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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 님의 서재입니다.

동전 한 닢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중·단편

완결

[악천후]
작품등록일 :
2016.04.01 18:27
최근연재일 :
2016.04.01 18:4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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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6.04.0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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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동전 한 닢

DUMMY

1


집요한 놈들이다. 천리가 넘는 길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뒤쫓고 있다. 단순히 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살수를 펼쳐왔다. 마치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목숨을 도외시한 채 달려들고 있다.

벌써 베어 넘긴 놈들의 수가 일백을 넘긴지 오래다. 일백을 넘긴 후론 수를 세는 것마저 포기해버렸다. 숨은 턱 밑까지 차올랐고, 온몸의 기운이 빠져 맥이 없었다.

그가 항상 심혈을 기울여 차려입던 곱디고운 백삼은 어느새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마저도 몸 곳곳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막굉은 검붉게 물든 옷을 내려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깝군. 간만에 큰 맘 먹고 장만한 옷이었는데······.”

말을 그렇게 했지만,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어찌어찌 목숨을 챙겨 이곳까지 달아날 수 있었지만,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다 된 상태였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자신이고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놈들인가? 어떤 조직이기에 이리도 집요하단 말인가?”

막굉은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놈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지 벌써 삼십여 년.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그렇듯이 수많은 적을 만들어 온 그였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안달하는 적들이 도처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지금 그를 쫓는 놈들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청성파의 말코도사 놈들인가?”

막굉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것이다. 아무리 원한이 깊다손 치더라도 이처럼 복면을 한 채 마구잡이로 달려들진 않을 것이다. 청성파의 도사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비록 그 명성이나 세력이 예전만 못하다 하더라도 당당한 구대문파의 일원으로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처럼 무모하게 목숨까지 내놓은 채 악다구니를 쓰진 않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막굉은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는 무림인과 방파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다 하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었다. 놈들의 수법이나 차림새, 그 어떤 부분에서도 정체를 알아챌 만한 특징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로선 처음 대하는 자들이었고, 평범한 수법이었다.

일부러 자신들의 수법을 숨기려하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를 죽이려 하는 자들이라면 구태여 자신을 숨기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대에게 굳이 자신을 감출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 막굉 같은 고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놈들의 정체를 고민하던 막굉은 아름드리나무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그러다 문득 옛 생각에 젖었다. 제멋대로 달려온 오십여 성상이었다. 까닭모를 분노에 휩싸여 살인을 저지르고 파괴를 일삼았던 생애였다. 막굉의 귓전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분노에 찬 괴성과 절규가 들려왔다. 광기에 휩싸인 젊은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나쁜 놈이었군.”

막굉은 자조 섞인 음성을 나직하게 내뱉으며 헛웃음을 토했다. 그때 뒤편 숲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독한 놈들이군. 벌써 쫓아오다니······.”

막굉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기분 나쁜 파공음과 함께 은빛 물체가 기세 좋게 날아왔다.

“이 정도론 어림없지.”

막굉은 조소를 지으며 상체를 슬쩍 흔들어 암기를 피했다. 불과 몇 초의 시간이 가기도 전에 검은 복면의 암살자들이 막굉을 둘러쌌다. 모두 여섯.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길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강렬한 적의와 분노가 담긴 눈길이 막굉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막굉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하나 정면으로 받았다.

“하나만 묻자. 도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그리고 네놈들을 부리는······.”

막굉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막굉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살수를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복면인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막굉은 느긋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론 긴장하여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호흡은 간신히 진정된 상태지만, 기력은 형편없었다. 천리 길을 정신없이 내달리며 잠 한숨 제대로 못자고, 밥 한 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채 생사를 넘나든 상태였다.

‘이놈들은 지치지도 않나?’

복면인들의 살수를 막아내며 생각했다. 아무리 수가 많았다고는 하나 그를 추적한 시간이 얼마며, 거리가 얼마던가?

‘시원한 탁주 한 사발에 닭다리 하나 뜯었으면 좋으련만.’

자신의 코끝을 스쳐가는 은빛 섬광을 피하는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다.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운지 막굉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복면인들은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막굉을 둘러싸고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다.

확실히 막굉의 움직임은 평소 때완 달랐다. 몸 곳곳에 난 상처도 상처지만, 무엇보다 기력이 쇠잔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런 그의 상태를 복면인들도 눈치 챈 듯 했다. 복면인들은 점점 속도를 빨리하며 차륜 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기력마저 빼앗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과연 복면인들의 공격은 금세 효과를 보였다. 몇 번의 공격에 새로운 상처 몇 개가 그의 몸에 새겨졌다.

막굉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이름도 모르는 두메산골에서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보다 적의 정체도 모른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아마 난도당한 채 산짐승들의 먹이가 되거나 아무렇게나 버려져 구더기가 들끓는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말겠지?’

문득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오십여 성상동안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지 두려움을 느끼는 위치에 서 본적이 없는 그였다.

‘그들도 그랬을까?’

그는 자신이 죽인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살려달라고 눈물콧물을 짜내며 빌던 여인네와 철없이 울부짖던 아이들의 모습과 불타는 가옥과 절규가 뒤섞인 아수라장이 스쳐갔다.

막굉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오한이 일었다.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감상에 젖을 틈이 없었다. 막굉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적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조금 늦은 것을 알았다.

‘살을 주고 뼈를 벤다.’

막굉은 망설일 틈도 없이 옆구리를 내주며 복면인의 목을 꿰뚫었다.

“윽!”

그와 복면인이 동시에 신음성을 토해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신음이 뼛속 깊이 전해오는 통증에 의한 것이라면 복면인의 그것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외침이었다는 것이다.

간신히 위기를 면한 막굉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이내 다른 공격이 이어졌다. 등 뒤를 파고드는 싸늘함에 더해 다리와 가슴, 옆구리를 노리고 도검이 쏟아졌다.

복면인들은 차륜 전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드는 도검이 강렬한 태양빛을 받아 섬뜩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막굉은 세차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도검을 피해 반격을 가했다. 옆구리의 상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끌수록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방어보다는 공격을 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과연 그의 작전은 성공한 듯 보였다. 방어를 도외시한 막굉의 반격에 복면인들은 당황한 듯 했다. 하지만 적들은 그리 녹록한 자들이 아니었다. 막굉의 반격에 당황하면서도 자신들이 해야 할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막굉이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두 명의 복면인들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는 사이 막굉의 공격을 피한 복면인들의 도검이 허벅지와 등줄기에 박혀들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아픔이 전신을 관통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고 있을 새도 없었다. 남은 적들은 아직도 셋이나 되었다.

막굉은 혼신의 힘을 짜내 노호성을 토해내며, 적들을 향해 거센 기세로 살수를 펼쳤다.

적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멈칫했다. 성난 얼굴에 핏물을 뒤집어 쓴 채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막굉의 모습이 흡사 지옥 유황불에서 튀어나온 야차와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굉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막굉은 노련한 무사였다. 복면인들이 멈칫한 순간을 결코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막굉의 몸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가 싶더니 두 명의 적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내며 나자빠졌다. 그러나 한 치가 부족했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는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남은 복면인의 목줄을 파고든 깊이가 얕았다. 복면인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내긴 했지만, 그 급박한 와중에도 반격하는 것을 잊진 않았다.

복면인의 검이 막굉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순간 막굉은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복면인의 눈빛이 득의로 가득 차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질긴 목숨을 이어가며 자신의 동료 백여 명을 해치운 괴물 같은 놈을 처치했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복면인은 너무 일찍 마음을 놓았다. 상대는 험난한 강호에서 삼십여 년을 버텨온 노련한 무사이자 살인귀였다. 생사의 순간을 수도 없이 넘고 넘은 노회한 무림인이었다.

막굉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느끼는 순간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몸을 살짝 비틀어 급소를 피한 것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박힌 복면인의 검은 한 번에 심장을 가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복면인의 눈빛에서 득의가 사라지고 고통이 느껴졌다. 한 치가 부족했던 막굉의 검은 한 치를 넘어 그대로 복면인의 목을 관통했다. 복면인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남은 적을 해치운 막굉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마지막 복면인의 검은 아직도 그의 가슴팍에 박힌 채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 지쳤고, 고통스러웠다. 그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이렇게 맥없이 죽으려고 그토록 험난한 길을 헤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막굉은 힘겹게 중얼거리며 남아있는 한 올의 힘까지도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뼛속까지 밀려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죽진 않아.”

막굉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여 널브러진 복면인들에게 다가갔다. 정체를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있을까 싶어 몸을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옷도 무기도 신발과 허리띠까지도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물건이었고, 심지어 체형이나 생김새까지도 평범함 그 자체였다. 적의 정체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제껏 죽어라 도망치며 무수히 많은 복면인들을 베었건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밝혀진 것도, 밝힐 수 있는 단서도 없었다.

허탈한 기분을 뒤로하며 막굉은 걸음을 옮겼다.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끔찍한 고통도, 쇠잔한 기력도 뛰어넘어 그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난 죽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날거야. 살려줘! 어떤 것이든 해줄 테니 제발 날 살려줘!”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그의 음성이 적막한 산중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2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데우고 있다. 여름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해질 무렵임에도 햇살의 따사로움은 가실 줄을 몰랐다. 멀리 서편하늘은 붉고 누런 물이 들어가고 그림자는 길게 이어졌다.

장호는 짐을 한 아름 들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여느 때와 달리 이른 귀가 길이었다. 오늘은 그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부모님의 기일이었다. 십년 전 마적 떼의 침입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님이 비명에 가고 말았다.

장호는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뒤주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머니가 능욕을 당하고, 아버지는 머리가 잘린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장호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말을 지키기 위해 철모르고 잠든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울음을 삼키고 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 알겠지?”

마적 떼가 마을을 덮치고 집집마다 비명과 절규가 이어질 때 어머니는 장호와 어린 동생을 뒤주에 숨기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호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어머니는 그런 장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와 함께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장호는 어머니의 그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적 떼가 휩쓸고 간 마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채 삼십여 호가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은 한바탕 거센 폭풍이 휩쓸고 지난 것처럼 황폐해지고 말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고, 병들어 골골한 노인들 몇몇뿐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들 중 장호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자연히 장호는 그들의 큰형이자 큰오빠가 되었고, 몇몇 노인들과 더불어 쓰러진 마을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고,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노인들마저 생을 마감했다. 남은 것은 장호와 장호의 어린 동생, 그리고 살아남은 여덟 명의 고아들뿐이었다. 고아들은 대부분 장호의 동생과 비슷한 연배였다. 때문에 장호가 집안의 가장은 물론 마을의 촌장이 되어 고아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처음 마을이 황폐화 되었을 때는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도 시들해졌다. 장호는 어린 동생과 새로이 얻은 어린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도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투정을 부릴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잘 자라서 이제는 일자리를 잡아 적게나마 생활에 보탬을 주게 되었다.

장호는 일을 마치기 무섭게 시장에 들러 제수를 장만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아이들 모두 제삿날이 같았다. 장호는 걸음을 재촉했다. 벌써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형!”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동생이 장호를 반기며 달려왔다.

“왜 나와 있어? 제사 준비는 다 됐어?”

“당연하지 준비는 다 됐어. 형이 제일 늦었어. 위패도 다 준비됐고, 상도 마련됐어. 그릇들도 다 닦았고, 물도 끓이고 있어.”

장호의 물음에 동생이 준비사항을 빠르게 알려줬다.

“그래? 어서 가자. 어르신들 기다리다 가실라.”

장호는 동생과 걸음을 재촉해 마을로 들어갔다. 예전 촌장의 집이었던 곳에 제사 지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장호가 들어서자 아이들이 달려왔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제사 준비에 들어갔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장호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십년 전 부모님이 비명이 가실 때만해도 눈앞이 암담했었다. 그런데 이젠 장부가 되었고,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아홉이나 되는 동생들을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모두들 건강하고 구김살 없이 커준 것이 장호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갔다. 장호와 아이들은 정성껏 장만한 제상을 앞에 두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백여 개가 넘는 위패가 상위에 놓였다.

위패를 하나하나 바라보는 장호의 뇌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자신을 대하던 촌장에서부터 부모님과 삼촌, 이웃주민들의 얼굴과 어릴 적 소꿉친구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스쳐갔다.

장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이미 아이들 몇몇은 훌쩍이고 있었다. 장호의 동생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를 그리워하며 우울한 빛을 보였다.

제사를 마친 장호와 아이들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이라 그런지 우울했던 기분이 언제였냐는 듯이 금세 밝아져 있었다. 웃고 떠들며 푸짐하게 차려진 제사 음식을 들었다.

장호는 그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이제는 공동묘지가 되어버린 어릴 적 동무들과 철없이 뛰놀던 마을 뒤편의 구릉으로 향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그날 밤도 그랬다.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온 마을에 차가운 빛을 뿜어내던 밤이었다.

장호는 구릉 한 가운데 조잡하게 세워져 있는 나무묘비 앞에 섰다. 부모님의 묘였다.

“엄마, 아빠.”

장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묘지 위로 쏟아지는 서늘한 달빛만이 반기며 그의 몸을 감쌌다.

“엄마, 아빠. 잘 지내고 계시죠?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우리 장유도 잘 컸어요. 엄마, 아빠······.”

장호는 슬픔에 겨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불투명한 저편에 부모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장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하다. 우리 아들.”

엄마의 말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형.”

어느새 올라왔는지 장유가 달빛을 머금은 채 장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유야.”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엄마, 아빠 저 장유에요.”

장유는 마치 눈앞에 부모가 있기라도 한 듯이 묘를 향해 넙죽 절을 올렸다. 장호는 그런 동생의 모습이 대견했다.

“애들은?”

“응, 한바탕 신나게 먹고 떠들더니 잠들었어.”

“그렇구나. 너도 자지 않고 왜 나왔어.”

“형이 여기 있을 줄 알고 왔지.”

“짜식!”

장호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형! 엄마, 아빠를 죽인 놈들이 누군지 알아냈어?”

동생의 물음에 장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 아직······.”

머뭇거리던 장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쁜 놈들. 어떤 놈들인지 알기만 하면 그냥······.”

장유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장호는 대견하면서도 미안했다.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을 해친 마적 떼가 어떤 놈들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호였다. 하지만 두려웠다. 철없는 동생과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두려웠다. 아니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처음 일을 당하고 난 뒤 장호는 복수심과 분노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놈들을 죽이겠다고 발악을 했다. 관군도 마적 떼를 소탕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장호는 스스로 마적 떼를 해치우겠다고 방방 뛰었다. 무술을 익혀 복수하겠다고 저잣거리의 무도관이란 무도관은 죄다 돌아다녔다.

하지만 무술을 익히려면 돈이 필요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세상은 작은 호의도 베풀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적 떼의 정체를 알고 난 뒤 두려워졌다. 복수심 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장호를 휘감았다. 마적 떼는 악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관군들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세력이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관과 결탁하여 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형. 엄마, 아빠에 대해 얘기 해 줘.”

동생의 말에 장호는 아득한 옛 기억을 더듬었다. 자상한 엄마와 무뚝뚝하지만 가정에 충실했던 아빠. 밝은 달을 바라보며 장호는 동생에게 부모님에 대해 나직하지만, 그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 이제 그만 가자.”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엄마, 아빠. 또 올게요.”

장호와 장유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구릉을 내려왔다. 마을은 어느새 적막으로 휩싸여 있었다. 교교한 달빛만이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3


자리에 누운 장호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부모님의 기일이면 늘 그랬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참상이 선명하게 떠올라 잠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곤 했다. 결국 장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생은 깊이 잠들었는지 미미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마당에 나서니 푸른빛의 차가운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공기마저 삼켜버린 채 서늘한 기운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장호는 달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천천히 마당을 거닐었다. 장호는 옆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이들이 묵고 있는 집 중 하나였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장호의 눈에 낯선 물체가 들어왔다. 마당 한가운데 엎드린 모습이 사람이 분명했다.

‘누구지?’

장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낯선 자를 살폈다.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인가?’

불길했다. 난데없이 마당 한가운데 낯선 자의 시신이라니. 장호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이끌려 조심스레 시신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장호가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려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자가 움직였다.

“헉!”

장호는 낮은 비명을 토해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사, 살려줘.”

장호를 발견한 그 자는 애절한 눈빛으로 장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호는 두려운 마음에 뒷걸음질 쳤다.

“사, 살려줘. 제, 제발······.”

그 자는 장호가 자신의 생명 줄이라도 되는 양 혼신의 힘을 다해 손을 내밀었다. 장호는 두려웠다. 하지만 애절한 그 자의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피에 젖은 그 자의 모습은 십년 전 보았던 부모님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장호는 두려움을 떨쳐내며 그 자에게 다가갔다. 그 자는 혼절한 듯 어느새 엎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코끝으로 손을 가져갔다. 미약하긴 했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장호는 서둘러 그 자를 들쳐 멨다.

“형. 누, 누구야?”

장유는 장호가 들쳐 메고 들어온 낯선 사내를 보고 놀랐던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장유야. 어서 윤 의원님을 모셔오너라.”

장호는 대답대신 장유에게 말하고는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퍼왔다. 그리고는 그 자의 핏물에 젖고 너덜너덜한 옷을 벗겼다. 그 자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난무했다. 핏물은 굳어서 딱지를 만들고 있었다.

장유가 뛰어나가고, 장호는 그 자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피 흘림은 멈췄지만 더운 날씨 탓에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 장호는 의원이 오기 전까지 그 자의 몸을 닦고, 상처에 좋은 약초를 으깨 정성스레 발랐다.

잠시 후 의관도 제대로 정제하지 못한 채 윤 의원이 왔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환자가 있기에 이렇듯 소란이란 말이냐.”

윤 의원은 달콤한 수면을 방해당한 것이 못마땅한 듯 짜증스런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터라······.”

장호는 송구스러운 듯 목을 움츠렸다.

“어디 보자. 허어, 이것 참 이러고도 살아있다니······.”

그 자의 몸을 살피고, 진맥을 한 윤 의원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장호가 보기에도 살아있다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그 자의 몸에 난 상처 한두 개만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깊은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치료를 마치고 한숨을 토해내는 윤 의원에게 장호가 물었다.

“워낙 건강한 몸을 지닌 자라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 처방대로 약을 하루 세 번 잘 다려 먹이고, 몇 달 잘 정양하면 괜찮을 것이야.”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언제쯤 깨어나겠습니까?”

“글쎄, 원체 건장한 사람이니 하루 이틀쯤 지나면 깨어날 것이야. 하지만 무리하지 말아야 하네. 아무리 건강한 몸이라도 이 정도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움직이다간 큰 변을 당할 수 있어.”

윤 의원은 나이에 맞지 않게 건장한 체구를 지닌 그 자의 잠든 모습을 보며 말했다. 장호가 보기에도 웬만한 젊은 사람 못지않은 몸이었다.

“난 이만 가야겠다. 처방약은 준비해 둘 테니 아침에 가지러 오너라.”

“아, 예. 수고하셨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받아주십시오. 부족한 비용은 나중에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윤 의원에게 엽전이 든 쌈지를 건네며 장호가 송구스러운 듯 말했다.

“이만하면 되었다. 내가 네놈에게 언제 돈을 달라한 적 있느냐?”

윤 의원은 쌈지를 확인도 않고 되돌려 주며 방을 나섰다.

“그래도······.”

“되었다니까 이놈아. 그 돈으로 애들이나 잘 건사하여라.”

“매번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장호의 눈가가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아서라. 사내놈이 눈물이 흔하면 안 되는 법이다.”

윤 의원의 말에 장호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곤 허리가 부러져라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를 잃는 참상을 겪은 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을 때 윤 의원도 끼어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회성 도움에 그쳤지만, 윤 의원은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장호와 아이들이 아플 때면 무료로 진료를 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때때로 금전적인 도움도 주곤 했다.

“그나저나 무림인 같은데, 괜한 분란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로군.”

장호의 배웅을 받으며 사립문을 나서던 윤 의원이 장호와 그 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중얼거렸다.


작가의말

이 글은 예전에(기록을 보니 8년전이군요.)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자판을 두드려 몇 시간만에 완성한 글입니다. 하지만 처음 생각이 떠올랐을 때와는 달리 기발하지도 참신하지도 않아 수정이나 퇴고를 거치지 않고 방치했던 글입니다.

그러다가 몇 해 전에 모사이트에서 무협단편을 공모하기에 오탈자만 수정하는 선에서 응모했지만 보기좋게 떨어졌습니다.

이번에 공모전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컴퓨터를 뒤지다가 이 글을 발견하고, 이 글을 장편화하여 공모전에 참여해 볼까 하다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두기는 아까워서 이렇게 읽어보시라고 올려봅니다. 처음 썼을 때와 달라진 것 없이 그저 오탈자의 수정과 어색한 문장을 손보는 정도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잘된 글도 아니고 재미있는 글도 아니지만 여러 좋은 작품들을 읽으시다가 잠시 쉬어간다는 기분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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