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주변의 급류에 휘말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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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이 들어가기 전에 이전부터 열심히 시행하였던 헌법의 초고들을 검토하고 조합해서 나온 헌법, 대조선국 대헌률 혹은 대조선국 대헌전의 중간본이 나왔다. 물론 중추원의 소임을 더 규정하고 공식화했다. 아울러서 조정의 관제 개편도 반영하여서 수정했다.
이 헌법은 서양 국가들의 헌법이라는 제도를 보고 참조해서 만들었다. 물론 영국보다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헌법과 현행 프랑스 제국의 헌법, 프로이센 쪽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 이전에 다른 하위 신 법전들도 대체로 완성되는 추세를 보였다.
정확히는 다 완성된 일은 아니다. 아직 더 정비하고 개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조선인들이 노력해서 만든 신법전은 의의가 있었다.
이전부터 조선인들과 조선 조정은 법을 만들기를 좋아했다. 이 새로운 법전들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조선인들이 외국인, 유럽과 미국의 법률고문들을 통해서 조언을 받고 참조한 법전들이 있을지언정, 그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법이다. 동아시아와 유럽의 개념이 섞인 새로운 법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 법들이 조선의 실정에 최대한 맞게 발휘되고, 더 변화하고 보강되면 조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가 있다고 조선의 위정자들이 생각한다. 물론 이 법 등을 통해서 조선을 더욱 더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그렇기도 하다.
“새로운 대전이 시행되는데, 우리 조선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일은 뚜껑을 열어보고 임하면 될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겠지요? 너무 앞서서 우려하는 일일까 했습니다.”
물론 이 새로운 대전, 헌법대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서양의 성문 헌법을 참조해서 조선의 상황에 맞게 만든 이 대헌전이 제대로 적용할 수가 있을까 걱정은 많았다. 그런데도 대헌전의 발효는 매우 큰 호평을 받았다. 다만 헌법에서 규정한 태왕의 권한은 대체로 강한 편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시대적인 한계를 고려해야 했다. 물론 태왕 이영은 이전에 협의 한 대로, 최종결정권 등의 부분에서 권한을 행사하고 중추원 등의 의회에 개회 선언 등이며 의미가 깊은 의전적인 국사 행위, 큰 그림을 그리는 부분을 중시하는 쪽으로 물러났다.
이건 사실 태왕인 이영, 그가 공민이라고 정의하는 자신의 나라인 조선을 구성하는 백성에 관해서 민주주의를 긍정해서는 아니다. 이영이 배웠기를 정학, 유학 혹은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민본을 인정하는 경향 정도였기에 그렇다. 게다가 조선의 엘리트인 자들도 그런 자신들의 군주인 이영처럼 민본을 인정해도 민주주의라는 경향은 좀 낯설다.
다만, 이런 방향성도 군자가 된 백성들이 논의하고 소통하면서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서 나라와 각 고을의 통치에 민의를 듣고 시행한다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중추원의 권한을 더 공인하고 고관의 천거를 할 수가 있게 조정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개혁이, 이전에 합의했던 약조에 따라서 시행되었다. 대조선국 예전 혹은 대조선 국조오례의에서도 서양식 복색에 대한 예의 규정을 완성하여서 1870년, 이영의 연호인 광명을 선포한 지, 13년이 되는 해에 시행되었다. 그 외에도 군대의 일부 재편도 온전하게 적용되었다.
1870년대의 조선은 매우 다양한 범위의 경장과 변화를 받아들인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서양식 문무관복을 기존의 단령과 함께하여 사용함을 허락했다. 지금 조선의 법궁인 창덕궁의 정전에는 조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서 서양식 문무관복과 단령이 섞여 있다.
“태왕 폐하 납시오!”
조회의 고관들이 기다린 남자, 대조선국의 태왕인 남자, 이영은 이제 60대로 손자가 여럿이 있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그는 곧 다른 좋은 소식을 들을 예정이다.
“태왕 폐하의 경사에 축하드리옵니다.”
“축하드리옵니다. 폐하!”
이영은 얼마 있으면 증손을 볼 예정이다. 기왕이면 아들이 좋겠지만, 증손녀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신료가 이영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있다.
“아이가 잘 태어나기를 나도 바라오. 나의 증손이 잘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소.”
“예! 폐하!”
“아국의 근방이 대체로 평화로웠다. 그런데도 우리는 청나라의 변화를 확인하면서 큰 우려를 하고 있다.
우리 조선은 청나라가 먼저 아국을 공격하고 도발하지 않는다면 청나라를 그냥 둘 셈이다. 우리 조선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기도 벅차지 아니한가?”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 왜국도 우리 조선하고 되도록 화평하려고 합니다. 어느 정신이 나간 자들이 아닌 이상은 말이지요.”
지난 2년 동안의 시간에서 조선은 심각한 충돌이 없었다. 일본하고도 무기 밀매 관련으로 인한 갈등이 잘 봉합되었다. 게이오 덴노와 새로운 일본 조정은 타협에 수긍했다.
적당히 조선이 사과하고 피해자들에게 지불한다는 은자 몇만 냥으로 적당하게 타협했다. 대신 일본은 자국민이 조선의 개항장에서 무기 밀매를 하지 않게 더 단속하기로 했으며, 무기 밀매 시도를 사과했다. 영국도 이런 일에 협조하는 식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청나라는 서북 변경의 신장 자치령 일대를 다시 수복하려고 했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야쿱 벡의 폭정으로 역시나 서북이 어지러워지는 중인데 그러면서도 세폐 등은 잘 내었다. 야쿱 벡은 정보를 최대한 은폐해서 자신의 폭정을 가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은폐는 러시아에는 안 통했다. 청나라보다 먼저 개입해서 야쿱 벡이 통치하는 지역을 집어삼킬 생각이다. 이런 내막을 조선과 영국에게 가리기 위해서 조선 방면은 철저하게 유화적으로 움직였다.
“근데 일본과 아라사 사이에 다른 섬을 놓고 갈등 아닌 갈등을 겪는다면서요?”
“물론 일본도 북해도라고 해서 북이라고도 칭하는 모인들의 땅을 개척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그 너머의 섬은 무리하게 삼킬 생각이 없다고 압니다.”
“아라사에게 다른 큰 섬이 넘어가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듯이 굴고 있습니다.”
다른 경우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사할린이라는 섬이 변수였다. 물론 이 경우는 일본도 러시아도 딱히 그 섬을 놓고 치열하게 싸울 생각은 없다. 서로가 원하는 영토를 가지려고 협상을 할 수가 있다.
조선과 영국은 사할린이라는 섬이 러시아에 넘어갈 경우의 이해득실을 매우 따졌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러시아에 넘어가도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잘 넘어갔다.
“북해도의 개척에 우리 조선이 끼어드는 일은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어! 유감스럽게도 일본이 우리를 그렇게 끼워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조선은 본토와 신지, 유구 등이 더 먼저라고 봐야 하지요.”
“흠. 유감이군요. 아쉽지만, 그 말대로 우선이 되는 투자처들이 있으니까요.”
“나도 유감이라고 본다네. 다만 경들이 이야기를 한 대로! 우리 조선의 땅과 유구의 땅이 우선이 옳다.
그리고 올해부터 새로운 학제를 완연하게 적용한다. 이에 대해서 경들은 견해가 어떠한가?”
교육제도는 더 확실하게 정해졌다. 유럽에서 가져온 교육 제도를 기반으로 형성한 편이다. 전통의 서당과 향교, 서원도 새로운 교육제도에 통합되거나 보조로 기능시키고 있다. 사실 서당을 일종의 늦깎이 학도를 가르치는데도 써먹을 생각도 있다.
고등학교는 여러 논쟁 끝에서 대학 예과와 별개의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관립 단과대학교가 없는 곳에서 고등학교에 전문부를 설치해서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업들을 육성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는 그런 상황을 인정받아서 실질적으로는 고등학교는 대학교 예과 기능을 수행하고, 다양한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물론 학제는 나중에 가면 더 변경될 수가 있는 여지는 열어놓았다.
사실 고등학교에 전문부 등을 넣는 이유는 조선이 아직 대학교, 종합대학교와 관립 단과대학교가 존재하지 않는 도가 훨씬 많아서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종합대학교와 관립 단과대학교가 한성부와 경기도에만 존재하니까 이렇다.
“학제를 완성했어도 문제가 있습니다. 폐하! 그 이유는! 학교가 적지 않습니까? 더 늘려야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조선은 새 시대에 맞는 인재들을 더 널리! 많이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라도 학교들은 더욱 늘어나야 함이 마땅합니다.”
“경들의 의견에 나도 동감하오. 총리대신?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예, 폐하! 이전에 말씀을 올린 대로 의정부에서 기획한 학교 확충 계획을 수행하면서 나아갈 예정입니다. 예부상서와 의정부가 열심히 집행하겠습니다.”
앞으로 조선 조정은 팔도에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하려고 노력할 예정이다. 소학교와 중학교도 더 널리 개설해야 했다. 조선 최초의 고등학교는 왕실의 종친과 고관, 한성부의 인재들을 위해서 세워졌다. 대학교 예과? 이 또 한 조선 최초의 서양식 종합대학인 한성대학교에 설치가 되었다.
성균관에도 대학교 예과가 세워졌다. 물론 성균관 자체는 대학교에 가까울 수가 있지만, 좀 다른 경향이었다. 프랑스의 그 ‘콜레주’, 콜레주 드 프랑스에 가깝게 개편된 경향이다. 또 성균관에서 고급 관료에 대한 인문학적 연수를 해주는 곳으로도 기능시킨다.
사실 주로 대부분의 고등교육기관은 한성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개선이 필요한 일이다. 조선 조정도 이를 인지하고 개선할 생각이라서 다행이다.
그와 별개로 한성부는 또 조선의 새로운 대읍, 도시 계획의 처음 적용을 받아서 재편되었다. 또 한성부 판윤으로 흥선백 이하응이 하던 일을 이어받은 귤산 이유원이 열심히 그 계획을 이어가면서 한성부는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이는 한성에 거주하는 외국인 고문 등도 잘 인지하고 있다.
“그대가 총리대신이 된 일은 아주 감회가 새롭구려. 금성백.”
“아닙니다. 사실 저보다는 전임 영상이시던 파광백이 더 총리대신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영상의 자리에서 사임할 줄은 몰랐습니다.”
윤종의의 뒤를 이어서 영의정, 관제를 개편하면서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른 남자는 금성백이라는 백작 작위를 수여 받은 환재 박규수다. 이전에 돌던 소문과 이야기대로 그가 정말로 재상 중의 재상 자리에 올랐다. 그 사이에 삼정승은 2명의 재상, 총리대신과 부총리대신으로 재편이 되었다.
상서는 대신으로 개칭되었지만, 상서라고도 종종 쓰일 예정이다. 의정부의 집정, 혹은 의정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환재 박규수는 감회가 새로웠다. 다만 파광백, 백작 작위를 받은 윤종의가 자신보다 유능한 선배임을 알기에 그가 총리대신이었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윤종의는 다른 곳에서 일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60대 중반의 이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은 정력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대조선국 최초의 총리대신이 될 지를 놓고 인사권자인 태왕 이영도 많은 고심을 했노라고 자신의 벗이기도 한 남자, 환재 박규수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대신 궁부상서, 궁부대신로서 더 중히 쓸 생각이오. 물론 그대와 파광백 중에서 누가 더 총리대신의 자리에 적합한지를 놓고 고민을 했었소. 파광백도 매우 유능한 사람이니까 말이요.
영의정인 그를 유임시켜서 그를 신뢰한다는 모습을 보여줄까? 아니면 경을 올려서 더 원활한 통치를 이어갈까 고심했습니다. 경. 그리고 그대가 그 자리에 오른 일은 파광백이 그대를 추천하고 자신이 물러나기를 원했기에 그리하였소.
오히려 그는 군국기무처로 가고 싶어 했는데 내가 말려서 잠깐 궁부대신으로 보냈다오. 물론 그가 진정으로 원하면 군국기무처의 제조로 그를 임명할 생각이외다.”
“예. 폐하.”
“그러하옵니까?”
“그런 내막은 신들도 잘 몰랐습니다.”
이 말은 사실 조회 중에서 한 말이었기에 궁부대신이 된 파광백 윤종의와 총리대신 박규수에게 시선이 몰린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다. 태왕인 이영의 총신이 아니라도 능력이 출중하여서 영의정에도 오른 남자가 윤종의인데 더 오래 그런 자리에 집권하고 싶다는 마음을 비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더욱이 총리대신의 자리는 이전의 영의정과 비교하면 더 강한 권한을 가졌다. 원래 영의정은 권위가 더 강하고 삼정승 중에서 실무와 실권을 쥔 좌의정과 우의정에 밀려서 조정의 백관을 대표하는 자리라는 상징성이 큰 자리다.
영의정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재편되는 관제에 따라서 총리대신의 자리에 취임하면 상당한 권력자, 태왕 외의 왕실을 제외하고 진정한 조선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연재 윤종의는 사양하였다.
물론 파광백 윤종의가 어리석어서 그런 선택을 했을 리는 없다. 총리대신이 할 일보다 더 관심이 가는 일이 군국기무처의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상사인 태왕 이영에게 총리대신으로 임명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한 이유도 군국기무처의 제조 같은 고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서 그랬다.
게다가 윤종의가 보기에도 자신은 다른 쪽의 일을 맡아도 태왕 이영의 총신 집단과 총신 집단이 아니라도 능력을 인정받아서 중용받는 이들은 많았다. 의정부에서도 환재 박규수를 비롯해서 고인이 된 지 좀 시간이 흐른 추사 김정희의 제자 중 하나로 예부상서, 이제는 학부대신인 이상적은 물론이고, 전 영의정 이시원의 동생으로 이번에 부총리대신이 된 이지원 등이 있다.
‘내가 굳이 의정부에 없어도 활동할 관청 등은 많은 법이다. 중추원과 군국기무처 중에서 후자가 더 끌리고 있을 뿐. 태왕 폐하시라면 나를 필요하면 중추원에도 넣으실 분이 아닌가?’
그들 외에도 김병국, 김병기도 있고 중추원에 파견된 이들도 있으며, 군국기무처는 정대림, 정대무 등의 인재가 있었다. 궁부대신으로 시간을 보내도 좋지만, 군국기무처에서 나라의 미래를 위한 경장에 관한 제안서를 쓰고 건의하는 일이 윤종의한테는 더 유익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궁부의 정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고 여기기에 그 동안은 그 일을 하고 군국기무처에 합류할 생각이 만만이었다. 윤종의, 그의 기행과 본심을 안다면 이해가 되는 행보였다. 이런 자세한 내막, 그의 본심을 잘 모르는 이들은 윤종의를 권력에 관심 없는 남자라서 동경하든가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 시선을 윤종의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을 듯하다. 사실 그는 남의 시선을 그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살아온 존재는 아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결정한 일도 있다.
총리대신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영예과 권한? 윤종의도 솔직하게 혹했었다. 그런데도 사양한 이유는 너무 많은 일과 더불어서,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책임감은 그에게는 조정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환재 박규수가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책임감에 의지가 더 강한 사람이 맡아야 함이 옳다. 게다가 나는 군국기무처에서 가배다 혹은 가배차! 이를 조선에 널리 보급하게 건의하겠어.’
물론 윤종의가 결코 자신이 긍정하고, 좋아하는 가배다. 즉 커피를 널리 조선에 퍼트리려고 군국기무처에 가는 일은 아니다.
나중에 커피를 수입하고 조선의 내부에 많은 이들이 자주 즐기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 그의 본심을 알면 커피 때문에 군국기무처의 고관이 되고 싶은 사람이 차기 총리대신 후보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리라.
윤종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조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직 조선은 더 갈 길이 멀기는 하였다. 조회가 끝난 이후에는 중추원, 의정부, 궁부, 군국기무처 등 각자의 관아로 가서 할 일을 이행하러 간다.
“대감, 잠깐 시간이 됩니까?”
“무슨 일이요? 총리대신?”
“잠깐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대조선국의 초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른 환재 박규수가 궁부대신인 윤종의를 불러 세웠다. 잠깐의 대화를 하려는 듯이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할지는 윤종의도 짐작 가는 구석이 있다.
‘내가 양보한 일이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요? 아니면 마음에 걸리는 일이요?’
물론 윤종의가 아는 환재 박규수라는 인사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후자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와의 대화를 한다면 윤종의는 왜 자신이 그를 추천하고 자신이 총리대신의 자리에 적법하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잘 밝힐 생각이다.
‘내가 총리대신이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궁부와 군국기무처의 일에 집중하고 싶군. 솔직하게 생각해서 굳이 총리대신을 하고 싶은 생각은 나중에 들지 않을 텐데 말이야.
아, 가배차를 마시고 싶군. 태왕 폐하한테도 이 가배차의 매력을 더 전해드려야 하는데.’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도 환재 박규수를 따라서 정전을 나와서 조금 으슥한 곳으로 간다. 둘 다 60대의 노신인데 냉랭한 분위기는 아니다. 한 쪽만 무언가 긴장한 모습이고, 다른 쪽은 평정을 유지한 모습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격노하는 모습은 없다. 차분하면서도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는 윤종의의 대답을 듣는 환재 박규수는 그 말이 진심이냐는 표정을 꽤 지었다. 둘 사이의 오해는 풀렸다.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요. 조아라에서도 연재중입니다. 거기에는 HMS 아론다이트란 이름으로 연재를 합니다.
- 작가의말
1870년대에 들어갔습니다. 조선은 더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이영이 증손주를 볼 예정입니다.
그 사이에 윤종의와 박규수의 대화는 다음편에 더 자세하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언급한 변화들은 많은 떡밥의 회수, 혹은 다른 떡밥입니다. 토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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