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를 걷는 황제

37화(2)

“조금, 진정이 되셨습니까?”

“하아, 하아······대체 뭐야, 왜 사라지지 않는 건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길리안은 라잔을 보면서 만들어낸 허상의 존재, 그가 이세계에 실존하는 이상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왜 자꾸 영체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거지?

물론 영체로 나타나는 길리안의 모습은 라잔과는 당연히 달랐다. 바라스 제국사에 등장하는 길리안은 그야말로 환상 속의 세상에서나 존재할 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도록 구상된 허상의 존재이니까.

어느 순간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눈앞에 앉아있는 길리안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더욱 진지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다르게 황제를 대하는 것이 아닌, 옛 친구를 보는 아련하고도 슬픈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비록 신이 폐하의 진명을 입에 담을 수 없기에 폐하의 존재를 실증하기 어려우나, 폐하께서 마음 한 곳에 가지고 계신 제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에 제가 이곳에 나타날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고에 뚫려있는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실로 아름답고도 이질적인 풍경이군요. 폐하께서는 이곳이 마음에 드신겁니까?”

“그래, 이곳이 진짜 내가 사는 세계다. 그러니 어서 제국으로······.”

말을 이어가려다가 문득, 그의 말에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지난 1년간 꽤 여러 차례 나를 찾아온 그는 단 한 번도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며 풍경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니르바나 길리안, 바라스 제국 선봉기사이자, 황제 폐하의 유일한 벗. 제 존재가 바라스 제국이 존재한다는 것의 증거요, 폐하와 같이 살아있는 역사이옵나이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는데, 대체 왜?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건가, 아니면 아버지의 사진을 본 것 때문에 다시 옛날 기억이 상기돼서? 모르겠다. 정말로, 또 다시 내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건가?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상향의 존재인 눈앞에 서있는 기사 길리안, 실존하는 ‘나’와 어머니, 그리고 수많은 사용인들. 그들 모두가 실존하는 존재이자, 어느 한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나의 기억들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1초, 2초, 귓가에는 방안의 백색 소음만이 조용히 내려앉았고, 길리안도 가만히 있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구나, 결국은 둘 다 나였던 건가.’

바라스 제국의 위대한 황제도, 이세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소설가 이상위도, 전부 나였다. 두 존재는 서로 나뉘어 격리된 각각의 개체가 아닌 하나로 합쳐져 있는 단일 개체.

황제가 곧 소설가이자, 소설가가 곧 황제였던 것이다.

비록 이세계에 몸을 돌린 지금은 제국으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 마음 한편에 그곳의 존재를 기억한다면,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의 세계, 영원불멸의 이상향. 와이즈 대륙, 바라스 제국, 모두가 내가 존재했던 세계이자, 내가 꿈꾸던 세계, 인간임을 뛰어넘어 두 세계를 탐험하는 존재.

그것이 나, 상상이라는 힘을 가진 이상위라는 ‘소설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