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아저씨 갑자기 뭘 그렇게 봐?”
업데이트 된 퀘스트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데 피아가 질문해왔다.
“퀘스트가 업데이트 됐어”
“흐음, 시나리오 퀘스트라 나는 놀 몇 마리를 잡아라, 이웃 주민을 도와라 이런 것만 받았던 것 같은데 대단하네 아저씨”
아무래도 피아는 나와 같은 퀘스트를 받지 못 한 듯하다.
게다가 피아가 받은 퀘스트의 보상은 빵 몇 조각, 혹은 스킬 등으로 일반적인 퀘스트의 보상들이었다. 나처럼 반가운 인연과의 재회등의 스토리와 관련되어 보이는 보상이 아니었다.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사람이 내가 유일하다는 말이 떠올렸다. 호라이즌은 케이시라는 인공지능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데 인공지능이 나에게만 이런 퀘스트를 주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만약 우연히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면? 한번 시작된 의심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방인 씨, 그동안 꽤 잘지내고 있었나봐?”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데 출입구에서 낯익은 여성이 들어왔다. 전신 갑옷을 입은 그녀 옆에는 작은 악마가 배게를 들고 떠다니고 있었다
“앤 설린??”
“씨!!”
놀란 내가 존칭을 빼고 이름만 부르자 앤 설린이 강하게 대답하였다.
“그날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나를 깨웠던 인간인가?? 흐음 그런데 몸에 저주의 기운이 느껴지네? 그리고 회복되고 있고”
데카메론이 내 주변을 쉴새 없이 날아다니면서 조잘대었다.
나는 앤설린을 보다가 전야제에서 그녀와 있던 일이 생각났다.
입술의 감촉이 떠오를 때쯤 앤 설린이 소리쳤다.
“그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여 거기까지만 하지그래?”
나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
“팀장님 영상 도착했습니다”
병수와 채현은 병수의 친구가 보낸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방금전 병수의 친구는 영상에 누군가 소리를 덧 씌운 흔적이 발견되었고 덧 씌워 진 소리를 지우고 원본의 소리를 살려냈다고 연락 해왔었다.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름?”
“현······.”
“현우, 김현우라고 해”
영상 속 현수는 자신을 현우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병수가 채현을 보았다.
“영상 속 김현수 씨 자신을 현우라고 소개하고 있네요”
“병수씨 이 일을 제가 말하기 전까지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채현이 입을 열었다.
채현의 반응에 무언가 심각한 일이라고 직감한 병수는 얼른 돈 이야기를 꺼냈다.
“네, 저는 약속하신 돈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비밀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친구 녀석한테 사례비도 줘야하고 가능한 한 빠르게 부탁드릴게요”
병수가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병수의 말을 들은 채현이 핸드폰을 빠르게 조작했다.
“지금 입금했어요 확인해 보세요”
“이렇게나!!! 사랑... 아니 충성하겠습니다. 팀장님!!! 비밀은 죽을 때까지 지키겠습니다!!”
입금된 돈을 확인한 병수는 호들갑을 떨더니 기쁜 마음으로 방을 나갔다. 채현은 방금 전 영상을 다시 보았다.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름?”
“현······.”
“현우, 김현우라고 해”
김현우... 도린과 함께 가상현실을 개발한 천재 프로그래머의 이름이 김현수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러기에는 의심 가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김현수 씨의 어머니를 보러 병원에 갔을 때 김현수 씨의 어머니는 김현수 씨가 마치 행방불명이라도 된 듯이 반응했었다. 그리고 김현수 씨에게는 행방불명된 형이 한 명 있었다. 하영이 그 이름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던 형이... 그런데 만약 하영이 알아내지 못한 게 아니고 자신에게 숨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수 씨가 시사회에 당첨되었던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그리고 우연이 아니라면 도린이 개입되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자신에게 비밀로 이런 일을 진행 할 수 있는 것은 도린 밖에 없었다. 실무를 자신이 전부 처리하고 있다고는 하나 도린은 자신을 뛰어넘는 천재였다. 분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자신한테 비밀로 하고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린은 항상 채현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가질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불가능에 가까운 환자들을 살려내는 그를 보면서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의료계에 계속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접었고 그가 계속 의사로서 있어 주기도 바랐었다. 동경하는 선배로서 남아주길 바랐었다.
그가 갑자기 가상현실 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고 그는 그런곳에 있으면 안된다고 얼마나 생각했던가. 그는 다시 의사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그를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도린을 찾아왔을 때 폐인이 된 도린을 보게 되었고 그가 의사로 복귀할 때까지 도와준다고 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채현은 이제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기대와 믿음을 깨고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린은 더 이상 예전의 도린이 아님을 말이다. 머리는 뛰어나지만 어수룩하고 착한 성격 탓에 채현을 속이는 것이 불가능했던 도린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도 도린을 동경하던 선배로서 남기고 싶은 마음에 꺼려하던 도린의 과거를 알야할 때 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할 때였다.
현수의 영상으로부터 시작된 의심과 상상은 끊임없이 확대되어 갔다. 김현수 씨 어머니의 반응... 정말 말도 안되는 상상이었지만 어쩌면 김현수 씨와 김현우 씨는 서로의 이름을 바꾼 채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현수 씨가 자신을 김현우라고 밝히는 것이 말이 된다.
“하지만 아직 김현수 씨의 행방불명된 형이 프로그래머 김현우라고 밝혀 진 건 아니야... 동명이인 일지도...”
선배와 친구를 믿고 싶은 채현의 마음이 다시 반박한다. 어떻게든 남아 있는 가능성을 떠올린다. 도돌이표와 같이 마음이 계속 반복해서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채현의 의심을 반박했다.
채현은 주저하고 고민했다. 지금 채현의 앞에 있는 문제가 열면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라는 직감이 채현에게 강하게 들고 있엇다.
하지만 채현은 진실을 마주하고 상자를 열기로 했다.
채현은 이 문제에 대해 특히, 도린이 싫어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개발 초기의 사건들 그리고 김현우 씨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김현수 씨의 플레이를 보지 못할 테니 메시지를 남겨야 될 것이다. 그리고 채현은 병수를 불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수는 김현우가 혼수상태가 되고나서 드림픽쳐스에 온 인물이었다. 김현우에 대한 일은 회사 내의 일급기밀에 가까워 얘기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으니 그는 김현우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돈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림이었다. 더 많은 돈을 준다면 비밀을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아무 일도 없이 돈을 주며 병수에게 자신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채현은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고민했다.
***
[이계의 연구원으로 한동안 자리를 비울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계의 연구원이 나갔습니다]
팀장의 연락...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이 됐지만 지금은 앤 설린과 데카메론과의 만남에 집중해야 했다.
“네 녀석은 마력이 너무 없어... 나는 이 여자가 좋다... 네 녀석과 함께 있으면 잠만 자야 된다고”
데카메론이 앤 설린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봉인되어 있던 모습이 무서웠던 것과는 달리
이등신이 된 악마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상황이 이렇네... 공주님께서도 내가 탈리스 피어를 갖고 있는 것을 허락 해 주시기도 했고 이대로 내가 갖고 있을까 하는데 괜찮을까?”
다른 사람의 스킬을 카피한다는 데카메론의 능력이 아까웠지만 마력 부족으로 어차피 나는 사용하지 못한다.
“네 저보다 사용할 수 있는 분이 갖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탈리스 피어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는 앤 설린으로부터 지난 접속 이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난 접속 때 사실 해롤드 시장은 루스펠란 쪽에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르하임 제국과 손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키기 위해 공주를 통해 자유 도시 연합이 반 르하임 정서를 갖고 있다는 정치쇼를 보여줘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앤 설린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주둔 중이던 르하임의 군대에 밀서를 전해주고 나서 꾀병을 부리며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고 한다. 연기를 실감 나게 하기 위해 약간 다쳤기 때문에 아픈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기사로서 자신은 조국을 위해 공주를 속여야 하는 건가? 아니면 거짓을 벗고 진실 된 태도로 잘못된 행동에 맞서야 하는 건가? 앤 설린은 고민했다. 그만큼 제국의 행보는 악평이 자자했고 제국이 선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적인 고민과 함께 장의 죽음은 앤 설린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 왔다.
머리로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얼굴을 볼때마다 의지하고 싶고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었다고 한다. 그녀의 상황과 마음은 장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크게 하였고 나를 보기가 괴로웠다고 한다.
데이트 후 그녀 내면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전야제 후 미련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고 공주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후는 한 편의 영화처럼 이야기가 흘렀다고 한다. 자유 도시 연합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주는 해롤드 시장의 거짓을 폭로 했고 앤 설린이 증인으로 섰다. 해롤드 시장은 명예와 민심을 잃었고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시장은 야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친 제국 성향의 정책을 펼쳤고 자유도시라는 이름과 맞지 않는 강압정치를 실시했다. 해롤드 시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껶던 자유 도시 몇 개를 병합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시장에게 반대하던 앤 설린을 포함한 기사들이 쫓겨나게 되었고 사람들은 기사도를 행하는 그들을 자유기사라고 부르며 칭송했다고 한다. 앤설린은 자유기사가 되어 각지를 방랑하다 공주와 신전의 사제인 딘의 제안으로 이번 여행에 호위로서 동행하고 있다고 했다.
앤 설린의 이야기를 듣던 중 그녀의 손가락이 보였다. 그녀는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정리가 과거를 삭제하거나 잊어버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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