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오리온 항성연합
[ 행성 마그마우 / 사령관 일행 ]
“당신 외계인이었어?”
온통 슬라임 천지. 당황스런 엘린의 시선이 슬라임과 마그마우족을 번갈아 이동한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슬라임은 무심한 척 먼 하늘만 주시할 뿐이다.
커다란 머리에 왜소한 팔다리. 개인용 이동장치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인파들. 마치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의 보행기가 줄지어 떠다니는 것만 같다.
마그마우의 중심도시에 들어선 지구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무엇보다 슬라임과 비슷한 외형의 마그마우족들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먼 훗날 지구인들도 이런 모습 일 테지...........”
사령관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시온과 엘린 그리고 슬라임을 대동한 그는 지금 마그마우족이 제공한 비행선을 타고 오리온 항성연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 중이다.
거대한 도시의 건물들 역시 이채롭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건물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비행선들이 얼기설기 맞물려 있는 모습이다.
언제든지 분리와 탈출이 용이한 배치. 전쟁과 위험이 일상인 모양이다.
도시 중앙의 거대한 탑 아래로 이동한 비행선이 정해진 자리에 안착했다. 자리배치로 보아 가장 말석인 느낌이다. 지구인들을 시작으로 여러 대의 비행선들이 순차적으로 자리에 배치된다. 의전 서열에 따라 크기와 색이 정해졌다.
비행선의 윗면은 모두 투명 재질. 방송용 화면인 듯 거대한 홀로그램이 행사장 위에 비춰진다.
탑 바로 아래에 상석으로 보이는 두 자리가 남아있다. 경건한 의식처럼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두 대의 비행선. 마그마우족의 지배자 마혼 의장. 그리고 11번째 신족 히스마인의 대사 히스마탄이다.
그들이 탄 비행선 뒤로 거대한 알들이 줄지어 들어선다.
“저게 피닉스의 알인가 보군”
태양계가 속한 ‘오리온자리 암’이 은하의 여러 나선팔 중 아주 작은 곁가지에 불과하다면 히스마인은 그 보다 크고 긴 ‘궁수자리 암’의 지배종족. 그들의 영역은 궁수자리 암의 상당부분은 물론 나선팔의 본 가지인 센타우르스자리 암에도 일부 뻗어있다. 오리온자리 암의 지배자 마그마우 조차도 그저 그들의 수많은 제후국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그마우는 히스마인의 하사품인 피닉스를 통해 오리온 암의 지배자로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오리온 항성연합의 실체는 히스마인의 승인 아래 마그마우가 오리온 암의 지배자임을 과시하는 자리일 뿐. 마혼 의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의전 서열에 따라 각 항성계를 대표하는 자들이 일장 연설을 이어간다. 하지만 내용은 하나같이 히스마인과 마그마우를 찬양하는 충성맹세에 불과했다.
“이제 곧 우리 차례군. 의전을 중시하는 모양이니, 자네도 이젠 슈트에서 나오게.”
각 항성의 대표자들 역시 격식을 갖춘 듯 화려한 의상 일색이다. 사령관은 슬라임의 슈트가 짐짓 걱정스러웠던 모양. 슬라임은 슈트에서 나오는 대신 마그마우족들의 이동수단처럼 슈트를 변형시켰다. 그래서인지 마그마우족과 더 구분이 어려운 슬라임이다.
메인 화면에 지구인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차례가 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온 인사말을 시작하는 사령관이다.
“위대한 신족 히스마인과 마그마우의 번영을 기원 합니다. 이렇게..........”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송출되질 않는다. 대신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마혼 의장의 특별초대로 참석한 지구인들입니다. 킬리언 관할 영역의 소수종족으로 오리온 항성연합의 새로운 회원으로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음 순서는 먼 길을 날아오신 히스마탄 대사를 위한 특별공연. 마그마우 최고의 뮤지션 블랭핑크의 무대입니다.”
현란한 불빛과 경쾌한 음악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자리에 주저앉는 사령관.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제대로 무시당했다.
하지만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본다면 당연한 결과다. 마그마우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는 마혼 의장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온 정성을 다해 히스마탄 대사의 의중을 살피는 그다.
불과 3일전 회의참석을 요청한 그들에게 이정도면 나름 호의를 베푼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갈 길이 참으로 멀게만 느껴진다.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해 마그마우 와의 관계 정립을 모색하고자 했던 노력도 허사가 됐다.
지구인들은 그저 수많은 제후국 중 하나인 킬리언 관할의 소수종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외교라는 것은 상대가 상대를 인정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마그마우가 지구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고작 피닉스 한 마리를 해치웠다고 지구인들에 대한 시선이 달라질리 만무하다.
수 천 억 개의 은하 중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에만도 수 천 억 개의 항성이 존재한다. 지름 10만 광년의 은하계에서 인류는 고작 1%도 안 되는 500광년 거리에 도달했을 뿐이다.
이제 시작이다. 이 거대한 은하에서 처음으로 외교무대에 첫발을 내딛은 지구인들이다.
하지만 지구인들에 대한 마그마우의 관심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분출됐다. 슬라임. 녀석의 모습이 중앙에 클로즈업된다.
걸그룹의 현란한? 춤사위가 한창인 가운데 지구인들의 비행선이 연이어 메인화면에 등장한다. 아마도 자신들과 비슷한 외모의 슬라임이 신기한 모양. 자신에 대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슈트를 원래대로 복원해 숨어버리는 슬라임이다.
[ 킬리언 항성계 인근 블랙홀 / 황금모함 ]
킬리언 항성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블랙홀 인근. 블랙홀과는 상당히 떨어진 위치지만 자기장 파동의 영향 때문인지 항모전단의 방어막은 주기적으로 물결치며 영향을 받고 있다. 블랙홀로 집결중인 블랙벌떼와의 첫 번째 조우를 앞두고 있다.
“과연 통할까요?”
“알지 않나? 내 실력.”
“오우. 얄미워라. 저 표정 좀 보세요. 중위님.”
“이봐요 오라버니. 얄미운 건 소령님이 아니라 오라버닌 거 알죠?”
“버블. 왜 그래? 내 맘 알면서..........”
“알긴 뭘 알아요! 그래도 같이 고생한 게 있는데. 어~쩜 그렇게 중위님한테만 그러실까?”
안달이 났다. 무휼의 머릿속에 아임유 그녀가 제대로 들어선 모양이다. 하지만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아임유. 넉살 좋은 무휼은 이유도 모른 채 일방통행 중이다.
“블랙벌이 눈치 채면 어떻게 하죠?”
화재를 돌리려는 아임유. 그런 그녀가 고마운 캐리어다.
“연구 중이던 블랙벌도 처음에는 경계하더니 곧 동료로 받아들였어. 군집이 크면 클수록 복잡한 확인절차가 비효율적일 테니까? 자기장 신호가 생각보다 단순해. 정해진 신호대로 응답하면 문제없지만 아니면 바로 공격하는............ 한번 인증되면 그 때부터는 원하는 신호가 아니면 바로 무시하더라고........”
“그래서 가짜 블랙 벌들을 침투시켜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고작 24마리라면서요?”
“우선은 내 예상이 맞는 지 확인해 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함장님. 벌들이 접근 중입니다.”
“이 구역은 피닉스가 없으니까. 조용히 합류시켜 보자고. 우선 한 마리만 투입시키게.”
통제실 모니터에 수천마리의 블랙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투함 대신 무인기 100여대가 출격해 녀석들의 진로를 차단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적 우위에 순식간에 파괴되는 무인기들. 무인기 사이에 숨어있던 가짜 블랙벌이 위장을 뚫고 놈들 사이에 합류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된 느낌. 가짜 벌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놈들이다.
“아이고 실력이 대단 하십니다.”
무휼이 기다렸다는 듯 공격한다. 하지만 캐리어는 예상 한 듯. 다음 카드를 꺼낸다.
“아무래도 무리겠지? 이번에는 진짜를 보내 보자고........”
이번에는 조금 작은 무리가 나타났다. 200~300마리 정도의 작은 규모. 무인기와 전투함, 항모까지 가세해 놈들을 공격하자 쉽게 활로를 뚫지 못하고 파괴되는 놈들이다. 그사이 잡고 있던 블랙벌을 녀석들 사이로 침투시켰다. 기다렸다는 듯 탈출한 벌은 곧 동료들과 함께 함선을 공격하기 시작. 항모와 전투함들이 물러나자 빠르게 블랙홀을 향해 사라졌다.
“역시 무리마다 신호가 조금씩 다른 모양이야.”
“그런데 어떻게 무사했죠?”
“다른 신호가 있었겠지. 데이터를 확보했으니 이제 남은 놈들도 합류시켜 보내자고.”
마찬가지로 작은 무리가 나타나자. 공격하는 척, 가짜 벌들을 침투시켰다. 이번에는 무리 없이 합류에 성공. 남은 벌들과 블랙홀을 향해 빠르게 사라져갔다. 침투한 가짜 벌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지구인들. 정보가 공유된 듯 피닉스들도 지구인들이 감시하는 영역에서 날아든 벌 때들은 공격하지 않고 있다.
“저게 설마 다 벌들은 아니겠죠?”
멀리서 볼 때도 엄청난 규모였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벌들의 군집이 어마어마한 크기다. 작은 외행성 정도. 가짜 벌들이 다른 벌들을 따라 벌집 안으로 들어섰다. 녀석들의 카메라를 통해 내부 모습도 고스란히 전송된다.
앞서 가던 블랙벌이 방향을 틀지만 가짜 벌들은 직진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중이다. 다른 벌들이 제지하는 듯 막아서지만 우회해 다시 안으로 파고든다. 다른 벌들도 이내 관심을 잃은 듯 더 이상 제지하지 않는다.
“아우 이제 눈이 팽팽 돌 지경이네? 소령님. 아니 함장님은 괜찮으세요?”
벌집 내부 화면만 계속 지켜봐서 인지 다들 피곤한 내색. 하지만 집중력 하나만큼은 타고난 캐리어는 연신 작업을 이어갈 뿐이다.
“여기서부터는 내 몫이니 다들 들어가 쉬게.......”
“아니. 그러면......... 저희는 먼저........”
옳다구나 일어서는 무휼. 남아있는 아임유와 버블, 발칸도 무휼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뜬다.
“그래도 저희가 도와드릴게 있지 않을까요?”
캐리어가 못내 안쓰러운 아임유다.
“아니 왜 존댓말을 써요? 중위님답지 않게?”
아임유만 바라보는 무휼. 그래서 더 심통 난 발칸이다.
“아. 제가 남자로 보여서 그러시는구나? 말 편하게 하세요. 중위님. 저 나이도 중위님보다 어려요.”
“음. 음. 그럼 말 노을께. 무휼. 함부로 찝쩍대지 마라. 너 내 스타일 아니다.”
역시 거짓말도 해본 놈이 하는 모양. 발칸에게 교육이라도 받은 듯 단호히 내치는 아임유. 그런데 진심이라곤 1도 없이 외운 티가 너무나는 거절이다.
머리보단 마음으로 생각하는 무휼이 모를 리 없는 거짓말이다.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무휼을 바라보는 발칸.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이다.
“난 안되겠어. 함장님께 마실 거라도 좀 가져다 드려야지.........”
다시 함장실로 사라지는 아임유. 그런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무휼이다. 하지만 이내 발길을 돌린다. 캐리어의 지루한 설명을 버텨낼 자신이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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