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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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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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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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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2. 기사와 병사 (2)

DUMMY

짐승은 네 발로 기거나 두 발로 서서 집요하게 루미스를 갉았다. 또 다시 한 차례 공방을 끝낸 루미스는 건물 한 채에 숨어 호흡을 골랐다.


루미스를 찾으려는 짐승의 숨결이 건물 사이를 누볐다. 루미스는 기척을 죽이고 창가 아래에 몸을 기댔다. 놈의 발톱이 스친 옆구리가 너덜거렸다. 내장이 삐져나왔고 허벅지에서는 뼈가 드러났다. 루미스는 손으로 매만져 흐르는 출혈량을 가늠했다.


오랜 세월 무뎌졌다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하다못해 목숨을 맞바꾼다는 계획도 수정해야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놈은 성으로 향하지 않고 오로지 루미스에게 집중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 헌진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 헌진과 함께 놈을 쓰러트리더라도, 다시 또 다른 몸으로 부활한다면. 루미스는 그런 가정을 하고 머릿속에서 지웠다. 대처할 수 없는 일은 상상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무너진 벽으로 놈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루미스는 창을 세우고 숨을 죽였다. 냄새를 포착한 짐승이 코를 벌름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가리가 깊숙이 들어오고, 이윽고 놈의 시선을 느꼈을 때, 루미스가 창을 내질렀다.


눈동자에 꽂힌 창끝이 폭발했다. 공기가 산산이 흩어지며 파편이 튀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루미스는 놈의 머리에 올라탔다. 짐승이 괴성을 지르며 고개를 쳐들자 몸이 기울었다. 창을 놈의 머리에 박고 가까스로 버텨냈다.


딱.


세차게 저어대는 머리 위에서, 루미스는 혀를 튕기며 가까스로 짐승의 발톱을 피해냈다. 무게중심을 잡기 어려웠으나 오로지 바람과 소리에 의존해 피해냈다. 몸에 여유가 없으니 루미스는 오로지 패해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결국 매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머리의 중심으로 나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루미스는 결국 다시 짐승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먼지속으로 루미스가 다시 몸을 숨기자 짐승이 포효했다. 놈에게 감정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제법 화가 난 모양이었다.


[루미스.]


나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내면 위치가 노출될 수 있다. 루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볼프람이 그쪽으로 갈 거예요.]


루미스의 입가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결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평범한 허수조차 병사들이 상대해지 못했는데 애꿎은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다.


[미안해요. 말리지 못했어요.]


루미스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미 그녀의 범위에도 일단의 무리가 감지되었다. 상당한 숫자였다. 이제 루미스는 그들을 지키며 허수와 싸워야 한다. 감히 가능성을 계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루미스를 찾아 헤매던 허수의 의식도 그곳에 쏠렸다. 폐허가 된 광장으로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서 보니 더 거대하군.”


볼프람은 짐승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러 줄기로 흩어진 군대가 골목 끝에서 멈추었다. 탁 트인 광장에서 짐승과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대처가 될 리는 없었지만 그것만이 그들의 최선이었다.


“방패를 버려라! 몸을 최대한 가벼이 하라! 놈과 거리를 유지해라!”


볼프람의 명령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루미스의 귀도 볼프람의 명령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두려움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6구역을 지켜왔듯 묵묵히 할 일을 해내고 있다.


“길 좀 비켜봐요!”


병사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볼프람은 귀를 의심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싶었던 나리아의 목소리였다. 소녀는 자그마한 몸으로 용케 병사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오고 옆구리를 제치며 볼프람에게 다가왔다.


“어째서 다시 왔느냐.”


멀리서 멜리시가 나리아를 부르며 기를 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낱 소녀가 도망치는 것조차 어쩌지 못하다니, 볼프람은 멜리시에게 내려줄 벌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번에는 볼프람을 도우러 왔죠.”


나리아의 눈가에는 채 마르지 않은 눈물자국이 보였다. 볼프람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짐승은 루미스를 찾으면서도 군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엇을 먼저 상대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내 루미스를 수색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을 보니 별다른 위협이라고 판단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줘야겠느냐. 활은 다룰 줄 아느냐? 창은?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너보다 훌륭한 병사들이 있다.”

“그럼 내버려둬요. 도움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상관없으니까.”


멜리시가 가까워지자 나리아는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어느 사이로 숨었는지 볼프람도 곧 소녀의 모습을 잡지 못했다. 볼프람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저 아이를 붙잡아 후방으로 빼낼 틈이 없다. 군대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뿐이다. 볼프람은 멜리시에게 나리아를 맡기기로 하고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루미스 경!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고 있소! 저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 그대의 의무라면, 행하시오! 그리고 해내시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할 테니!”


볼프람이 손짓을 했다. 그 신호에 각 부대가 행동을 개시했다. 미리 일러둔 작전은 그렇게 개시되었다. 루미스는 이리저리 흩어지는 인기척에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당신까지 온 겁니까.”


최대한 죽인 목소리에 나리아가 토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 될 거 있어요? 왜요, 루미스까지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거예요?]

“······헌진이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흥! 저는 혼자 자랐거든요?]


어둠속에서 짐승이 루미스를 포착했다. 루미스는 자리를 이동했다. 흙먼지로 몸을 덮었지만 피냄새를 채 감추지 못했다.


[루미스, 방법이 있어요.]


나리아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대신에, 루미스도 저울질을 해야해요. 지금 여기에 있는 병사들의 목숨과, 6구역의 목숨 전체를요.]


루미스는 짐승이 포착할 범위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지나치게 가까워졌으므로 차마 대답하지는 못했다.


[루미스는 이 전장에서 사라져야 해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들을 죽게 두라는 말인가. 루미스는 방금까지 죽게 두지 말라던 나리아의 말을 떠올리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견디세요. 얼마나 죽든, 어떤 비명이 들리든 간에, 루미스는 견뎌야 해요.]

“······나리아.”

[부탁이에요. 볼프람의 결단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저도 견딜 테니까요. 제가 부르기 전까지, 루미스는 결코 나타나면 안돼요.]


나리아가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루미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나리아는 그녀에게 타인의 목숨을 바치는 방법을 강요하고 있었다.


“궁수대!”


장교의 호령에 병사들이 활을 겨누었다. 그들의 화살끝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쏴라!”


불화살이 동시에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짐승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빗살처럼 화살이 내리꽂혔다.


화살 대부분은 튕겨져 떨어졌다. 간신히 꽂힌 화살도 깊숙이 박히지 못했다.


“계속 쏴라!”


짐승이 병사들을 향해 포효했다. 군대는 짐승을 위협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사와의 거듭된 공방으로 신경이 곤두선 짐승에게 그 화살은 도발과 같았다.


“옵니다!”

“흩어져라! 흩어져!”


사방에서 횃불이 허공을 휘저으며 신호를 전달했다. 짐승의 진로방향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골목길이나 건물에 숨어들자 반대방향에서 다시 화살을 쏘아댔다. 사방에서 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자 짐승이 발광하듯 땅을 긁어댔다.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피어올라 광장을 덮었다. 순간 시야에서 짐승이 사라졌다. 볼프람은 눈썹을 치켜떴다.


“놈에게 지성이 있더냐?”


그의 말에 답해줄 수 있는 장교는 없었다.


흙먼지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볼프람은 짐승이 할 일을 직감하고 외쳤다.


“전원 물러서라!”


그러나 볼프람의 명령은 늦게 전달됐다. 짐승이 이미 뛰어오른 뒤였다.


허공으로 떠오른 짐승의 도약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표정이었다.


짐승이 포위망의 한쪽 면을 덮쳤다.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며 굉음이 터졌다. 단 한순간에 벌어진 죽음의 숫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볼프람이었다.


“멍하니 있지 마라! 어서 움직여!”


짐승이 있던 면이 점으로 흩어졌고, 멍하니 서있던 병사들이 활을 쏘았다. 무의미한 저항이다. 짐승이 한 번 구를 때마다 무수한 죽음이 발생했다. 그 무의미함을 견디지 못한 쪽은 루미스였다.


[루미스! 안 돼요!]


루미스가 어둠속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눈앞에서 다시 한 움큼의 생명이 짓뭉개졌다. 그것이 그녀를 조급하게 했다.


머리를 노렸지만 짐승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제쳤다. 창이 목덜미에 박혀 폭발했다. 어둠이 한순간 밝아졌다. 모든 병사들이 그 빛속에서 번뜩이는 루미스를 보았다. 할퀴려드는 발톱을 피해내고, 앞발을 타고 올라가며 길게 베어냈다.


그러나 무색한 공격이었다. 놈은 재생했고 루미스는 거듭 지칠 뿐이었다.


“성급하구나.”


볼프람은 루미스의 발악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짐승의 틈이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루미스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고, 볼프람보다 더 의무에 집착하며 6구역의 생명을 경시했다. 볼프람에게 한낱 병사들의 목숨에 저토록 분노하는 루미스는 낯설었다. 지금껏 그녀의 초조함에게서 눈을 돌린 탓이었다.


“볼프람!”


볼프람이 고개를 들었다. 한 건물의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나리아가 보였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어서 움직여요!”

“하지만 루미스 경이······.”

“루미스는 제가 설득할게요!”


건물속으로 나리아가 다시 사라졌다. 볼프람은 나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할 일은 명확했다.


루미스의 기습 덕분에 병력을 수습할 틈이 생겼다. 볼프람이 장교들을 다그쳤다.


“놈의 시선을 돌려라!”


나리아는 건물을 넘나들며 루미스에게 달려갔다. 지금까지 없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만큼 루미스는 무리하고 있었다.


“루미스 제발요! 당신이 아니면 누가 허수의 숨통을 끊겠어요! 지금 그렇게 싸울 때가 아니에요!”

[죽게 두지 말라던 사람은 당신이었습니다!]


루미스는 드물게도 소리를 질렀다. 나리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감정을 드러낸 루미스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리아의 멱살을 잡은 순간조차 감정을 감추려 노력했던 루미스였다. 그러나 이 싸움이 들춰낸 그녀의 본심은 격렬했다.


“그렇다고 당신이 죽으면 어쩔 거야!”


나리아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당신만이 이 사람들의 희망이라고! 왜 그걸 모르는 건데!”

[지금까지 숱하게 죽게 두었는데, 또 죽게 두라는 겁니까!]

“그래, 맞아! 이런 젠장, 맞다고요! 저도 알아요! 제가 개같은 소리 하고 있다는 거!”


스스로도 혐오 받아야 마땅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리아는 말해야 했다. 그것이 볼프람의 뜻이었고, 6구역을 위한 길이었다. 지금은 그런 정당화는 죄책감에 몸부림치게 만들겠지만,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믿고 싶었다.


“믿으세요! 제발요! 여기서 싸우고 있는 것은 당신 혼자만이 아니에요! 당신은 이제 이 사람들의 수호자가 아니라, 함께 싸우고 있다고요!”


싸움 소리가 그쳤다. 나리아는 불안감에 루미스를 불렀다. 창밖에서 짐승이 루미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루미스?”


어둠 속에서 루미스는 보이지 않았다. 당했나? 나리아는 짓뭉개진 루미스를 최대한 상상하지 않으려 하며 눈을 부릅떴다.


“저들이 제 동료란 말입니까.”


대답은 뒤에서 들렸다. 나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어둠속에서 피에 물든 루미스가 서있었다.


“저는 다시, 동료의 죽음을 견뎌야 합니까.”

“지금은 달라요.”


나리아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당신과 함께 슬퍼할 사람이 있잖아요. 저 말이에요.”


밖에서 병사들이 다시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불화살이 밝힌 그림자 사이로 루미스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기사와 병사의 관계가 아니에요. 동료를 믿어야 해요. 저들이 서로를 믿고 루미스를 믿듯이.”


나리아는 루미스에게 매달렸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루미스의 얼굴을 감쌌다. 나리아는 조심스럽게 피를 닦아주었다.


“저는 어찌 해야 합니까.”


루미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창대가 바닥을 향했다.


“견디는 것도 싸움이에요.”


나리아는 힘겹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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