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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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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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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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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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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1. 기사와 병사 (1)

DUMMY

멜리시 분대는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을 돌며 나아갔다. 그들의 뒷자락에 짐승과 기사의 격한 싸움이 소리로 따라붙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더라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아도 그려지는 그곳의 폭력은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멜리시의 옆구리에 매달려 흔들리던 나리아는 침묵했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것도 잠시였다. 혼자 루미스 곁에 있더라도 방해가 될 뿐이다. 나리아는 무력하고, 도움이 될 리 없으며,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멈춰라!”


순간 횃불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멜리시는 눈이 부셔 손으로 앞을 가렸다. 위협적인 창칼이 불빛에 번뜩였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아군이다! 6구역 소속 멜리시 분대다!”

“멜리시?”


그의 얼굴을 알아본 병사들이 무기를 거두었다. 전선에서 후퇴 중인 부대였다. 누구 하나 성한 자가 없었다. 모두 다쳤거나 지독히 피로한 몰골이었다. 그들을 헤치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멜리시의 얼굴에 안도감이 맴돌았다.


“볼프람 장군님, 무사하셨습니까.”

“여기서 뭘 하는 게냐, 멜리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해 후퇴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후방 부대의 수습은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후퇴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멜리시가 옆구리에 매달고 있는 나리아를 흘깃 보았다. 소녀에게 홀려 기사의 전장에 스스로 발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명령에 불복했다고 추궁당한들 부정하지 못한다.


볼프람도 뒤늦게 소녀를 깨닫고 다가왔다.


“아랫구역의 기사와 함께 있던 아이로구나.”


멜리시가 내려놓자 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언뜻 반감이 깃든 눈빛이었다. 사실 나리아는 볼프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루미스를 배척했고, 사냥에나 이용하는 도구로 취급했다. 둘 사이의 잘잘못을 가리기는 힘들었지만, 볼프람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왜 성을 나왔느냐.”

“루미스를 도우러요.”

“돕는다고? 네가?”


나리아는 볼프람이 비웃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손을 들어 나리아의 머리에 얹을 뿐이었다.


“애썼구나.”


생각보다 따스한 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리아는 난데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상처를 치료해줘라.”


볼프람이 뒤편을 향해 고갯짓했다. 의무병이 달려와 나리아의 무릎에 소독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나리아는 의식하지도 못했던 상처였다. 무너지는 건물 사이에서 뛰고 구르느라 생긴 상처일 것이다. 뒤늦게 의식하자 새삼스러운 고통이 느껴졌다. 나리아는 표정을 찡그리며 의무병에게 무릎을 맡겼다.


“멜리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라.”


본대가 짧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멜리시는 설명했다. 후퇴명령을 전달하고 물러나던 도중에 나리아를 만났고, 그녀를 따라 루미스를 도왔다는 내용의 간략한 사실뿐이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기에 덧붙이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더냐.”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기사의 싸움에 대해 논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한 말에 볼프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볼프람은 먼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루미스가 있을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날뛰었고 불꽃이 번뜩였다.


“질 거예요.”


나리아의 말이었다. 볼프람이 고개를 돌렸다. 나리아는 꼼꼼하게 묶인 붕대를 내려다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지지 않더라도, 루미스는 죽을 거예요.”

“무슨 소리냐.”


볼프람이 나리아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높낮이를 맞춘 시선에도 나리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사를 대하지 않을 때 볼프람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나리아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는 바를 말하라.”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에 나리아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루미스는, 이기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끝까지 싸울 거라고도 했어요. 수가 아예 없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만, 루미스는 지금 감각 일부를 차단한 상태라서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요. 화살을 주변에 쏴서 시야를 밝혀줘야 해요. 상처도 심각하고,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루미스 경이 말한 그 수란 무엇이냐.”


횡설수설하던 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볼프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리아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리아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해서는 안 된다. 생각해보면 이 지점에서 볼프람과 마주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성으로 후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이곳이 아니다. 나리아의 머릿속에 든 지도가 알려주었다. 효율적인 경로였다면 전장을 우회해 물러나려는 멜리시와는 한참 후에 만나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리아는 볼프람의 의지를 엿보았다.


“꼬마야, 나에게는 시간이 있다. 반나절간 싸운 병사들도 휴식을 취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루미스 경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있겠느냐?”

“······그곳으로, 갈 셈이군요.”

“여긴 우리 구역이다. 가지 못할 이유도, 장소도 없다.”


말려야 한다. 나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미스에게 지원은 무용하다. 아무리 몰려간들 벌레처럼 짓밟힐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했다. 이들이 숱한 목숨을 바쳐 루미스에게 단 한 순간의 시간이라도 벌어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일지도 모른다.


“가면 안 돼요. 다 죽을 거예요.”

“루미스 경은 죽어도 된단 말이냐?”

“하지만, 루미스는 한 명이고, 당신들은 많잖아요. 루미스가 자기를 희생해서 짐승을 쓰러트린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나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나리아는 말 끝에 울음이 딸려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목숨을 저울질하고 있다.


7구역에서도 그랬다. 나리아는 밤까마귀단을 바쳐 헌진을 구하고자 했다. 그때는 헌진을 믿고 끝까지 자신을 다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죽음으로 향하라는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 한다. 루미스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니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 나리아는 루미스를 살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러나, 하지만.


나리아의 머릿속에서 앞말을 뒤집으려는 부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나리아가 말하지 않아도 볼프람은 루미스에게 가서 짓밟힐 것이다. 그의 질문에 답하더라도 단순한 지침에 불과하다.


“꼬마야, 누구를 위해 우는 게냐. 우리냐, 루미스 경이냐.”

“루미스를 죽게 둘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당신들을 죽게 둘 수는 없어요.”

“우리도 그렇다.”


볼프람은 얼핏 미소를 지었다. 자상한 얼굴이었다. 군인이 아닐 때의 얼굴일 것이다. 나리아는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저 짐승을 쓰러트려야 우리가 산다면, 우리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볼프람에게는 각오도, 체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그것이 그의 행동원리라는 것을 나리아는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기사란 작자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저 관망할 뿐이지. 이 전쟁이 이변이 됐을 때조차 말이다. 우리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한 짐승을 손쉽게 사냥하는 모습을 볼 때면 배신감마저 느꼈다. 알겠느냐? 기사 앞에서는 모든 게 우스워진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사조차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짐승이 나타나다니.”


볼프람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우리는 우습지 않을 수 있겠구나.”


부관 한 명이 다가왔다. 볼프람은 다시 일어섰다.


“부상자는 솎아냈느냐.”

“예, 장군님. 제법 떼를 쓰는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 쉬는 시간 없이 나아갈 것이다.”

“다들 숙지하고 있습니다.”


볼프람에게는 그저 병사들을 쉬게 하고 부상자들을 걸러낼 시간이 필요했다. 나리아는 자신의 고집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상자들이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는 길을 크게 돌아 성으로 귀환할 것이다. 몸이 성한 자들만이 자리에 남았다. 개중에는 결코 멀쩡해 보이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만, 만류하는 동료들을 뿌리치며 애써 서있으려 했다.


“가자꾸나.”


볼프람이 손짓했다. 다시 광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나리아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 멜리시는 의아한 표정이었다가, 볼프람이 거대 짐승을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꼬마야, 이제는 집정관으로서 묻겠다. 전황이 어떻더냐.”


반쯤 뛰다시피 볼프람을 따라가며 나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다. 의지로 나아가며, 창칼을 세울 것을 택했다. 요동치는 파멸의 물결 속에서 그들은 있을 곳을 정했다. 그들에게 죄책감을 지녀봤자 모욕일 뿐이다.


나리아는 짧은 망설임을 다잡았다.


“루미스는······루미스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허수, 아니 짐승의 머리위에서 창을 박아넣을 시간이요. 세 번의 폭발을 일으킬 시간만 주어진다면, 쓰러트릴 수도 있을 거라고요.”

“너는 어떻게 보느냐. 가능할 것 같으냐?”


볼프람이 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한낱 소녀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볼프람은 진지하게 나리아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타당했다. 기사가 데리고 다닌다면 소녀라고 한들 평범할 리가 없다. 당당히 기사를 도우려 했다는 말이 그 태도를 확실하게 했다.


“루미스에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 시간을 벌어다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겠군.”

“······.”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


볼프람이 나리아의 머리를 두들겼다.


“6구역의 병사는 울지 않는다. 울음은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전사자를 추모할 때만 소리없는 눈물이 허용되지. 아니면 설마, 벌써 우리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게냐?”


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됐다. 기사가 기사의 전투를 치르고, 너도 너만의 전투를 치르듯, 우리도 우리의 전투를 치를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세상의 이치다.”


서서히 길이 넓어지며 광장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전투의 굉음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멜리시!”


볼프람의 호명에 멜리시가 앞으로 나섰다.


“명령을 마저 수행해라. 이 꼬마를 데리고 성으로 후퇴하도록.”

“예, 장군.”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멜리시가 나리아를 안아들었다. 볼프람은 역시 나리아를 전장에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리아는 자신의 무력함을 곱씹었다.


“볼프람!”


나리아는 빠르게 멀어지는 너머로 소리를 질렀다.


“루미스를 살려야 6구역이 사는 게 아니에요! 당신들도 살아야 6구역도 사는 거예요!”


볼프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말은 충분히 닿을 것이다. 나리아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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