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상담
체육대회도 문화제도 모두 마친 사토리가 다음으로 준비하는 것은 그닥 반갑지 않은 2학기 중간고사였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만큼 눈깜짝할 새 중간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험기간이 다가온 지금 사토리는 생각에 잠겼다.
'벌써 2학기 중간고사구나..'
2학년이 되면 히토미와 다른 반이 될 수도 있고 그 때도 미유키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돌연 떠올랐다.
게다가 내년이면 후유 코우카는 대학을 준비해야 하는 3학년.
지금과 같은 떠들썩한 일상이 분명 지속되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사토리는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토리! 기다렸어?"
"아니, 별로.. 그보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네?"
"헤헤.. 그래..? 평소랑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나처럼 학교가 끝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토리는 히토미의 진로에 대해 문득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히토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뭘 하고 싶어?"
"가, 갑자기..? 글쎄.. 나는 그냥.."
힐끔힐끔 사토리를 바라보며 수줍어하는 그녀가 바라는 건 그저 지금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옛날부터 사토리만의 아이돌이 되고 싶었던 그녀에게 사토리가 없는 미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지 못한 히토미는 되려 사토리에게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러는 사토리는 어떤데..? 역시 인문대학으로 갈 거지..?"
아버지처럼 훌륭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토리라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선택지.
히토미는 그런 사토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자신 역시 인문대학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답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그의 입으로부터 듣기 전까지는..
"아니..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업할 생각이야.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좋은 직장을 구하는 건 어렵겠지만.. 엄마가 남겨준 집도 있으니 적당한 곳에서 일찍 일을 시작하면 사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은 벌 수 있을 테니까."
그 대답을 듣고서 히토미는 깨달았다.
사토리는 대학을 다닐만한 금전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을.
분명 그가 공부를 잘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토리는 대학을 다니고 싶지 않아..?"
짓궂은 질문이었다.
그가 왜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히토미는 굳이 사토리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당연하지만 사토리는 지금의 질문에 살짝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음속으로는 대학을 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지만 지금부터 매일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학교를 다닐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응. 난 역시 바로 취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구나.."
사토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단 번에 간파한 그녀는 그 날 저녁 자신의 어머니인 카나코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토리가 금전적인 문제로 대학을 다니고 싶은데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곧장 취업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렇구나.. 사토리 군은 상냥하니까 분명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겠지.."
"엄마.. 나.. 사토리가 대학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떻게든 방법이 없을까..?"
과거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았던 자신의 딸이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카나코는 절로 미소가 새어나왔다.
"그럼 우리 딸을 위해서 엄마가 사토리 군이랑 조금 이야기 해볼까!"
자신있게 나서려는 카나코를 보며 히토미는 희망이라도 본 것처럼 어두웠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시, 실례합니다.."
"어서 와, 사토리 군."
가벼운 분위기로 사토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카나코는 진지한 이야기를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은 맛있는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정성껏 만든 요리들이 하나둘씩 비워지고 화목한 저녁식사가 끝이 난 뒤.
"사토리 군. 잠깐 괜찮을까?"
카나코는 캔맥주 하나를 들고서 조용히 사토리를 불러냈다.
"카나코 아주머니.. 의외로 술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으음.. 좋아하는 걸까..? 확실히 일이 끝나고 마시는 맥주고 조금 시원하긴 하거든. 후훗.."
단 번에 반쯤 맥주를 들이킨 그녀는 천천히 남은 캔맥주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히토미한테 들었는데 사토리 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정말이니?"
카나코 아주머니의 입에서 자신의 진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토리는 덜컥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무나 쉽게 예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네, 뭐.. 소설을 쓰는 건 일을 하면서도 가능하고.. 저번에 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확실하게 느꼈거든요.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역시 조금이나마 빨리 돈을 모아야겠다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돈이 없으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만다. 돈이 있어야 치료도 받을 수 있고 돈이 있어야 배도 채울 수 있다.
죽는 것을 각오한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돈을 모아야 한다고 사토리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깨달았다.
혼자서 히토미를 돌보는 카나코 아주머니가 병원비를 모두 내주었을 때 사토리는 정말 죽을 죄를 지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다정하게 말해주었지만 사토리 본인은 여전히 그 때의 일을 신경쓰고 있었다.
"사토리 군이 대학에 흥미가 없어서 바로 취업을 하려는 거라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지만 사토리 군은 정말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아서 취업을 선택하려는 걸까?"
그녀의 예리한 질문에 사토리는 차마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긴 정적속에서 남아있던 맥주를 모두 비워낸 카나코는 그가 괜한 책임을 느끼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나도 히토미도 사토리 군이 정말 가고 싶은 길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래.. 말했잖니? 사토리 군은 이미 가족같은 존재라고.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잘 생각해보고 대학에 가고싶으면 가고싶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렴."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사토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설거지를 하고 있던 히토미는 베란다에서 두 개째 캔맥주를 마시려는 어머니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너무 마시는 거 아니야..? 내일도 출근해야 하잖아.."
"가끔은 괜찮잖니!"
"안 돼. 이건 압수야."
"치사해.."
아직 따지 않은 캔맥주를 빼앗아 부엌으로 돌아가던 히토미는 아주 잠깐 발을 멈추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 엄마.."
그 인사만 남기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히토미를 바라보며 카나코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취하지 않아서 다행인걸.'
딸아이의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얼마만일까.
만일 사토리가 아니었다면 히토미의 웃는 모습조차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인 줄만 알았던 납치·강간과 같은 사건이 히토미에게 일어났던 그 때.
방에 틀어박혀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히토미로 인해 카나코는 세상에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사랑했던 남편이 떠나버리고 유일한 버팀목이 히토미였던 그녀에게 딸아이의 강간사건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힘들고 지쳐 더 이상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때 기적처럼 사토리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카나코는 히토미가 겪은 끔찍한 일을 사토리에게 털어놓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을 대신해서 히토미의 마음을 열어주기만을 바랬다.
안내문을 건네주고 사토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카나코는 낙담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전혀 관계없는 히토미를 위해서 노력해 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사토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딸아이를 만나러 와주었다.
굳게 닫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지만 카나코는 알고 있었다.
사토리가 돌아간 뒤에 항상 히토미의 방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사토리라면 정말 히토미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히토미의 휴대전화 번호요..?"
"응. 사치 군밖에 만나러 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괜찮다면 저장해주지 않겠니..?"
"..알겠습니다! 그럼 저장해둘게요..!"
사토리가 히토미의 번호를 저장한 뒤로 큰 변화가 없던 어느날.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열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온 딸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죄송해요.. 흐흑.."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우리 딸을 지켜주지 못해서.. 엄마가 정말 미안해!!"
잘못을 한 것도 아닌 딸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하는 모습에 카나코 역시 참아왔던 눈물을 보이며 힘껏 가녀린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그 날 이후로 히토미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아갔다.
학교는 한동안 다니지 못했지만 늘 찾아와주는 사토리와 있을 때만큼은 히토미도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 날의 기적같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쌀쌀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던 카나코는 베란다에서 소중한 딸아이가 기다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