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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 님의 서재입니다.

사라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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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악천후]
작품등록일 :
2016.04.23 17:58
최근연재일 :
2016.05.14 17:03
연재수 :
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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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4
추천수 :
172
글자수 :
202,332

작성
16.04.29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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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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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장 박사의 변화 2

DUMMY

2


현수가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아련한 그리움이 빠져있을 때, 상념을 깨는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묘화부인인가 싶었는데 지은이였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부터 지은이에게 수시로 전화가 왔었다. 오늘은 특히 더 심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열 번 가까이 전화가 걸려왔었다. 하지만 현수는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 없었다. 부재중통화란 문구가 휴대전화화면에 떡하니 박혀 있었지만 전화를 걸진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현수 자신도 몰랐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 기이한 병증과 이상한 환청과 환각, 이런 것들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들을 짊어지고 지은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지은이에게 자신이 짊어진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현수로선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은이에게 자신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나눠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은이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은이는 사랑하는 연인이자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며 미래에 배후자가 되어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소중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지은이를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은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현수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곱씹고 있었기 때문인지, 문득 사랑하는 지은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고통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현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수는 최대한 명랑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이제야 받네.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다시는 전화하지 않으려 했어.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

지은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모르긴 몰라도 전화를 받지 않는 현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미안, 좀 바빴어. 많이 화났어?”

현수는 여전히 밝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 그랬겠지.”

지은이의 목소리는 지극히 냉소적이었다. 한겨울 삭풍에 실린 눈보라를 맞는 기분이 이럴까?

현수는 이전과는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토라진 것이 아닌 듯했다. 그저 전화를 받지 않은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현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하아! 있지. 아주 많이. 정말 놀랍군. 놀라워.”

지은이는 계속 차갑게 반응했다.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토해내는 것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미안해. 시차 때문인지 많이 피곤해서 전화를 받지 못했어. 사과할게. 대신 돌아가면······.”

지은이가 현수의 말을 끊으며 정색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 어디로? 어디로 돌아간다는 거야.”

현수는 영문을 몰라 답답했다.

“왜 그래? 정말 미안해. 요 며칠 간 너무 힘들었어. 전화할 시간이 없었어. 용서해줘.”

“끝까지 거짓말 할 거야? 난 정말 오빠가 그럴 줄은 몰랐어. 설마, 설마 했다고.”

현수는 지은이를 달래기 위해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듣지 않았다. 사과를 받아주기는커녕 화를 내고 있었다. 평소 지은이라면 전화 몇 통 받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이토록 차갑게 반응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잠시 토라질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무척 달랐다. 현수는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거짓말이라니······.”

“외국으로 출장 갔다며?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지은이는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현수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나, 오빠 봤어. 어젯밤에······. 날 보고 아는 척도 하지 않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한국에 있었으면서 연락도 없고, 그리고 그건 뭐야? 내가 불렀더니 날 빤히 쳐다보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모른 척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저, 정말 난 너무 화가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 오빤 정말 나쁜 사람이야. 아니, 오빤 나쁜 놈이야. 그리고 애초부터 외국으로 출장 간다는 말 거짓이었지? 그렇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지은이는 설움에 복받치는지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현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현수는 잠시 멍한 상태가 되어 지은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둔기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현수가 다급하게 지은이를 불렀다.

“나, 날 봤다고? 저, 정말 날 만난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좀 자세히 말해봐. 네가 오해한 거야. 설명할 수 있어. 지은아! 말해 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날 어디서 만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대체 어디서 지은이를 만났단 말인가? 현수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수로서는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억에도 없고, 카메라에도 찍히지 않은 지난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현수로서는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오해? 흥! 끝내 발뺌하시겠다고? 좋아. 알았어. 이제야 오빠 마음을 안 것 같아. 어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도 모르겠다고? 그래, 차라리 잘됐어. 늦게나마 오빠에 대해, 아니, 이젠 오빠라고 하지 않을 거야. 강현수 씨! 당신에 대해, 당신이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았다는 것이 오히려 기뻐. 다시는 전화하지 마. 나 만날 생각도 말고, 내 주위에 얼씬도 하지 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당신이란 남자······. 정말······.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라고는 못하겠네. 난 당신을······. 저주해.”

한동안 울먹이던 지은이가 냉정을 되찾으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 지은아! 지은아! 여, 여보세요? 지은아!”

애타게 지은이를 불러보았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현수는 곧바로 지은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들려온 말이라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을 원하시면 별 버튼을 눌러주세요. 연결이 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라는 이동통신사의 안내말 뿐이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전화연결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현수는 음성녹음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고, 네가 잘못 본 것이라고, 자신에겐 그런 기억이 없다고, 전화상으로 다 설명할 순 없지만 만나면 모든 걸 이야기하겠다고, 그러니 제발 전화해달라고······.

애타는 마음을 담은 음성을 듣고 지은이가 전화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지은이의 휴대전화는 차갑게 꺼진 채로 현수의 답답하고 쓰린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현수는 자신에게 아니, 자신이 지은이를 만나 어떻게 했기에 지은이가 저렇게까지 나올까 생각해보았다. 기억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난밤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디서 지은이를 만났을까? 그리고 지은이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지은이가 이토록 화를 내고 냉랭한 어조로 이별을 고할 정도의 일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을 모른 척했다는 것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리는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있다. 지은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어떤 말이나 행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은이에게 어떤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생각을 굴려보아도 알아낼 길은 없었다. 몸에 부착되었던 소형카메라만 제대로 작동했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으련만, 현수로선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은이를 만나야겠어.”

현수는 서둘러 연구소로 돌아갔다. 지금 당장 지은이를 만나 자초지정을 설명해야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 지은이를 진정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몽유증상이 일어났을 때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지은이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었던 것이다.

현수는 자책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지은이를 만나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면, 마음이 넓은 지은이는 현수를 이해해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현수의 나는 듯이 뛰어 연구소로 달려갔다. 연구소에 들어서자 묘화부인이 반겨줬다.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인데 딱 맞춰 왔네요. 씻고 오세요. 저녁준비 다 됐어요. 박사님이 평소에 즐기시던 보양식을 준비했는데, 현수 씨가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묘화부인의 낯빛도 아까보다 훨씬 좋아져있었다. 하지만 현수는 듣는 둥 마는 둥 방으로 올라가 짐을 꾸렸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가방을 챙긴 현수가 내려오자 장 박사와 묘화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가려는가?”

장 박사가 허둥대는 현수와 현수의 손에 들린 가방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지금 가봐야겠습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묘화부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일일뿐입니다. 이 일만 해결되면 곧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현수는 재빠르게 말하고 인사를 꾸벅했다. 그리곤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수 군, 잠깐만 기다리게.”

장 박사가 현수를 불렀다. 현수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뭔가 묵직한 느낌이 뒷덜미에서 전해진다 싶었는데, 뒤통수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현수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고, 뒤통수에선 핏물이 새어나왔다.

“아아악!”

정신을 잃어가는 현수의 귀에 묘화부인의 비명소리 들렸다. 뒤이어 장 박사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 박사님!”

갑작스런 장 박사의 행동에 놀란 묘화부인의 눈빛엔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묘화부인으로서는 장 박사의 행동을 막을 새가 없었다.

“올 때는 네 마음대로였지만, 갈 때는 그럴 수 없어. 난 너를 캐고 말거야. 너에 대해 온전하게 알게 되는 날. 난······. 자유롭게 될 거야. 흐흐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현수를 바라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귀기어린 웃음소리를 흘려내는 장 박사의 모습은 섬뜩하기만 했다. 마치 뭔가에 홀려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그 모습에 묘화부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장 박사의 손엔 청동으로 된 트로피가 들려있었다. 장 박사가 요양원에서 환자들을 정성껏 돌봐준 공로를 기려 환자들과 환자가족들이 고마움을 담아 수여한 것이었다.

사람 형상의 청동트로피에서 한 방울의 피가 중력을 못 이기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묘화부인은 갑작스런 사태에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석상처럼 굳어서, 쓰러진 현수와 그런 현수를 보며 괴기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장 박사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난······. 자유롭게 될 거야.”

장 박사의 입에서 새어나온 뜻 모를 말이 일순 무거운 적막감에 짓눌린 공간을 부유하듯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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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죄와 벌 1 16.05.07 386 4 12쪽
28 퇴마의식 2 16.05.05 481 3 16쪽
27 퇴마의식 1 16.05.05 408 4 14쪽
26 제발! 재발? 몽유병? 2 16.05.04 443 4 13쪽
25 제발! 재발? 몽유병? 1 +1 16.05.04 517 5 11쪽
24 다시 일상으로 16.05.03 653 4 13쪽
23 장 박사의 죽음 3 16.05.02 416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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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장 박사의 죽음 1 16.05.02 410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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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악몽 1 16.05.01 438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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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숨겨진 과거 1 16.04.30 356 4 12쪽
» 장 박사의 변화 2 16.04.29 494 4 12쪽
15 장 박사의 변화 1 16.04.29 41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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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시간이 되었어. 2 16.04.28 474 6 12쪽
12 시간이 되었어. 1 16.04.28 401 7 11쪽
11 몽마? 2 16.04.27 459 5 12쪽
10 몽마? 1 16.04.27 541 8 12쪽
9 묘화부인 16.04.26 493 4 14쪽
8 기이한 경험 2 +3 16.04.25 613 5 14쪽
7 기이한 경험 1 +1 16.04.25 504 7 11쪽
6 장 박사와 최면요법 3 +1 16.04.24 460 6 14쪽
5 장 박사와 최면요법 2 +1 16.04.24 416 4 10쪽
4 장 박사와 최면요법 1 +1 16.04.24 507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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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단 그리고 전개 1 +1 16.04.23 578 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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