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러고 보니 도련님, 오늘은 아침부터 외출이 있으신 날이셨죠.”
방안을 정리하던 라잔이 평소보다 더 재빠르게 청소를 끝마치고 나서 옷장으로 다가갔다. 곧, 옷장을 열고 몇초 동안 가만히 내부를 응시하더니 노련한 손놀림으로 몇 종류의 옷을 꺼내서 침대 위에 늘어놓으며 말했다.
“오늘 가시는 자리에 걸맞은 의상들로 추려봤습니다. 이들 중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입으시면 완벽할 겁니다.”
요리사 아저씨나 집사장 할아버지처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가 추천해 주는 것은 한 번도 나쁜 적이 없었다. 한때 의상 디자이너를 겸임했다는 명성답게 선정한 옷들로 보나, 단순히 그의 겉모습을 보고 따지고 보면 확실히 차이가 있었기에 신뢰할 만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살펴볼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나, 명성도 명성이지만 평소 스스로를 가꾸길 좋아하는 라잔답게, 그가 추천하는 의상들은 해당 자리에 어울리는 완벽한 코디를 해줄 정도로 눈썰미가 좋았다.
외출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의상을 입고 거울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나니 살짝 긴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담당편집자와는 수도 없이 많은 미팅을 가졌다지만, 이번에는 공적인 자리에서 작가가 된 이후로 난생 처음 해보는 팬 미팅에 인터뷰라니······.
당연 망상에 불과하지만 제국의 황제 출신 답게 만인의 앞에 서는 것은 익숙하다만, 열정적으로 추종하는 이들 앞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꽤 많은 고민을 정리하며 대본까지 써둘 정도로 설레면서도 걱정됐다.
긴장한 모습이 눈에 보였는지, 라잔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따라가고 싶지만, 사모님께서 긴급회의가 있으셔서 동행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실수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나 참,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 말고 어서 어머니한테 가보세요.”
단순히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 만으로도 어느 정도 긴장이 해소된 느낌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이르지만, 저택을 나와 정원 뒤편으로 향했다. 눈앞에 진열된 차들을 보며 주머니 속에서 검은색의 뭉툭하게 생긴 작은 리모컨 같은 것을 꺼냈다.
‘이 버튼이었나.’
오랜만에 손에 쥔 전자식 자동차 열쇠에 버튼을 누르자, 열을 맞춰서 세워져있는 차들 중 하얀색의 외면으로부터 광택을 뿜는 차가 응답하듯 소리를 냈다.
“삐빅, 철컥!”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유명 회사의 로고가 장식으로 붙어있었다. 역시 부유함을 과시하듯 여느 비슷한 국산차가 아닌 이질적인 외형으로 보아 아마 국내에서 찾기 힘든 외제차 중 하나인 것이 분명했다.
‘기억은 난다만, 돌아온 뒤로는 한 번도 직접 운전해 본적이 없는데 이런 비싼걸 타도되려나······.’
라잔의 말로는 스스로를 황제라 생각할 때, 이세계에서 본인의 자리에 걸맞은 전차를 사야한다며 자신이 번 돈으로 직접 샀다던데, 그 당시에도 혼자서의 힘으로 꽤 벌어두었는지 지금도 통장에 잔고가 남아있었다.
아쉽지만 8년 전 과거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대부분의 기억은 살아났다면, 중간 중간에 빠진 세밀한 기억들은 완전하게 돌아오지 못했다. 아직까지 부족한 기억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지만 뭐, 지금의 내게는 크게 중요하진 않다.
“······앉아보면 제대로 기억나겠지.”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열쇠의 다른 버튼을 누르자,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며 마치 용이 포효하듯 우렁찬 엔진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나갈 것 같은 위용을 떨치는 차의 내부 핸들 뒤에 적힌 숫자들이 백색광을 뿜었다. 눈앞에 보이는 장치들에 몇 번 손을 대며 기억을 더듬으니, 이미 숙달된 몸이 자동적으로 출발할 준비를 끝마쳤다.
“어렵지 않군.”
발을 구르자, 신호에 호응하듯 우렁찬 포효와 함께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아아앙!’
감각대로 핸들을 돌리며 저택을 덮은 숲을 가로질러 빠져나갔다. 간만에 직접 느끼는 속도감은 꽤나 즐거웠다. 말과 전차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드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두 가지를 압도적으로 누르는 이 속도감은 실로 대단했다.
그것도 한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도로로 나오는 순간, 이미 모여 있는 차들과 순식간에 모여드는 다른 차들로 사방이 막히자 느리진 않았지만 최대 속도로 달릴 수가 없었다. 물론 국법에 따라 일정 속도 이상을 내는 것이 불법으로 책정되어있긴 하다만······, 이건 너무 느리잖아!
빡빡한 교통체증을 이기고 고속도로로 들어가니 그나마 속도가 나긴 났다. 평일인데도 이정도의 인파라니, 역시 이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두는 평화롭지만 조용한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 말이다.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을 이용하니 확실히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늦을거라고 생각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미팅장소에 도착하자, 역시나 카페의 주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서 오세······어? 이상위 작가님 아니세요?”
내부로 들어가자 카페 주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나 또한 놀랐다. 미팅과 인터뷰 진행팀은 내게 가게 전체를 임대 한다고만 알려줬지, 설마 가게 주인이 나를 알아볼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기에.
한 편으로는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 며칠 전에 저희 가게에서 작가님 미팅이랑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요청할 때 그때 사진을 봤거든요, 아참! 작가님이 그 황제라니, 저 옛날부터 작가님 팬 이였어요!”
“아하하······, 그, 그러시군요.”
나보다 더 신난 얼굴로 들떠있는 그를 보니 기분이 좋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떠나가질 않았다.
시작까지는 아직 1시간 하고도 10분 정도가 더 남아있었다. 가만히 기다리기는 지루하니 무언가 마실 거를 주문하자 그는 흔쾌히 가게의 자랑이라는 특별한 커피를 한 잔 타주었다.
확실히 이 카페는 도시에 널려있는 카페들의 커피와는 다르게 뛰어난 향과 맛을 담고 있었다.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작가님을 실제로 만나고 이렇게 장소까지 마련해드릴 수 있다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하하하!”
커피 향을 음미하고 가게를 둘러보며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집필한 모든 책을 수십 번도 더 읽었는지 대부분의 내용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 작가의말
공모전이 끝났네용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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