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 예정 금액
0G |
보유 골드 0골드 |
구매 후 잔액 0G |
*보유 골드가 부족합니다.
본문에 김경징이 강화도를 지키지 못했다고 나오는데요 흔히 김경징이 강화도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은걸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요 김경징은 강화도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은적이 없습니다 강화도를 수비하라는 임무를 맡은건 강도유수 장신입니다
덤으로 흔히 김경징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인 김경징은 강화도에서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띵가띵가 놀았다는 얘기도 근거 없는 얘기입니다 김경징이 술먹고 놀았다는 기록은 병자록(丙子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야사에나있는 내용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와 당시 강화도에서 봉림대군과 세자빈 원손을 모셨던 문관들이 남긴 문헌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뒤늦게 들어갔던 예조 판서 조익의 문집 '포저집(浦渚集)'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간 쓰레기 김경징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가 드러납니다.
'포저집'에 따르면, 조익은 김경징에게 "나라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죽고 싶다. 만약 내가 수백명의 병력을 얻어서 한 방면을 담당하며 육박전을 벌일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자로는 내가 응당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한탄하자, 김경징은 조익 앞에서 슬피 울면서 조익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1A_0250_010_0020_2006_004_XML
특히 병자록의 경우가 근거가 없는게 병자록의 저자인 나만갑은 병자호란 당시에 강화도가 아니라 남한산성에 있었고 김경징의 아비인 김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류가 북인 남이흥을 대사헌으로 추천하자 나만갑은 이에 반대했다가 김류에게 찍혀서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고
나중에 나만갑이 이조 낭관에 지망될때도 김류가 나만갑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에 적합하겠습니까."라고 비판해 막았고 인조는 김류의 의견을 수용해 "사론을 주도하고 조정의 의견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 했다."며 해주로 유배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나만갑은 김류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고 급기야 유배까지 보내지기도 했으니 김류에게 안좋은 감정을 품을 소지가 충분했죠 또한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주화파들의 행적을 편파적으로 비난하고 척화론자들의 언행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러한 그의 시선은 김류의 가족에 대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만갑은 김류의 아내, 즉 김졍징의 어머니와 김경징의 아내가 강화도에서 함락될 때 자결한 사실에 대해 김류의 손자이자 김경징의 아들인 김진표가 자살을 강요했다고 기술했죠,
김진표가 자신의 부인에게 자결을 강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이 광경을 본 김류의 부인과 김경징의 처도 자결했다는 것이죠 '연려실기술'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실려 있지만 당시 민심이 김류에게 극히 부정적이어서 김류 집안 부녀자들의 절개를 깍아버리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 또한 같이 기재했습니다
본문에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물으려면 김경징이 아니라 장신이 나와야 합니다 김경징이 맡은 임무는 세자빈과 원손을 경호하는 것입니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갑신 1번째기사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도(江都)로 향하게 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1
실제로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나온 기록에도 김경징은 강화도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은게 아닌걸로 나옵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1일 신묘 1번째기사
김경징은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원손(元孫)이 모두 병화(兵禍) 중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털끝만큼도 돌보며 염려하는 뜻이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니, 원손이 다행스럽게 모면한 것은 하늘이 실로 도운 것입니다. (중략)
장신(張紳)의 경우는 강도 유수로서 자신이 주사(舟師)를 총괄하고 있으면서도 천연의 요새를 잘 수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보병 수십 명이 두 개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도 방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면서 남보다 뒤떨어질까만 염려하였습니다.
답하기를.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혹 과할 듯싶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2021_001
김경징이 처형당한건 강화도를 수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세자빈, 원손 등을 피신시키지 못하고 제 한몸만 건져 육지로 달아나 버렸고 이로 인해 세자빈과 원손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청군의 포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Commen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