 속으로 루미스와 나리아의 관계를 계산해보고는 입을 열었다.


“도서관이다.”

“짐작한 부분입니다만, 저는 도서관이 제국의 적으로 지정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리아에게는 그뿐만이 아닌 것 같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너답지 않게 막연한 말이구나.”


헌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루미스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한참을 망설였다. 마침내 쥐어짜는 목소리에서, 헌진은 그녀가 꺼낼 말의 무게감을 알았다.


“저는 나리아에게서······.”

“거기까지 하지.”


헌진이 말을 끊었다. 루미스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내비쳤다. 헌진은 루미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밝힐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말해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도서관이 숨긴 아이다.”

“알겠습니다.”


루미스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헌진의 말대로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고 본능이 알려주었다.


“그리고 또, 기사 돌보기를 좋아하는 아이지.”

“그 부분은 됐습니다.”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고.”

“······.”


루미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헌진에게도 낯선 몸짓이었다. 부끄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발소리가 다시 계단을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 나리아가 해맑게 외쳤다.


“루미스! 볼프람이랑 병사들이 이만큼이나 줬어요!”


나리아의 품에는 온갖 음식이 한아름 들려있었다. 단 것부터 신 것, 기름진 것까지. 평생 미각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루미스에게는 고역인 일이었다. 루미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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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7. 폐기물 (2) 21.06.29 24 2 11쪽
97 96. 폐기물 (1) 21.06.25 25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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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91. 탑 (7) 21.06.17 28 2 12쪽
91 90. 탑 (6) 21.06.16 28 2 10쪽
90 89. 탑 (5) 21.06.15 24 2 11쪽
89 88. 탑 (4) 21.06.14 48 2 11쪽
88 87. 탑 (3) 21.06.11 29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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