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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 님의 서재입니다.

동전 한 닢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중·단편

완결

[악천후]
작품등록일 :
2016.04.01 18:27
최근연재일 :
2016.04.01 18:47
연재수 :
5 회
조회수 :
5,073
추천수 :
20
글자수 :
37,135

작성
16.04.01 18:41
조회
874
추천
4
글자
12쪽

동전 한 닢

DUMMY

4


그 자가 깨어난 건 다음날 점심 무렵이었다. 핼쑥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깨어나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미음을 끓여오겠습니다.”

장호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 자는 가만히 장호를 좇다가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 자의 시선 안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왁자지껄 떠들며 밥을 먹던 아이들은 그 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숨을 죽인 채 그 자를 살폈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더니 이내 관심을 접고 밥을 먹는데 열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개다리소반에 하얀 김이 오르는 미음을 들고 왔다.

“자, 드세요. 곧 탕약을 달이도록 하겠습니다.”

소반을 내려놓으며 장호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빤히 장호를 바라보았다. 장호는 그 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그 자는 말이 없었다.

장호가 몸을 돌려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 앉자 그 자는 자신 앞에 차려진 미음을 내려 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상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먹는 것은 조와 옥수수 등으로 만든 죽이었다.

그 자는 알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쌀은 사치라는 것을. 그런데 지금 자신 앞에 높인 상에는 미음이 있는 것이다. 그 자는 가만히 미음을 떠먹었다.

“다 드셨습니까? 맛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 곧 탕약이 다 될 것입니다.”

소반을 들며 장호가 말했다.

“자네가 날 구했나?”

잠시 장호를 바라보던 그 자가 입을 열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어젯밤에 저희 집 마당에······.”

장호는 그 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길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뭔가 더 말이 나올까 기대하던 장호는 흘끔 그 자를 바라보았지만 그 자는 이미 드러누운 상태였다.

“그럼, 쉬십시오. 탕약이 다 되면 깨우도록 하겠습니다.”

장호는 머쓱한 얼굴로 말하고는 소반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짙은 탕약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호가 쟁반에 탕약을 받쳐 들고 왔다.

“약이 다 되었습니다. 드시지요.”

장호의 말에 그 자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 자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장호는 놓치지 않았다. 안 그런 척 했지만 사실은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장호는 그 자가 타인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벌컥벌컥 탕약을 들이마신 그 자는 말없이 사발을 내려놓고는 이내 다시 드러누웠다. 장호는 물어볼 말이 말았지만 차마 하지 못한 채 약 사발을 들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그 자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자는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양 편안한 자세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궁금했다. 생명의 은인에게도 저토록 무뚝뚝한 사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섣불리 물을 자신은 없었다. 그 자의 눈빛만 마주하면 왠지 오금이 저리고 가슴이 벌렁거렸기 때문이었다.

“전 지금 일을 나가야 합니다. 지금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올 것입니다. 저녁밥이랑 탕약은 제 동생이 준비할 것입니다. 그럼 몸 조리 잘 하고 계십시오.”

장호는 집을 나서며 마치 집안 어른에게 인사하듯이 정중한 어조로 말을 했다. 뭔가 대꾸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그 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는 장호에게 아이들이 달려와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장호 역시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고는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 자의 시선은 장호와 아이들의 모습을 좇아 흐르고 있었다.


5


그 자가 장호와 아이들의 객이 된지도 벌써 열흘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그 자가 꺼낸 말이 불과 몇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 말이 없는 것인지 장호 등과 얘기 하는 것을 꺼려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장호를 제외한 아이들이 몇 번 이야기를 시도하는 것 같았지만, 대꾸가 없다보니 시들해졌는지 이제는 아예 존재치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다만 장호의 당부 때문인지 잊지 않고 식사를 준비하고, 탕약을 다려주고, 상처에 바를 약을 준비해 줄 뿐이었다.

그 자는 한동안 거동을 못하더니 칠일 정도 지나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돌아보기도 하고 뒷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특히 마을 뒤편 구릉에 올라 마을을 내려 보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호가 아침 일찍 탕약을 들고 갔을 때 그 자가 물어왔다.

“이 마을에 어른은 없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찾고 답했다.

“예, 저희가 전부입니다.”

그 자는 장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자는 잠시 장호와 아이들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뒷산의 무덤들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 같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나?”

“······예.”

장호는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얘기해 줄 수 있나?”

그 자는 장호에게 그날의 참상에 대해 듣길 원했다. 장호로선 절대 꺼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 듯 그날의 처절했던 참상에 관해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을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이야기를 마친 장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슬픔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얼굴마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장호가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 자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옛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쉬시지요. 전 이만 일을 나가야합니다.”

장호는 부끄러운 듯 눈가를 훔치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 놈들······. 마적 떼가 누군지 알고 있는가?”

방을 나서는 장호에게 그 자가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 놈들은 무자비한 악귀들입니다. 전······.”

“두려워하는군.”

장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잇지 못하자 그 자가 낮게 읊조렸다.

“전······. 두렵습니다.”

그 자의 말에 장호는 자괴감을 느꼈다. 부모님의 원수가 누군지 알면서도 두려움에 어쩌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불구대천지원수라 했다.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이었다. 부모님의 원수. 그들과는 같은 하늘아래 함께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수심이나 분노보다도 더 큰 두려움이 장호를 괴롭히고 있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장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방을 나섰다. 장호의 어깨는 축 처진 채 맥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안쓰러웠다. 그런 장호의 뒷모습에 그 자의 시선이 박혔다. 무덤덤한 시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6


보름이 지나자 그 자가 몸을 추슬렀다. 그 모습을 본 장호는 그 자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장호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자신 앞에 나타난 지 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보니 장호로선 그 자가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윤 의원도 그랬다. 적어도 두어 달은 정양을 해야 거동을 할 것이라고. 그러나 불과 사흘도 지나지 않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보름 만에 완전히 나은 것처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떠나시렵니까?”

아침상을 들이며 물었다. 그 자는 어찌 알았냐는 듯이 장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발 챙기시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먼 길 떠나는 사람은 신발부터 준비하기 마련이지요.”

그 자의 시선을 받은 장호가 말했다. 그 자는 잠시 장호와 시선을 맞추고는 이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신발을 정비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는 옷과 소지품을 쌌다. 그 앞으로 장호가 한 꾸러미의 짐을 내놓았다. 그 자가 장호를 쳐다봤다.

“먼 길 떠나실 때 필요할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꾸러미에는 상처에 바를 약과 약재, 육포와 갈아입을 속곳과 신발 그리고 약간의 엽전이 들어있었다. 그 자는 가타부타 말없이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장호가 준비한 아침밥을 떴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먼 길을 떠나실 모양이니 든든하게 드십시오. 부족하면 말씀하시고요.”

“고맙네.”

불현듯 그 자가 말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밥을 떠먹는 모습 그대로 꺼낸 말이었다. 장호는 가만히 그 자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이렇게 보살펴 준 것도.”

“별 말씀을요. 불편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런 그 자의 감사표시에 장호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마치 당연한 듯 장호와 아이들의 대접을 받던 그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비록 다정한 음성이 아닌 무뚝뚝한 말투에 시선조차 마주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어떤 감사의 인사나 보답보다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그럼, 식사하십시오. 곧 탕약을 올리겠습니다.”

장호는 그 자가 더 말이 없자 방을 나섰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그 자를 보살피면서 회의감이 들곤 했었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그 자를 위해 방을 내주고, 식사를 대접하고, 탕약까지 달여 바쳐야 하는 심정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생명의 은인이고 보면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떠나는 날 아침이 되서야 감사의 인사를 표하다니. 그것도 단 몇 마디 말이라니.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쫓아내도 수십 번은 더 쫓아냈을 일이지만 장호는 그저 한마디 감사의 말이 수백, 수천 마디의 말이나 어떤 금전적 보상보다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탕약을 준비해 가져가니 어느새 그 자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

“지금 가시렵니까?”

그 자는 말없이 장호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시선이었다. 처음 느꼈던 거북스런 시선이나 마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아닌 평안한 시선이었다. 장호는 이제 피하지 않고 그 자의 시선에 눈을 맞추었다.

“이걸 드시고 가십시오. 약재를 넣었으니 끼니때마다 달여 드시면 됩니다.”

그 자는 장호가 내미는 약사발을 받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셨다. 마시는 모습만 봐도 속이 다 후련할 지경이었다. 쟁반에 약사발을 내려놓은 그 자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동전이었다. 동전 한 닢. 그 자는 그것을 장호에게 내밀었다.

“아, 아닙니다. 전 뭘 바란 것이 아닙니다.”

장호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하지만 그 자는 무심한 시선으로 동전을 건네며 말했다.

“언제고 이걸 들고 날 찾아오게. 어떤 일이든 무슨 일이든 자네가 요구하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한 가지를 들어주겠네.”

그 자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니 어떤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 장호는 더는 사양치 않고 그 자가 내미는 동전을 받아들었다. 평범한 동전이었다. 다만 보통의 동전과는 달리 어울리지 않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귀검鬼劍.

날렵한 필체였다. 달필은 아니지만 기개가 느껴지는 필체였다. 새긴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햇빛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호가 동전을 살피는 사이 그 자는 성큼성큼 걸어 사립문을 나서고 있었다. 장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그 자를 향해 소리쳤다.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막굉.”

잠시 장호를 바라보던 그 자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는 횅하니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막굉. 막굉이라······.”

장호는 막굉이 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이들도 그가 떠나는 것을 보았는지 낯설음도 잊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장호가 막굉이란 인물이 강호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얼마나 대단한 위인인지 알게 되는 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막굉이 주고 간 동전 한 닢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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