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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4cachips
작품등록일 :
2021.05.12 11:37
최근연재일 :
2021.06.15 21:15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373,994
추천수 :
16,229
글자수 :
279,891

작성
21.06.01 20:01
조회
6,414
추천
348
글자
20쪽

귀향, 숲속에서 살아남기(2)

DUMMY

히라 유크실라.

시일린 유크실라.

그리고.


‘콜트먼 에인다로크.’


세 명이 모인 유크실라의 귀빈실에서, 히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표 취임식 때 잠깐 멀리서 얼굴을 지켜본 적이 있다.

정말로 멀리서 잠깐 보기만 했을 뿐이라, 그에게는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처음의 록스트린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와 한 테이블 앞에 둘러앉을 줄이야.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재, 재, 재혼을······.”


어머니가 콜트먼 변경백과 재혼을 결심하셨다!

영지를 수복하는 데 도움을 받은 일로 연이 생긴 걸까? 반쯤 놓고 있던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히라, 끝까지 들어야지. 하는 척만 하는 거야.”

“좋지 못하다, 시일린. 일단은 진심이어야 모두가 믿을 게 아니냐.”

“넌 수치심도 없니? 지금 난 딸 앞이야.”

“어차피 둘은 친구라 하지 않았나.”


그럼 나는 록스랑 어떤 관계가 되는 거지?

남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야?

아니, 그런 것보다도.


“너란 놈은······ 아들이 하루아침에 실종됐는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거야.”

“알고 있었다.”

“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다만 녀석이 내게 말했지.”


콜트먼은 벌건 대낮에 학생 서른 명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니.


“혹여 위험에 처하더라도, 반드시 모른척해 달라고.”

“무슨······.”


콜트먼은 유크실라에 지원을 보낸 것도 록스트린의 의지였다고 했다.

머릿속에만 있었을 뿐 한 번도 드러낸 적 없었던 콜트먼의 정계 진출을 진즉에 알아보고 있었다 하고, 제 딸을 이용했다는 건 괘씸하다 하더라도 유크실라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록스트린의 덕이다.

이제 영지가 안정되고 나면 에인다로크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할 것이며, 그로 인해 인연을 틔웠다고 할 계획이다.

이만큼 매끄러울 수가 있나?

말도 안 되지만, 유크실라가 마물에 의해 습격당한 것조차 록스트린이 의도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방책이라면 내게 없다. 알아서 잘 하지 않겠나.”

“그것 때문은 아니고. 네 아들이 내 딸한테 맡겨둔 수표를 훔쳐갔어.”

“배상하지. 얼마를?”

“10억 G.”

“흠.”


콜트먼이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찻잔을 한 번 들어보지만 비어 있다.

시일린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에인다로크에 10억 있어?”

“······흠.”

“말을 해, 자식아.”


에인다로크는 곳간에 곡식을 쌓아둘지언정 재물을 쌓아두지는 않는다.

영지의 재산은 새는 곳 없이 투명하고 정확하나, 대부분 실시간으로 북부 방벽에 소모된다. 그만한 여유는 없다.


“어떻게 된 일이지?”


콜트먼의 시선이 히라를 향했다.

대답을 직접 듣고 싶다는 뜻이었다. 히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록스가 제 방에 왔었어요.”

“너는 걔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들여보낸 거야. 여자애가.”

“저, 저는 별로, 다른 애들보다 예쁘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방을 꾸미려는데 참고할 게 필요하다고 했었죠.”

“방을 꾸민다?”

“네, 네.”


콜트먼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록스트린은 제 방에 뭘 가져다 두는 걸 매우 싫어한다만. 타룸의 방에는 책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럼 뭐, 핑계라는 뜻이네. 그러니까 히라, 걔가 특별히 널 건드리거나 하진 않았다는 거지?”

“록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럴 사람은 아닌데 수표를 훔쳐가서 10억을 맘대로 휙 써 버리는 거고?”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너도 참.”


시일린이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록스트린이 잘못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단순히 그 얼굴에 반했기 때문일까. 그가 편지를 보내 영지를 구했기 때문에?


‘분명 내 인생인 것 같은데, 실은 전부 기대에 맞춰 살고 있었던 거지. 부모, 선생, 친구, 누구라도.’


아니다.

스스로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자신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별로 재미는 없어.’


그 짙고 푸른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신에게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히라는 한 번 더 말했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화를 낼 줄 알았다.

시일린이 손을 들었고, 히라는 눈을 꼭 감았다. 시일린은 가만히 히라의 주홍빛 머리칼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럴 때 보면 내 딸 같긴 해.”

“그 용병단에게 무슨 의뢰를 맡겼기에 10억이 들었나.”

“알아보라고 시켰는데. 슬슬 올 때가 됐지.”


똑똑.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은 한 장의 문서를 전달한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시일린이 미간을 좁혔다.


“닷새 전 아레아스로 출발했다고? 120명 전부?”

“실종되기도 전이 아닌가.”

“그럼 지금 아레아스에 있다는 거야, A반 학생들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둘째 치고. 알면 왜 말을 안 했대.”


원래 비밀리에 맡긴 의뢰는 의뢰 내용을 상세하게 밝힐 수 없지만, 수표가 유크실라의 것이다 보니 알아낼 수 있었다.

록스트린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사건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다면, 막을 수도 있지 않았나.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콜트먼 또한 생각에 잠겼다.

황녀인 아이님을 포함한 제국의 수많은 귀족이, 다른 왕가의 자식이 교정 한복판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를 방치했다.


‘당해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확실하다.

실종된 31인 전원은 무사하다.

록스트린이 지켜냈을 것이다. 닷새 전에 미리 용병단을 출발시킨 것을 보면 시간까지 재고 있다.

실종되고, 그들 모두가 무사히 돌아와서. 그로 인해 무엇을 얻는가.


‘아니.’


콜트먼이 고개를 저었다.

실상 그들이 얻는 것은 없다.


‘반대다.’


‘누가’ 사건을 일으켰는가.

그 누군가는 반드시. 모든 것을 잃는다.

이것마저 덮어둘 수는 없다. 황녀가 납치를 당했다. 제국은 이런 터무니없는 사건을 벌인 자들을 끝끝내 찾아 구족을 멸할 것이다. 록스트린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하나 에인다로크에는 적이 없다.

영지에서 나가지도 않은 록스트린이 누군가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을 리도 없다.


“적.”

“적?”

“제국의 적은 누구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시일린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제국에 맞설까 싶겠지만, 실은 서머터지를 졸업한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리덴?”

“그래.”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 사건을 리덴이 주모했다고, 록스트린이 그리 말하고 있다.”


취임식 때 이미 보여주었다.

록스트린은 제국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마법에 한한 대부분의 독점적인 권리는 리덴에 있다.


‘서머터지는 공격받고 있습니다.’


이전 서머터지를 습격한 것이 리덴이라 확신하여도, 정황상의 증거뿐이다. 그러니 록스트린의 생각대로 되었다.

제국은 상급 마물의 습격을 제국 내부의 분란으로 일단락지었다. 리덴에 대한 그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규모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뿐, 그리 생각하면 두 사건은 비슷하다.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리덴은 자만하고 있다.


“그게 말이······ 아니, 뭘 어떻게 하다가 결론이 그렇게 나는데. 좀 짜증 나는 놈들이기는 해도 막 나가진 않잖아.”

“기어코 이번에 선을 넘은 것이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님 정도는 직접적으로 해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도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수위를 높이다 결국 선을 넘고 만다. 고작해야 열여섯의 아이들이라 생각했다면, 반드시 그 자만에 대가를 치르게 된다.


빈틈이 있을 것이다.

31명의 A반 학생 중에는.

록스트린 에인다로크가 있다.


“애들은 아레아스에 있는데?”

“아레아스도 가깝지는 않다만, 아예 대륙 반대편인 엔피리안도 있다. 리덴 본국도 있었을 테고. 하지만 장소를 지정할 수 있었다면, 나라도 아레아스를 택했다.”


A반 학생들이라면 아레아스에서도 자력으로 귀환할 수 있다.

너무 멀거나 위험한 곳에 떨어뜨려 후환을 크게 만들기보다는, 적당한 위기 상황만을 조성한다. 처음부터 서머터지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주 적합하다.

겉으로 드러날 범인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놈들일 테고. 물론 그들도 제국에게 척살당할 게 분명하다.


“그럼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10억 G나 필요한 일이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광산을 복구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마련하려면 할 수는 있어. 네 아들이 저지른 거니까 에인다로크 이름도 빌릴 거고. 돈은 신경 쓰지 마.”

“다행이군.”

“너네 쪼들리는 건 제도 귀족 다 알아. 제 밥그릇 내주기 싫을 뿐이지.”


그 돈으로 납치된 학생들을 구한다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었다. 오히려 투자에 가깝다.

이미 특임대의 마법을 활용해 뎀펠의 광산을 더 확장할 수 있게 됐다. 콜트먼에게 괜히 앓는 소리를 했을 뿐, 부담이 엄청난 건 아니다.


“지금 내 영지에 특임대가 와 있는 건 걔도 알 거 아니야. 왜 굳이 히라 방에 있는 수표를 훔쳤어야 했는데. 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남부가 아닌 제도의 용병단을 고용했으니, 거리상 비용이 더 드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10억이다.

대규모의 용병단을 일부도 아니고 통째로 고용해서 아레아스까지 내려보냈다. 그들보다 특임대가 못났던가? 훨씬 강력하고 확실한 전력이 아닌가.

에인다로크의 특임대를 사용할 수는 없으면서, 그만한 전력이 필요할 만큼의 위기가, 그들이 귀환하는 동안 생긴다······.


“이번에 록스트린이 취임식 때 발언한 내용을 들은 적이 있나?”

“아니. 왜? 뭐 소문은 무성하던데.”

“배포된 사본은 카닌이 내게 보여주어 알고 있지. 제2황녀와 록스트린이 만든 독자적인 이론이다.”

“신입생 둘이 이론을 만들어? 똑똑하네.”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으니, 새로운 진보가 가끔 학생들의 손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자주 쓰이는 마법의 효율이 늘어난 정도가 아닐까.


“기초이론이다.”

“······기초이론?”

“속성, 형태, 풀이,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아. 마법을 발현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재고하고 있으니 벌써 서른 번은 읽은 것 같군.”

“그런 게 가능해?”


콜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방식이 굳을 대로 굳어버린 마법사들에게는 불가능하다. 자신도 실패했다. 메이지 카닌이 겨우 1성급의 마법을 성공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 성공했다.

마법을 익힌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학생들은 어떨까. 하물며 1년조차 지나지 않은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익힌다면?

상상이론.

그 발칙한 이론의 가치를, 콜트먼도 가볍게 짐작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것이 새어나갔다면.”


록스트린은 서머터지의 교수들을 믿는다 하였으나 당장 카닌만 해도 자신에게 사본을 보여주었다. 배포한 사본에 본인만 보라는 제약을 걸어두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쯤이면 리덴 측에도 소식이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다만 리덴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설령 대상이 황녀라도, 리덴은 죽이려 들 수 있다.”


제국의 새로운 무기.

후환 따위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급박한 사안이다. 철저하게 준비할 시간이 없다.

꼬리는커녕 머리부터 들이밀지도 모른다. 그걸 유도해낸다면. 그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대륙의 정세는 하루아침에 뒤바뀐다.


‘특임대의 움직임은 크다.’


내륙을 거치는 유크실라로의 지원은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지만, 남부 연합전선을 지나 국외로 이동하는 것까지 비밀에 부칠 수는 없다.

특임대가 먼저 움직인다면 리덴은 발을 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일개 용병단이라면? 밀어붙여볼 만하지 않은가.

강행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내다보고 있었던 거지?


예정도 없던 서머터지에 재물을 훔쳐가며 입학해, 유크실라의 아이와 친분을 쌓고, 특임대를 움직여 에인다로크가 정계에 진출할 명분을 쌓았다.

동시에 성적은 역대 최고점의 1등. 리덴의 적의를 눈치채고, 방심하게 만든 뒤, 황녀와 함께 기초이론을 만들어, 리덴의 조급한 공격을 유도했다.


좁은 방구석을 나가,

두 달 남짓한 시간.

그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그게, 대체.”


시일린도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건 천재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된다.

같은 인간이 맞기는 한가?


“대체 뭐 하는 애야. 응? 너 아들을 어떻게 가르친 거야.”

“가르친 게 없다. 도망이나 다녔지.”


억지로 붙잡아 놓고 이론서를 달달 외우게 해야 겨우 하나씩 마법을 익히던 녀석이다.

그 와중에 록스트린의 경지가 3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비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군.”


마침내 지금에 이르러.

이제는 아예 제 목숨에 황녀의 목숨까지 걸고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성공하면 제국은 명실상부한 대륙의 패자가 될 것이요, 실패하면 죽는다.


“용병단이 닷새 전에 출발했다 했나.”

“어떻게 할 거야? 모르는 척을 하라고 해도 난 싫어. 리덴의 전력도 모르잖아.”


10억으로 고용한 용병단으로도 부족하여, 혹여 학생들이 화를 입게 된다면.

그렇게 들인 10억마저 무의미해진다. 시일린으로서는 아이님과 록스트린이 반드시 생환해야만 했다.


“네 말이 맞다. 지금쯤이면 적당하겠군.”


리덴이 결단을 내리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모르는 척을 하라고 했으니 사흘간 가만히 기다렸다.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용병단과 학생들의 재주만으로도 충분해 헛걸음이 된다면 웃으며 돌아올 수 있겠으나, 이제 콜트먼은 록스트린을 잃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황실에 다녀오겠다.”

“와, 세게 나오네.”

“네가 네 딸아이를 아끼는 만큼은, 나도 내 아들을 아낀다고 해두지.”


실종 이후 3일째.

황실 직속의 기사 1,000여 명이 남부 연합전선을 건너 아레아스로 향했다.


*


“힘들어······.”

“발바닥 아파.”


기실 학생들의 체력은 좋게 말해도 봐줄 만한 것이 못 된다.

3레벨이었던 나만 해도 운동장 세 바퀴를 제대로 돌지도 못했다. 그게 평균 수준이라는 말인즉.


“록스, 얼마나 더 가야 해?”


절반은 그것마저 못한다는 뜻이다.

강에 도착하기도 전에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던 결과였다.

평민들은 웬만하면 3레벨이거나 4레벨인데, 귀족이라도 그나마 남학생들은 어렸을 때 검술 따위를 가볍게 배운다.

반면 여학생들의 신체 조건은 아이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분만 더 가서 쉴게요.”


새삼 쫓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구태여 힘들게 할 필요도 없으니 이동은 천천히 하기로 했다.


“아휴. 이 속도면 제도까지 31일 정도 걸리겠다. 돌아가자마자 기말고사겠네!”

“히익!”

“지, 진짜로요?”

“왜 겁을 주고 그러십니까, 전하. 연합전선까지만 가면 차를 타고 이동하면 돼. 거기까진 아무리 늦어도 열흘이면 도착하고.”

“다행이다······.”


내 옆에 앉은 아이님이 나에게만 보이도록 몰래 브이자를 그렸다. 하여간 사소한 말 한마디도 대충 안 한다.

괜히 꺼낸 말이 아니다.

사실 열흘도 막상 움직이기만 한다고 하면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31일을 언급하면 어감이 다르다.

열흘 정도면 괜찮지 않나? 얼핏 드는 생각. 이런 게 은근히 효과가 크다. 무엇보다 열흘이 아니라 이틀만 가면 된다.

이틀이면 캠핑이나 다름없지.

불 피우는거? 불 마법 있지. 물? 물 마법 있지. 사냥에는 바람 마법이 좋고, 잠자리는 흙 마법으로 대충 만들면 된다.

강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일도 없고, 그쪽에 사냥할 동물도 많다.

산 좋고 공기 좋고 물 맑고.

이게 캠핑이 아니면 뭐야.


“표정이 밝네, 록스.”


5분이 지나 학생들이 근처에 적당히 널브러졌다. 나도 아이님을 내려놓고 바위에 기대게 했다.


“이제 좀 쉰다는 느낌입니다.”

“지금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쉬어보겠어요.”


방에 있으면 한시가 아까우니 책을 볼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못 하는 거니까 용서가 된다.

못해도 2주는 날려 먹은 셈이니, 기말고사 성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잠도 좀 자고 그래. 록스는 마주칠 때마다 눈이 죽어 있어.”

“제 몫까지 전하가 다 주무시잖습니까.”

“뭐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나도 요즘엔 록스 때문에 많이 못 잤어.”


아이님은 발목을 매만지다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몇 단어를 덧붙였다.


“음. 그러니까아. 이론, 때문에?”

“예. 지금쯤 난리가 났겠죠?”

“그래도 나는 훨씬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어려워하니까 조금 실망했어.”

“왼손 오른손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 왼손으로 글씨를 쓰라면 저도 세 살 때로 돌아갈걸요.”

“아하. 그렇게 말하니 딱 맞네.”


아이님이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나오니?


“전하는 아직도 아프실 텐데.”

“맞아. 안 아픈 척하고 있어.”


그나마 2층에서 이불 같은 걸 찢어 부목은 댔는데, 그것만으로 처치가 되었을 리는 없다. 외상이라면 몰라도 골절에 대처하는 약도 없고. 진통제 같은 건 더더욱 없다.

빨갛게 부어올라서 티가 나는데, 보는 내가 다 안쓰러워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다. 의지도 4레벨밖에 안 되면서.


“조금만 참아주세요.”


좀 더 신중했다면 아이님이 다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이들을 모두 끌고 내려오지 않고, 한 층씩 혼자 이동했다면 어땠을까.

마주쳤어도 나 혼자만 보였다면 오히려 달려들었을 텐데. 음, 이길 수 있었으려나?


“아픈 건 난데 왜 록스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인상 펴.”

“원래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파요.”

“다섯 살 때 아바마마가 했던 말이네. 록스는 아바마마가 아닌걸?”

“글쎄요.”


아이님을 낳은 건 황제겠지만.

아이님을 만든 건 나니까.


“비슷할지도 모르죠.”


솔직히 이벤트고 뭐고 따지기 전에, 아이님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프리드가 섭섭하겠지만 걔는 원래 좀 구르는 녀석이라. 괜히 의지 8레벨이 아니다. 그것도 써먹어야 의미가 있다.


“졸리다.”

“주무세요. 애들도 좀 자고 있던데.”


아직 점심때이기는 해도 눈을 떴을 때부터 일이 일이었으니 다들 피로가 쌓였다. 한 시간쯤 쉬었다 갈 생각이었다.


“그럼 이쪽에 앉아.”

“어······.”


툭툭, 아이님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제 바로 옆자리를 두들겼다. 대충 의도는 알겠다.

근데 거긴 너무 가깝지 않을까?


“다른 애를 부르시죠? 카밀라라던가, 데이지라던가······.”

“이쪽에 앉아, 록스.”

“네.”


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 안 해봤다.

주요 캐릭터들과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건 좋다. 내 말을 잘 들으면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겠지. 좋은데.

······너무 가까워지면 어떻게 되지?


“잘자, 록스.”


아이님이 내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네가 그러고 있으면 난 못 잔단다?

혹여 불편해하진 않을까, 바짝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어쨌든 앉아서 쉴 수 있는 걸로 만족하자.


“금방 돌아갈 겁니다.”

“······.”


대답이 없다.

그래, 잠이나 자라.


남부는 온화해서 그늘이라도 따뜻한 바람이 분다. 가끔 잎새 틈으로 햇살이 비치면 환한 금발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우움.”


그게 예뻐서 무심코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말았는데, 아이님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미안.”


미안해.


새근거리는 숨소리에도 묻혀 버릴 작은 목소리로.

언젠가는 꼭 해야 할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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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상상이론, 당신이 알고 있는 마법은 틀렸다(4) +38 21.06.09 5,656 302 13쪽
37 상상이론, 당신이 알고 있는 마법은 틀렸다(3) +40 21.06.08 5,945 337 14쪽
36 상상이론, 당신이 알고 있는 마법은 틀렸다(2) +27 21.06.07 5,863 331 13쪽
35 상상이론, 당신이 알고 있는 마법은 틀렸다(1) +58 21.06.06 6,208 365 13쪽
34 귀향, 숲속에서 살아남기(6) +37 21.06.05 6,166 379 17쪽
33 귀향, 숲속에서 살아남기(5) +31 21.06.04 6,140 336 14쪽
32 귀향, 숲속에서 살아남기(4) +36 21.06.03 6,171 349 12쪽
31 귀향, 숲속에서 살아남기(3) +40 21.06.02 6,134 349 14쪽
» 귀향, 숲속에서 살아남기(2) +30 21.06.01 6,415 348 20쪽
29 귀향, 숲속에서 살아남기(1) +16 21.05.31 6,459 335 14쪽
28 생사기로, A반 납치 사건(6) +48 21.05.30 6,512 385 13쪽
27 생사기로, A반 납치 사건(5) +32 21.05.29 6,564 335 13쪽
26 생사기로, A반 납치 사건(4) +22 21.05.29 6,659 356 14쪽
25 생사기로, A반 납치 사건(3) +26 21.05.28 6,719 325 13쪽
24 생사기로, A반 납치 사건(2) +30 21.05.27 7,097 362 15쪽
23 생사기로, A반 납치 사건(1) +50 21.05.26 7,264 426 16쪽
22 중간고사, 희망의 불씨(6) +25 21.05.25 7,191 379 14쪽
21 중간고사, 희망의 불씨(5) +14 21.05.24 7,260 332 15쪽
20 중간고사, 희망의 불씨(4) +30 21.05.23 7,472 341 13쪽
19 중간고사, 희망의 불씨(3) +34 21.05.22 7,721 34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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