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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ssy의 소설들

탐정 얀 트로닉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네이시
작품등록일 :
2018.02.28 19:48
최근연재일 :
2019.07.08 23:34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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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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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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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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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26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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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3)

DUMMY

탐정 얀 트로닉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1. 실종자 (3)


허버트 병원으로 가기 위해 그레이치 구로 돌아가는 데에는 왔을 때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램버츠 구에는 마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에 마차 영업소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소모했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레이치 구에 돌아왔을 때에는 하늘이 제법 붉게 물들어 있었다.


흩어져 있는 구름은 검게 보이면서도 드문드문 희게 반짝였고, 이 즈음이면 유난히 붉어 보이는 태양은 검은 실루엣으로 가득한 건물들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주황색 불을 반짝이고 있는 가로등이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거리를 미미하게 밝혔다.


마차는 우리를 허버트 병원 앞에서 내려주었다. 허버트 병원은 큰 건물이었다. 3층짜리 건물이라는 점은 내 사무소와 비슷했지만, 이 병원은 세 층 전부를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건물 전체가 흰색에, 지붕과 문, 창문은 파란색이었다. 문 위에 붙은 갈색 간판에는 가장자리에 꽃과 줄기를 문양화한 장식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었고 가운데 부분에 '허버트 병원'이라는 글자가 마찬가지의 흰색으로 적혀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문패는 '진료 중'으로 놓여 있었고, 커튼이 쳐진 창문으로부터 빛이 비쳤다.


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군데군데 놓인 램프로 안은 밝았다. 아주 크진 않은 대기실에는 세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을 만한 의자가 네 개 놓여 있었고, 희게 칠해진 탁자 너머로는 접수원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갈색 눈동자의 여성이었다. 우리를 본 그녀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지었다. 거침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내 모습에 그녀는 내가 환자가 아님을 느낀 듯했다. 그녀의 미소가 아주 약간 옅어졌지만, 그렇게 다섯 번 정도 더 옅어진다고 해도 아직 상냥한 미소의 범주에 들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눈가와 입가의 잔주름이 보였다. 미소를 아주 자주 짓는 사람의 주름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런 사람입니다만.”


나는 내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명함을 잠깐 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아무 거리낌 없는 사람의 눈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맡은 의뢰와 관련해서 허버트 선생님을 좀 뵙고 싶습니다. 시간이 되실는지요.”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진료 중이시니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는 대기실 안쪽을 눈짓했다. 작은 나무문에 진료실이라고 적힌 문패가 붙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리죠.”


나는 의자로 돌아갔다. 에이레네가 서 있다가 내가 앉는 것을 보고 옆에 따라 앉았다. 에이레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원실도 있나 봐요, 여기.”

“그렇습니까?”


에이레네는 벽 한쪽을 가리켰다. 붉은색 화살표가 붙은 안내문이 있었다.


‘입원실은 2층입니다.’


“3층 건물인데, 병원으로는 2층까지만 사용하나 봐요.”


에이레네가 소곤거렸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말했다.


“3층은 서재일 수도 있겠죠.”

“3층을 진료실이나 입원실로 쓰기엔 환자들이 힘들겠죠.”


에이레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대기실 안을 살폈다. 별달리 눈에 띄는 것이 없던 중에 벽 한쪽에 걸려 있는 그림이 보였다. 한 남자가 가운데에서 웃고 있고, 양옆으로 어린이 두 명이 그 남자의 어깨동무를 받으며 함께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남자는 연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가르마를 타서 빗어 올렸고, 눈매와 입가가 선량해 보였다. 그림 아래에는 이런 문구도 적혀 있었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세상.’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고, 초로의 남자가 진료실 안쪽으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대기실로 나왔다. 접수원 여성이 남자에게 의자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남자는 나와 에이레네를 잠깐 보더니 다른 의자로 가서 앉았다. 접수원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싶더니, 그녀가 다시 문을 열고 나와 나를 불렀다.


“트로닉 씨, 들어오세요.”


나는 몸을 일으켜 진료실로 걸어갔다. 에이레네도 나를 따랐다. 접수원은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가, 우리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자 문을 닫으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진료실 안은 대체로 깔끔했다. 책상 뒤에 창문이 있고, 벽 양쪽으로는 책이 가득히 꽂힌 책장이 있었다. 책상에는 의사 C. 허버트라고 적힌 명패가 놓여 있었는데 화려하진 않으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명패의 주인인 허버트는, 책상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대기실의 그림이 이 남자를 그린 것임은 확실했다. 대체로 그림에서 본 것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연갈색 머리는 깔끔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고, 검은색 눈동자는 사심 없이 빛났다. 피부는 깨끗했으며 잡티조차 거의 없었다.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선량해 보여서 주인에게 아홉 번쯤 버림받은 강아지라도 마음을 열고 바로 꼬리를 흔들 것 같았다.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도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가 울림이 있는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콜린 허버트입니다.”

“얀 트로닉입니다.”

“반갑습니다, 트로닉 씨. 진심이에요.”


그는 나의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아주 세게 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가볍게 힘을 주고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가 윤기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찾아오셨다 들을 때는 의외였습니다만.”


나는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저를 아십니까?”

“알지요.”


허버트가 즉답했다. 그가 즐거운 듯이 되물었다.


“닥터 클랜시를 아시겠지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에이레네도 잘 아는 이름이었다. 그는 의사였고, 에이레네의 집안을 담당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에이레네 어머니의 죽음을 그가 확인했고, 이후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진실을 밝히려다 죽임당했다. 나는 그 일에 마법사가 관여한 것을 밝혀내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클랜시가 죽은 후의 일이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허버트를 바라보았다. 허버트는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에이레네는 어떤가 살피지도 않았다. 그의 미소는 그저 호의적이었다.


“그분 밑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부고를 듣고 놀랐죠.”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껄끄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매끄러울 뿐이었으며 단지 약간 조심스럽기만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말했다.


“장례식에 참석해서 당신을 보았었죠.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신문으로 읽었습니다. 큰 역할을 하셨더군요.”


신문에 모든 사실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사건은 마법사가 자신의 형을 의회에 진입시키기 위해 마법약으로 사람을 살해했고, 그러다 들켜서 클랜시까지도 죽이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다. 또한 에이레네가 나를 고용한 것이 아니라, 클랜시가 나를 고용한 것으로 내용이 바뀌는 등, 세부적인 내용들도 대부분 다르게 기사화됐다. 사실들을 모두 밝히려면 기프트의 언급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고려하더라도, 허버트의 환대가 지나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신문상으로, 나는 의뢰주가 죽고 나서도 의뢰주의 명예를 위해 마법사와 맞서 싸워 진실을 밝혀낸 탐정이었다. 클랜시와 교분이 있던 사람이라면 나에게 호의적이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살짝 미소지었다.


“의뢰를 받으면 완수해야 하니까요.”

“훌륭하군요! 그런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버트가 환히 웃었다. 그는 책상 너머의 의자를 가져왔고, 나와 에이레네에게도 진료실 의자에 앉도록 권유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았고, 허버트는 천천히 깍지를 껴서 무릎 위에 내려놓은 뒤 물었다.


“그러면,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소년을 찾고 있습니다. 160센티미터에 말랐고,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이죠. 이름은 브랜던 벤터스입니다.”


허버트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고, 깍지 낀 손가락 중 오른손 검지와 중지만을 까닥였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아주 약간 기울이더니 다시 바로 하고 미소지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 같군요.”

“확실합니까?”

“제게 진찰받은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원하신다면 진료 카드를 보여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면 확인해보고 싶군요.”

“얼마든지요. 날짜는 언제부터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두 주 전부터면 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허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가더니 한 뭉치의 서류 더미를 가져왔다. 서류는 귀퉁이에 구멍이 뚫려 끈으로 철해져 있었으며, 환자의 이름과 간단한 진찰 내역이 적혀 있었다. 허버트가 설명했다.


“매주 작업하는데, 이게 지난 두 주 분량입니다. 전 브랜던 벤터스란 이름이 없다고 확신합니다만, 확실하게 하고 싶으시겠지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이 서류에 브랜던의 이름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필체였다. 글자의 모양이나 기울기, 획이 이어지는 부분이나 힘이 들어간 부분을 볼 때 타니아의 집 난로에서 발견한 문서의 필적과 거의 흡사해 보였다.


나는 서류를 덮었다.


“그런 이름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럴 겁니다.”

“제가 여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군요.”


나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허버트에게 건넸다. 타니아의 집에서 발견한 허버트의 명함이었다. 담담하게 명함을 보는가 싶던 허버트가 눈가를 조금 찡그렸다. 명함을 눈 가까이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는가 싶더니 이윽고 살짝 굳은 미소와 함께 내게 돌려주었다.


“이 명함을 어디에서 얻으셨습니까?”

“방금 말씀드린 벤터스의 집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렇군요.”


허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는 듯하다 천천히 말했다.


“트로닉 씨, 이건 제 명함이 아닙니다.”


나는 명함을 내려보았다. 명함에는 여전히 ‘허버트 병원. 의사 C. 허버트. 그레이치 구 5가 27번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허버트가 책상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내게 건넸다. 그 명함에도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다만 글자체가 조금 달랐다. 내가 타니아의 집에서 찾아낸 명함의 글자보다 가늘었고, 획 끝이 미세하게 더 장식적이었다.


허버트가 신중하게 말했다.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명함을 만들었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 것이 아닙니다.”

“기이한 일이로군요.”


나도 신중하게 답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허버트였다.


“만약 지금 맡으신 의뢰를 해결하시는 중에 그 명함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내신다면 제게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사례는 드리겠습니다. 아니, 지금 의뢰를 마치시면 제 의뢰를 받아주시는 것으로 하는 쪽이 더 낫겠군요. 누가 어떤 의도로 그 명함을 만들었는지 알아내 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이번 의뢰를 마치셔야 하겠지만요.”

“누구든 원하신다면 제게 의뢰하실 수 있죠.”


나는 그렇게 답했다. 허버트는 약간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지금은 그에게 종이쪽지의 필적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천천히 말했다.


“어쨌든, 브랜던 벤터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시는군요. 더 이상 닥터 허버트의 시간을 뺏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군요.”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나와 에이레네가 돌이켜 진료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허버트의 목소리가 우리를 붙잡았다.


“그런데 트로닉 씨, 혹시 기프트란 것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잠깐 멈칫했고 천천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레네는 나보다 좀 더 빨리 그를 돌아본 것 같았다. 허버트는 조심스러운 미소를 띠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 제가 받을 선물(gift)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특정한 사람들이 가지는 특별한 능력(gift)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르십니까?”

“재능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가요?”

“재능이라고 하면 틀리지 않지만, 보통 말하는 재능의 의미와는 다르지요.”


나와 에이레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지금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잘 알기 어렵군요.”

“마법과도 비슷하다고 합니다만, 마법과는 달리 사람과 사람을 거친 전승으로만 이어지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합니다. 기프트를 가진 사람, 즉 오너(owner)가 죽으면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로 이어진다고 하더군요. 일단 얻고 나면 발전시키기는 자기 나름이고, 한 가지 능력만을 가지지만 마법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이군요.”

“네, 저도 아마 소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버트는 살짝 웃었다. 내게 어떤 반응을 기대하기보다도 그저 들려주고 싶었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물었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탐정이시니까 이런 이야기도 들어보셨을까 싶어서요. 솔직히 말하면, 이건 요즘 제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관심사입니까.”

“네, 마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겠죠. 실제로 마법사들과 연계해서 질병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요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마법과 기프트가 유사한 느낌이라서, 혹시 기프트란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의학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아쉽군요.”


허버트는 실망한 눈치였지만 크게 실망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마법이야 실존한다지만 기프트 같은 것이 실존한다고 믿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프트에 관해 물은 것이 단지 내가 탐정이기 때문이어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웠다.


허버트 병원을 나온 지 조금 지난 뒤에 에이레네가 그것을 물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어필이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어필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단순히 저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한 말일 수도 있긴 하죠. 나중에 좀 알아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가씨는 그 사람에게서 뭔가 느낀 것이 있습니까?”

“너무 친절해서 수상했다는 것 정도요.”


에이레네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작아서, 바람결에도 간단히 쓸려나갈 정도였다. 나는 그녀에게로 귀를 조금 더 가까이했다. 그녀가 말했다.


“이유 없이 친절한 사람은 없잖아요.”

“그의 말대로라면 이유는 있었습니다만.”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레네도 내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냥 걸었다. 에이레네가 문득 물었다.


“사무소로 돌아가나요?”

“그보다는 시간도 이렇고 하니 럼블버즈에서 식사를 할까 하는데, 그러기 전에 괜찮다면 브링크 상회에 들러 볼까 합니다.”

“브링크 씨가 또 바빠지겠군요.”

“그분은 제가 아니라도 늘 바쁘죠.”

“아이구.”


에이레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브링크 상회는 내 사무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위의 다른 건물들만큼 낡고 퇴색한 이 층 건물이 브링크 상회였다. 끄트머리가 닳고 금이 간 세 단짜리 돌계단을 올라 나무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거끌거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쇼.”


우리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산더미 같은 종이 더미 사이로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숱이 적은 회갈색 머리 밑 넓은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고, 원래도 두툼한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를 알아본 그가 작은 눈을 가늘게 만들어 웃음 지었다.


“허, 트로닉.”


거기까지 말한 후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에이레네를 보고 말을 이었다.


“······과 키르헨펠. 큼, 이젠 숙녀가 다 되었군?”

“고맙습니다, 브링크 씨.”


에이레네가 겸손하게 인사했다. 그녀가 웃었다.


“일거리 드리려고 왔어요.”

“덕분에 돈을 더 벌겠군. 흠, 그래. 어디 앉지 그러나?”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사무실에는 책상과 서류 더미뿐이었다. 손님을 위한 나무 의자가 구석에 있었지만, 그 의자 위에도 노끈으로 묶인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서류 더미를 내려 에이레네에게 내어 주고, 나 자신은 그 내려놓은 서류 더미 위에 앉았다.


브링크는 책상 너머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뱃살로 서류뭉치를 건드렸고, 서류뭉치는 자연스럽게 넘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넘어가는 서류뭉치를 잡으려던 브링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는데, 그가 떨어진 서류뭉치를 내려보더니 태연히 잡아들어 다시 쌓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쪽을 돌아본 그가 비죽 웃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건강을 위해 살을 조금 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마누라 같은 소리는 말게.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실종된 소년을 찾고 있습니다. 브랜던 벤터스, 16살. 갈색 머리와 푸른 눈. 160센티미터에 약간 말랐죠. 램버츠 구 3번가 73번지에 살고 있었고, 친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열흘 전이었습니다.”

“램버츠 구. 큼, 그 동네라면 하루에도 몇 명씩 실종되고 몇 명씩 돌아올 텐데.”

“그렇겠죠. 그래도 의뢰를 받았으니까요.”

“어쩔 수 없구먼. 그러면 나도 같이 찾아줬으면 하는가?”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단서나 소문 같은 게 있다면 알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그럼세. 뭔가 있으면 전갈을 보내겠네. 그래도 이번 일은 위험한 일 같지는 않아 다행이군.”

“그럼,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세요.”


나와 에이레네가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브링크도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


여기 나오는 인물들에게는 애정이 꽤 있는 편이고,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쓰는 속도가 늦긴 합니다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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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3. 선택 (5) 19.07.08 76 2 9쪽
21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3. 선택 (4) +2 19.06.16 64 2 7쪽
20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3. 선택 (3) +2 19.04.29 53 2 11쪽
19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3. 선택 (2) 19.04.01 70 2 13쪽
18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3. 선택 (1) 19.03.11 59 2 13쪽
17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8) 19.02.11 66 2 11쪽
16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7) 19.01.21 58 2 14쪽
15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6) +2 18.12.31 76 2 13쪽
14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5) +2 18.12.03 98 2 14쪽
13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4) +2 18.11.12 63 2 9쪽
12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3) +2 18.10.22 83 2 10쪽
11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2) 18.10.01 88 2 8쪽
10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2. 친구 (1) +2 18.08.06 89 4 11쪽
9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9) +2 18.07.16 81 4 14쪽
8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8) +2 18.06.18 77 3 14쪽
7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7) +2 18.05.27 90 4 11쪽
6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6) +4 18.05.07 117 4 11쪽
5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5) +2 18.04.23 123 6 19쪽
4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4) +2 18.04.09 126 5 15쪽
»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3) +4 18.03.26 165 6 19쪽
2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2) +4 18.03.12 160 6 20쪽
1 3부. 탐정은 심판하지 않는다 - 1. 실종자 (1) +2 18.02.28 357 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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