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더 변화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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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은 조선의 불교도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해였다. 결국은 조선 조정도 그들의 통합에 대한 최소 후원과 서방의 신교, 서방에서 들어온 종교 종파들과 동등한 대우를 허락했다.
그 대신에 투전판을 제외한 경마장의 개설을 더 허락하였다. 사실 이 경마장 말고도 다른 방식의 유희를 위한 장소, 서양식 투전판이라고 할 수가 있는 카지노에 대한 논의가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반대하는 의견이 조정과 조선의 의회인 중추원에는 강했다.
물론 카지노를 조선에 개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유럽의 부호이며 유럽에 자신의 카지노 제국을 세울 욕망을 가진 모리스 블랑은 그 소식을 아직 미처 듣지 못했다. 알았어도 유럽에 자신이 운영하는 카지노들을 더 세운다고 조선은 다음일 것이다.
사찰이 유원지같이 쓰임을 제한함을 확답받은 조선의 불교 스님들은 이에 대해서 명목상 남은, 교종과 선종을 통합한 조선원종을 출범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선불도유신을 운운하면서, 조선 불교의 재정립을 시도했다.
반발하는 이들은 만화 보선과 백장스님이 규합한 세력에게 무너졌다. 사실 반대하는 이들도 승려인 척하는 사기꾼, 무당들이었다. 이즈음에 그 유명한 지관, 정만인도 승려인 척하는 것을 완전하게 포기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우리가 살 구석은 보장해라.”
“승려를 사칭하면서 난리를 치던 자들이 대체!”
“참으로 뻔뻔하구나. 너희들이 계속 난리를 친다면 관에 넘기겠다.”
물론 대세를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야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조선불교 원종은 그런 이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일축했다. 최대한 폭력을 덜 쓰고 관으로 넘기든지, 신고했다.
그 신고에 따라서 혹세무민하는 자들은 경찰의 조사를 받고 순회판법관, 즉 순회판사들에게 재판을 받았다. 증거법주의에 따라서 과중처벌 등은 피했지만, 대체로 그동안의 사기 행각들로 인해서 유형소, 즉 유형을 대체하는 감옥으로 보내졌다.
죄질이 더욱 불량한 자는 신지 요동에 세운 감옥으로 보내질 것이다. 다른 이들은 평양과 대구 외곽에 있는 감옥에서 노동하면서 교화를 당할 것으로 보였다.
조직을 어느 정도 재편하자, 만화보선은 백장 스님과 자신의 제자 중 경허에 일부를 따라가게 한다. 불교 신자와 지원한 다른 스님들과 함께 요동 개척의 일원을 보낼 것이다.
“스승님. 건강히 지내십시오.”
“내 걱정 말아라. 요동 개척을 민초와 함께하는데 일신을 잘 유의하고 움직여라. 백장 스님을 곁에서 잘 보좌하고.”
“알겠습니다.”
만화 보선은 다 컸지만, 아직 자신의 눈에는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제자를 걱정한다. 그런 시선을 받은 제자, 경허 스님은 최대한 스승인 만화보선의 걱정을 덜어 주려고 노력한다.
그런 제자를 보면서 만화 보선은 자신의 제자인 경허는 큰 스님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불교 개척단도 다른 마을 단위의 개척단과 합류해서 나아갈 것이다. 1866년 겨울이 끝날 무렵에 조선 팔도 각지의 개척단이 떠나서 내년 봄이 되는 즈음에 신지 요동에 도착했다.
주로 고구려주와 발해주로 이주했다. 저 너머의 요동주, 부여주와 흑수주, 솔빈주로는 여름 즈음이나 가을에 이동해야 했다. 한족이 많은 요동주에서도 조선에 저항하는 자들을 추방하고 있기에 조선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편이다.
그래도 고구려주와 발해주, 부여주, 흑수주, 솔빈주 등 전자 2곳에 조선인 이주자들의 수는 늘었다. 후자 3주도 이주 장려 등을 받아서 늘고 있었다.
특히나 솔빈주는 영명부라는 꽤 좋은 포구, 항구가 있기에 나무꾼과 어부들이 잘 모였다. 또 항구이기에 노무자들도 꽤 모이고 근방의 광산들도 발견되어서 광부들도 모였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곳은 돈을 벌기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경허.”
“네, 백장 스님.”
“노동하면서 수양하는 것이 최선. 밤에는 자기 전에 경전을 보면서 자신을 더 수행하고 다듬는 일이요.”
하지만 불교 개척단은 백장 선사의 <<노동불도론>>에 입각해서 당장은 그런 일들보다는 농사 쪽으로 갈 생각이다. 그래서 고구려주의 압록강 너머 근처에 자리 잡았다.
황무지들이 많다. 그래도 같은 장소로 이주하기로 한 다른 마을, 충청도의 어디 마을에서 왔다는 이들과 함께 개척촌을 차리기 시작했다. 마을 단위에서 분리 독립한 이들과 함께 마을을 개척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다고 백장 스님과 경허 스님이 생각한다.
“근데, 왜 스님들이 산 아래에서 우리와 같이 농사를 짓는다고요?”
“그거 특이한 스님들일세.”
“맞아. 저기 스님인지 무당인지 하는 사람들은 아니죠?”
물론 그들을 진짜 스님인가 의심하는 마을 단위의 개척단도 당연히 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 맞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통 만나던 ‘스님’이란 존재는 스님인 척하는 무당들이거나 스님인 척하는 부랑자들이 주로 많아서 그렇다. 종종 다른 스님을 만나도, 그런 스님들도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을 만나다가 제대로 된 스님들을 만나는 것은 거의 처음인 셈이었다. 그렇기에 백장 스님과 경허 스님 등은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이야 한다.
그렇기에 행실 등을 당연하게도 조심하면서도 백성하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경허 스님에게 있다. 백장 스님은 어떤지 몰라도, 바른 생활 및 여러 가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경허 스님은 기대한다.
그렇게 이 공동 개척촌의 이야기가 밝아 오고 있었다. 경허 스님은 백장 스님 밑에서 같이 생활하기도 하면서, 다른 노동들도 배웠다. 또한 산속에 사는 스님이기에 나무를 베고 장작을 만드는 일도 안다.
“아이고, 스님! 감사드립니다. 장작을 패주시다니요.”
“아닙니다.”
“스님. 감사드립니다.”
사냥꾼이 가장인 집에서 경허 스님은 가끔 나무를 대신 패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냥꾼인 가장은 가끔 아내에게 이야기해서 경허 스님에게 사례를 주었다. 주로 곡식이지만, 좋은 사례였다.
물론 경허 스님은 처음이야 사양했다. 그런 목적으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실례에서 가끔씩만 받았다.
나중에 포수는 말린 고기를 선물로 주고 싶어 했는데, 교리를 어렴풋이 듣고는 가족이 먹으려고 만든 것인데, 남아서 준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런 시주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경허 스님이 고민할 정도였다.
‘그때는 정말 난감했지.’
백장 스님은 그 소식을 듣고 시주를 받아들였다. 일각에서는 이걸로 많은 설왕설래가 오갔을 정도였다. 그런 것을 알고 마을의 승려들을 모아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육포 정도는 먹어도 된다네.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먹으려고 만들었다가 남을 것을 시주를 준 것이다.
원래에서는 불도를 구하는 구도자들은 시주를 받아서 먹었다. 노동한 대가로 바로 잡은 고기를 받는 것 등이 아니라면 문제가 없다. 다만 되도록 곡식을 받는 것이 좋은 일이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고기이지 않습니까? 좀 마음에 걸리는 일입니다.”
한 승려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백장 스님은 그가 독파한 깨달음과 함께 교리를 열심히 말해 주었다.
“불경들을 제대로 읽어봤다면 알 것이다. 석가본존불께서는 타락죽을 드셨고, 석가본존불과 그 제자들은 시주받은 모든 음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물론 오신채 같은 것은 많은 냄새를 주고, 사람을 방해한다. 고기는 우리가 그들을 잡아서 먹는 일이 아닌 이상은 문제가 없다.
우리가 고기를 먹고 싶어서 살생해달라고 요구를 했느냐? 생고기를 먹기 위해서, 그걸 바라고 노동한 것이 아니면 된다. 살생을 꺼리기에 최대한 도축에 연관한 것을 줄인 것이지.
어린 동자승과 병자인 스님들은 몸을 보하는 약으로 먹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원종을 창건할 때에 많은 승려가 교리를 통합하는 중에 나온 결론이다.
그러니 안심하여라.”
교리, 조선불교 원종이 토의를 통해서 도출하여 합의로 정한 교리 중 육식에 대한 부분이 그러했다. 또 불경에서의 일화 등을 꺼내어 준다. 불교의 승려와 신도들이 육식을 꺼리게 된 이유의 본질을 알려준다.
스스로 살생하지 않는, 아니면 자제하려면 자신들이 요구하지 않는 시주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중원 위진남북조 시대에 양나라에서 한 황제가 불교를 이상하게 믿어서 달라진 것도 있었다. 그렇게 생긴 것으로 최대한 육식을 자제하게 된 것이다.
탁발 시주를 많이 받지 않게 되므로, 승려들이 고기를 먹으려면 대체로 살생이 일어나게 되어 버리니까 그렇다. 이게 극단화가 된다면 모든 이들에게 축생, 짐승에 대한 살생을 금지함을 강요하게 된다.
그런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중용은 필요하기에 이런저런 토의를 거쳐서 육식에 대한 교리를 정리했었다. 그런 말에 대해서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였기에 대체로 의문이 풀린 것으로 보인다.
“네. 스님!”
“알겠습니다.”
“그럼 모두! 할 일을 하시오.”
“네.”
임시로 만들어진 평지의 사찰은 아주 오랜만에 등장했다고 볼 수도 있다. 감회가 새로웠다. 다만 백장 스님은 복잡한 마음도 들었다.
‘교리와 현실의 충돌은 참 쓰다. 승병에 대한 것은 결국 해소가 되지 못했다. 많은 불이익이 줄었어도, 승병은 남아 있다.’
살생을 금지한다는 계율과 모순되게도, 삼국시대에선 승려들이 살생의 모략 등을 짜고, 전쟁과 왕권을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 또 전조인 고려에서도 승병들은 존재했다. 항마군 등의 이름으로 말이다.
살생을 자제한다는 것,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마귀를 상대한다고 호도했었다. 지금의 왕조인 조선도 승병을 운용하고 있다. 조선에서 승병의 해소는 그들을 군인으로 정식으로 속하기를 원한다면, 군인이 되고 아닌 이들은 바뀌었다.
그런데도 승병이 좀 남았다. 백장 스님은 승병이란 조직을 통해서 조선 조정이 원종을 통제하는 다른 선을 남겨 두었다고 여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어느 정도 그들에게 목줄이 매인 상태이기는 하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목줄이라고 봐야 하는 법. 그들이 전조인 고려와 국초처럼 국사 같은 것을 둘리는 없다.
정학과 동학에도 조정의 영향력이 있는 판에 우리 불도의 불자들은 이미 지방에서도 지방 향반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직접의 영향력이 아닌 간접을 생각하면···.
팔도도총섭 같은 승병에 대한 자리도 원래 있던 자리다. 그걸 명예직 혹은 원종과 조정을 잇는 다리로써 기능시키겠다고 봐야겠지.’
이런 고심을 하게 되는 이유도 있다. 관에 더 종속되는 불교 종파가 조선 불교의 현실이다. 이를 넘어선 모든 신교, 종교도 관에 종속되는 일이 옳고 그른가의 고뇌도 있다.
물론 지난 전조에 비하면 조선은 정치와 종교의 유착을 최대한 줄여 왔다. 서방의 종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근래는 교섭을 위해서 활용하는 정도이며, 그들에게 제약은 있을지언정 자유가 있다. 이런 전례로 불교도 숭유억불은 폐기가 되고 더 존속하고 재기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도 너무 관과 엮이면 좋은 일을 보기 어렵다. 전조도 그랬다가 끝이 났고 조선이 있는 이래 이전에 정치와 불자가 엮인 일이 끝이 좋지 못했다.
보우라는 승려가 무슨 꼴을 당했는가? 이를 기억하면 더욱 관과 필요 이상으로 엮이면 안 된다.’
백장 스님이 이런 고심이 커진 이유는 다른 일도 있다. 원종의 조사인 만화 보선과 원종의 고위직이 된 승려 일동 등에게 사실상 이곳, 신지 요동의 조선불교 원종 현지 최고 책임자에 가깝게 일이 맡겨져서 그렇다.
‘너무 생각만 한다면, 일도 그르치는 법이다. 나는 노동하면서 수양하고, 다른 깨달음을 더 얻어야 한다. 너무 이런 일에 과하게 연연하면 아니 되는 법.
중도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 너무 하나에 씨름하는 것도 적성은 아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고, 찬찬히 생각하고 움직이기로 한다. 너무 생각만 해서 행동을 안 하면 행동하다 실패하는 일보다 못한 일이다. 그 고민은 뒤로하고 불경을 보면서 공부하고 잠들기로 한다.
그리고 불교 개척단은 함경도 북부에 산다는 ‘재가승’이라고도 불리는 무리 하고도 혼동이 되었다. 함경도에서 온 개척민들이 먼저 만든 마을에서 온 이들은 그렇게 혼동하니까 그렇다.
‘재가승’ 무리도 개척민들에 섞여서 오기도 했었다. 경허 스님과 백장 스님 등은 그 재가승 무리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들은 조선불교 원종의 시점으로 본다면 관에 잡아넣으라고 신고해도 문제가 없는 ‘땡중’들이다.
“아니! 저런 땡중들을 봤나?”
“스님! 관에 신고합시다.”
“그렇습니다. 저들 때문에 우리가 땡중, 가짜 승려로 오해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경허를 비롯한 젊은 스님들은 신고해야 한다고 꽤 평정을 잃고 화를 내었다. 함경도 개척민들은 주로 발해주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개척민 일부는 고구려주에 정착하였다. 그들과 같이 온 재가승들의 행동은 이해를 거부하고 본다면 매우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이다.
“흠···.”
“대처를 한다니요. 이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대체!”
본디 재가승은 비승비속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들, ‘재가승’은 육진 방언을 쓰는 함경도 북부에 살던 이들로 그 기원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전조인 고려에서도 있었던 이들이라는 주장도 있기에 애매하다.
만주인, 즉 그들의 조상이 되는 여진족들과도 연관이 깊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재가승’ 집단은 불교 개척단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아들었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원하는 것 같구나.”
“하지만!”
“이들이 자신들을 승 아무개라고 칭하던데. 당연히 원종의 승려들은 아니다. 또 아내 등을 두고 있기에 더욱 승려가 아니다. 그들을 속가제자와 같이 바꾸면 어떨까 싶구나.”
백장 스님은 이 재가승 무리를 관에 승려를 사칭하는 이들이라고 신고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들을 속가제자, 아니면 시주를 주는 보살 같은 신도로 바꾸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을 여전히 승 아무개라고 칭하기를 고집하면 어떠합니까?”
경허 스님이 조심스럽게 백장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백장 스님은 단호한 표정이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말도 경허 스님에게는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자신들이 승려의 수준이 아니라고 깨닫게 해주면 된다. 남을 완전히 설복시키려면 힘들어도 이를 해낸다면, 진심으로 따르게 만드는 법일세.
힘들다고 해도, 각오한 일이라네.“
“그렇습니까?”
물론, 이후에 백장 스님은 경허 스님에게 일종의 폭탄을 던졌다. 그건 경허 스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경허 스님은 굳었다.
“경허? 자네가 나를 도와주게나.”
“네?”
정확히는 놀라서 굳어 버렸다. 눈은 동그랗게 떠지고, 얼굴은 경악해서 하얗게 물들어 버렸다.
그런 모습에 백장 스님은 경허 스님을 보고 아직 더 커야 한다고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아직 젊으니까 그럴 수가 있다고도 여긴다. 언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다.
어설픈 다른 교리들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교리를 지적당하면 이를 바로 보강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백장 스님의 눈에는 경허 스님에게 그런 기회 등을 주면 나중에 대성할 것이라고 봤다. 만화 보선과 백장 스님, 모두가 내심 경허 스님에게 거는 기대가 알게 모르게 컸다.
“할 수 있겠느냐?”
“네?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된다.”
백장 스님과 경허 스님의 ‘재가승’들의 속가 제자로 만들기 위한 이른바 교리 전쟁, 혹은 도장 깨기가 시작되려고 하였다. 물론 이 ‘재가승’ 무리는 원종의 성립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건너왔다.
북쪽 육진 근방, 두만강 강변에 사는 재가승들은 그런 소식을 닿기는 멀었다. 불교 개척단에 대한 소문도 현지, 신지 요동에서야 들었다. 그들에게 불경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려고 왔었는데, 의도하지 않게도 봉변(?)을 당할 판이다.
그리고 다른 경우는 몽골인들과 만주인들이 불교의 승려와 신도들이 이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물론 그들과 조선인들이 믿는 불교는 확실하게 다르다. 그래서 다른 것을 알고 어떻게 이 다른 것을 넘어서는 개종(?)을 시킬 수가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저들이 믿는 가르침은 토번에서 기원했다는 불도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경허, 너의 말이 옳다.”
“‘재가승’들에 대해서 불경 교리 등으로 싸우는 등의 일을 보고는 이상하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청하기도 합니다.”
“저들에게는 토번의 그 불도를 가르치는 불자들이 거의 없는가?”
‘재가승’들을 언쟁 혹은 교리 전쟁같이 말로 팬다는 비유처럼 그들을 압도하기도 바쁜 중에서 고민이 크기는 했다. 한데 경허 스님이 흥미로운 말을 꺼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만... 거의 없다면... 이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건 백장 스님의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언쟁을 만주인과 몽골인 불교 신도들을 통역과 함께 두어서 참관시키는 일이었다.
“한데 만주인과 달자의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그게 문제인데?”
그런 문제는 어이없게도 다른 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들이 말로 많이 패서(?) 겁에 질린 나머지, 재빨리 조선불교 원종의 속가제자로 소속하기로 한 ‘재가승’ 일부 중에서 한둘이 만주어가 가능했다.
“그대들이 전달하겠다고?”
“그리하겠슴둥.”
“정말로?”
“참말로 그리하겠슴다.”
“좋네. 정말로 그렇게 해주면 우리야 고맙지.”
그렇게 백장 스님의 생각대로 판이 깔릴 준비를 한다. 물론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른다. 백장 스님도 무조건 성공하리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도박에 가깝기는 하여도, 시도해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 경허 스님도 백장 스님의 그것에 걱정이 되지만, 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 일은 농사 등의 노동이 끝난 저녁에 이루어질 것이다.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요. 조아라에서도 연재중입니다. 거기에는 HMS 아론다이트란 이름으로 연재를 합니다.
- 작가의말
1867년에 본격으로 불교 성향의 개척단이 떼로 올라갔습니다. 지금 시점은 1867년 봄 전후입니다. 다음편들은 사실 시기가 오락가락할 수가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혼동은 적을 것입니다. 아마도?
조선 후기에 불교계의 인사들이 이 재가승 집단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몰라서 창작했습니다. 쉬어가는 편이기도 하고, 나름 요동 개척에서 큰 기여를 할 이들이라서 담아봤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는? 다음에 알 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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