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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 님의 서재입니다.

사라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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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악천후]
작품등록일 :
2016.04.23 17:58
최근연재일 :
2016.05.14 17:03
연재수 :
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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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3
추천수 :
172
글자수 :
202,332

작성
16.04.2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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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기이한 청년

DUMMY

초겨울의 싸늘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침이었다. 동녘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긴 그림자를 만들고 서서히 열기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공원은 갈 곳 잃은 노인들의 쉼터였다. 노인들이 하나둘씩 짝을 지어 공원벤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누가 정해준 것은 아니지만 공원벤치는 모두 주인이 있었다. 김 노인의 자리는 공원입구에서 1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화단, 바로 옆이었다. 볕이 잘 들고, 화장실도 가까워 노인들 사이에서는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김 노인은 그날도 눈칫밥을 더한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 자신의 자리로 왔다. 그런데 낯선 불청객이 김 노인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잠들어있었다.

기껏해야 서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청년이 무슨 이유로 공원벤치를 차지하고 잠들어 있는 것인지 이상스러웠다. 게다가 맨발에 잠옷차림이라니.

김 노인은 잠시 청년을 멀건이 바라보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곧 일어나려니 생각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괘씸한 생각이 든 김 노인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은 놈이 식전 댓바람부터 길바닥에 나앉아있다니, 이런 쓸모없는 놈을 봤나!”

김 노인의 말에 어슬렁어슬렁 자기 자리를 찾아가던 이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젊은 놈이 할 짓이 없어 노숙이 웬 말이여. 이왕 노숙 할 거면 옷이라도 단단히 입던가 하지. 이 추위에 잠옷이 웬 말이여.”

이 노인의 말마따나 청년은 기하학적 무늬의 푸른색 잠옷 차림이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안 된다니까. 열심히 일해서 살아볼 생각은 안하고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헛된 망상만 하고, 의지가 부족해서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해버리니 말이여. 우리 땐 죽을둥살둥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악다구니를 썼는데 말이여. 안 그려?”

“내 말이 그 말이여. 오죽 못났으면 저 짓거리를 하고 있느냐, 이 말이여.”

김 노인과 이 노인이 주거니 받거니 설을 풀어놓았지만 청년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알아듣도록 말했으면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할 텐데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혹시 죽은 거 아녀?”

이 노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김 노인을 돌아봤다.

“설마?”

“보게. 죽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모습일 수 있나. 어떻게 꼼짝도 하지 않느냔 말이여.”

이 노인은 보란 듯이 청년의 몸을 건드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죽은 사람 몰골이 저렇단 말인가? 죽긴 뭘 죽어. 저놈이 일어나기 싫어서 잔꾀를 부리는 거지.”

김 노인의 말마따나 청년의 모습은 죽은 사람의 그것과는 판이했다. 혈기가 도는 얼굴은 은은하게 홍조를 띠고 있었고, 미약하지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아침추위를 느끼는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자네 말이 맞구먼. 그럼 저놈이 좋은 자리 차지하고 뺏기기 싫으니까 꼼수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구먼.”

그제야 이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두 노인이 얘기하거나 말았거나 청년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김 노인의 말대로 잔꾀를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청년의 행동은 김 노인을 성나게 만든 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김 노인은 우회적인 방법을 팽개치고 직접 나서기로 했다.

“야, 이놈아. 얼른 일어나지 못해? 어디서 버릇없이 남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이여. 젊은 놈이 아침부터 이게 무슨 추태여. 열심히 일해서 돈 벌 궁리는 안하고 노숙을 해? 에라, 이놈아. 그렇게 못나서 어디다 써먹을 거여!”

김 노인의 호통에도 청년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괘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안 일어나? 에라, 이놈아! 이거나 먹어라. 얼른 일어나지 못해!”

김 노인은 분기탱천하여 청년의 등짝을 후려쳤다. 젊었을 적에 힘깨나 쓴다고 자부했던 김 노인이고 보면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청년의 등짝을 후려칠 때의 충격은 젊은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윽!”

그제야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리곤 쓰라린 등을 몇 번 쓸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 여기가 어디야? 내,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서, 설마······. 안 돼. 절대, 절대 안 돼.”

청년은 김 노인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은 보지 못한 채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악!”

청년은 두통이 오는지 머리를 감싸 쥐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이 그래도? 야, 이놈아, 퍼뜩 안 일어나?”

김 노인의 호통소리가 공원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네 그려. 요즘 젊은 것들은 왜 저모양인지 모르겠다니까.”

멀어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좇으며 김 노인이 욕설을 내뱉었다. 청년이 떠나고 난 뒤 김 노인은 잠시나마 강탈당했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열기를 더해 가는 태양빛에 몸을 내맡기며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한편 공원을 빠져나온 청년은 출근차량들로 붐비는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청년은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더불어 자신이 왜 알지도 못하는 도시 한복판을 헤매고 있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청년은 생각했다. 병이 다시 도진 것이라고.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마음 푹 놓고 지냈는데 다시금 병이 도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년은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안 돼. 절대 안 돼. 다시는······. 다시 그렇게 되면 안 돼. 절대로······.”

청년은 이를 악물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절대 아니라고, 안 된다고 곱씹었다.

초겨울이기는 하지만 아침날씨는 쌀쌀했다. 청년은 얇은 잠옷을 단단히 여미고, 두 손을 비비며 거리를 걸었다. 맨발에 잠옷차림으로 걷는 청년을 본 사람들은 의아해했고, 더러는 미친놈이 아니냐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청년은 추위와 타인의 곱지 않은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사방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곧 알게 되었다. 자신이 있는 이 도시가 어디인가를.

청년의 눈에 큼지막한 크기의 관공서가 눈에 들어왔고, 관공서 입구엔 A시청이란 간판이 붙어있었다.

“A시? 어, 어떻게 내가 이 먼 곳까지 왔단 말인가. 지난 밤 분명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어떻게 이 도시에서 깨어날 수 있단 말인가.”

청년은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짧은 지리 지식을 동원해 보아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지금 그가 서 있는 이곳 A시까지는 적어도 2백여 킬로미터는 족히 되었다.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도 이랬다. 불과 7개월여 전부터 청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이젠 벗어났다고, 그 악몽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다. 벌써 3개월 가까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청년은 두려웠다. 다시 그 암흑 같은 절망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이 두렵고도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청년에게 중요한 것은 왜 자신이 이 먼 도시에서 깨어났느냐는 사실보다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했다. 청년은 한시라도 빨리 이 낯선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청년은 도로가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어떤 택시도 청년을 태워주려 하지 않았다. 하긴 잠옷차림에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신발도 신지 않은 청년을 태운다는 것은 웬만한 호의가 없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가운 아스팔트에서부터 시작된 한기가 발바닥을 통해 청년의 전신으로 휘몰아쳐갔다. 잘못하다간 동상에라도 걸릴 판이었다.

청년의 손과 발이 벌겋게 변해가고 있을 때 흰색 승용차 한 대가 청년 앞에 멈춰 섰다.

“무슨 일입니까? 어디 다치기라도 하신 것입니까?”

운전자는 청년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아니지만······. 저, 저 좀 태워주십시오.”

청년은 추위에 굳어버린 입을 간신히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K시요.”

“잘됐군요. 타시죠. 저도 지금 그곳으로 출장 가는 중입니다.”

“고, 고맙습니다.”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운전자는 보조석의 열선을 켜고 난방기의 온도를 높였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마시려고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네주었다.

“쭉 들이켜세요. 따뜻해질 겁니다.”

“고, 고맙습니다. 저, 정말 고맙습니다.”

운전자의 호의에 청년이 연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운전자는 별거 아니라며 좀 쉬라고 말하고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아침나절이라 그런지 출근하는 차량이 도로에 가득 차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차안의 공기가 따뜻해졌고, 청년의 언 몸도 녹아 몸 곳곳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제야 운전자가 청년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청년으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청년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운전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청년을 돌아봤다.

“어쩌면, 어쩌면 병이 다시 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청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병이라니요? 무슨 병을 말하는 겁니까?”

운전자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던 청년이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청년은 왜 낯선 운전자에게 선뜻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어려움에 처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운전자가 고마웠기 때문일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인정어린 말투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답답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은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누구도 믿지 않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기에 믿든 안 믿든 누군가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청년이 어렵사리 입을 열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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