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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성 님의 서재입니다.

삼국지 : 내가 죽어 소금에 절여지기까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필성필성필
작품등록일 :
2020.05.11 16:04
최근연재일 :
2022.11.09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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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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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356화 – 고로 하북이 시끄러워졌다(4)

DUMMY

“너무나도 고요해. 일선의 이들에게 부탁해봤는데 그들 또한 아는 게 없다고 하더군.”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찌 일선의 이들이 제일 즉각적인 위협을 앞에 두고서도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다른 것도 아니고 반으로 갈린, 그것도 물경 50만에 달하는 흑산적이었다.


애초에 신출귀몰한 이들이었고, 제 이익을 위해선 죽음마저도 우습게 불사하던 이들이었다.


하내, 하동 등을 비롯해 이미 지난날의 여러 침략을 통해 확인한 그들의 힘은 진짜였고 이를 막기 위해 내보낸 기주의 군사력 또한 매번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제와 그런 그들의 정보를 모른다?


그것도 기주 제일의 위협으로 올라선 이래, 민중봉기라는 가장 위험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 시점에?


“둘 중 하나겠지. 전선은 넓고 훌륭한 장수는 적으니 그들 중 다수가 무능하고 부패했거나 그도 아니면 진짜 소식이 없거나.”


콰앙-


“이 머저리 같은 것들이 정녕.......!”


그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에 순간의 분노와 지끈거림을 느낀 심배는 곧장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앉게.”


“이 상황에서 어찌 자리를 지킨단 말인가! 이는......!”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그러나 상을 치며 일어난 그 자리에서 날카로운 안광을 쏘아내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전풍의 기백을 확인한 심배는 이내 분한 듯 자리에 앉았다.


“물론, 너무 걱정은 말게. 그에 대한 우려로 기주목이 일전에 활약한 국의, 장합과 같은 장수들을 불러들였으니까.”


“허나!”


“물론, 그것도 기주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면 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겠지?”


“자네......”


허나 그리 앉은 자리에서 여전히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전풍을 바라보며 심배는 알게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왜?”


“뭔가를 알고 있군. 아니, 알고 있는 게 아니야. 이미 벌어지고 있어. 앞서 가솔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러하고, 설사 혼자 남았다고 하더라도 살림살이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가재도구도 보이질 않으니, 뭔가? 대체 뭐야! 뭘 숨기고 있느냔 말이야!”


“확실히, 이전보다 촉이 좋아지긴 했어.”


“말해주게, 대체 뭔가?”


“자네가 한 가지 못 본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착각이야. 그것도 이 기주 땅에 자리한 사대부들 중 다수가 자네와 같을 것이라는 그 착각.”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전에, 자네는 대저 이 땅에 자리한 사족을 뭐로 보나?”


“그냥 사족도 아닌 이 땅에 자리한 사족이라? 하북의 이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마지막 양심이라 해두지. 몇 남지 않은 고결함과 숭고함 그리고 곧음과 옳음을 그나마 지켜가는 이들일 테니, 군자행이 이를 증거한다 볼 수 있지 않겠지.”


“쯧, 지랄도 병이라더니. 그 본질은 알고?”


“본질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저들이라고 바보가 아니야, 정남. 암만 유학에 찌든 사족들이라고 그 잘난 충심에 제 모가지 우습게 내던질 정도로 멍청하고 올바른 이들이 아니라고.”


“잠깐만......, 아니, 그럼........!”


그리고 이내 그 위화감이 현실이 되었을 때, 심배 스스로가 느낀 자괴감이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알겠나? 딴에 배웠다는 것들에겐 피난을 떠나기 위해서도 명분이란 게 필요한 게야. 아랫것들 피해 도망친다고, 제 한 목숨 보전하겠다고 아랫것들 앞에 당당히 밝힐 수가 없지 않나?”


콰앙-


“모욕도 정도 것이야! 애초에 공손찬의 위협에 맞서려는 움직임을 어찌 남쪽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와 서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흑산적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이라 매도하는 겐가!”


그러나 심배에게 있어 이는 기어코 인정하기 힘든 모욕과도 같았다.


아니, 사족의 부패와 그들의 추악한 이면을 인정하긴 하나, 실상 옳음을 위해 올바른 지향점을 위해 군자행을 자처하고 나선 그들의 결단과 행동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줄 수 있는 부분이라 여겼다.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를 지켜나가는 그 숭고한 모습이야말로 암만 썩었어도 그 뿌리는 흔들림 없는 사족임을 나타내는 반증과도 같아 알게 모를 자부심마저 품고 있는 와중이었다.


뭐,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이니 그들도 궁지에 몰려들고 일어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고.


한데 이제와 그 모든 것이 아니라니, 그것도 자신과는 그 뿌리가 다른 호족 출신인 이의 입에서 이를 듣게 되니 도저히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명분도 있겠다, 실상 유우를 제하고도 갈 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겠다. 이게 왜 모욕인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유우를 제하고도 갈 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니?”


덜컥- 사르르르륵-


허나 그와 더불어 보게 된 익숙한 풍경은 이내 심배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이, 이게......”


전풍이 제 뒤에 자리한 작은 장의 문을 열자마자 엄청난 수의 서찰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으니 말이다.


“무릇 자네에게 수백 통의 서찰이 쏟아졌듯, 내게도 수백 통의 서찰이 쏟아졌지. 뭐, 나는 호족 출신인데다가 정남, 자네와 같은 대쪽 같은 인물이 아니라 겸양을 떨긴 했지만 그럼에도 외려 더 많은 사족들이 내게 이 새로운 선택지를 권했어. 뭐, 자네도 예측했을 게야. 한복의 태도에 학을 떼었다는 게지. 하지만 그 군자행은 결국 유우만을 위한, 그의 밑에서 목숨을 바쳐 진정 한을 위하겠다는 게 아니야. 아닌 말로 한복을 곤란하게 할 길이야, 비단 제 목숨 내놓는 방식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사락-


그렇게 충격을 받은 심배의 손에 전풍의 손에 잡히는 서찰 하나가 놓였다.


그것도 그리 쌓인 수백 통 중 딱히 그가 선별하고 고른 게 아니라, 그저 무더기로 쌓인 서찰 중 손에 닿는 자리에 있는 서찰 하나를 집어 준 것이었다.


그리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심배는 이를 펼쳐 들고는 소리내어 읽었다.


“원 본초는 이전부터 청류의 귀감이 될 인재로 사해에 그 명망이 드높았으니, 우리는 이번 한복의 무도함과 호족을 비롯한 백성과 도적의 무도함에 치를 떨며 우리의 터전을 떨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물론, 뜻 있는 이들이 다시금 이 난국을 바로잡기 위해 유 백안으로 하여금 한조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려 하나 이는 비단 임금이 될 재목 하나의 힘만으로 부족한 것이요, 그와 별개로 진정 이 난세에 신하된 이의 덕목을 지켜나가 그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실권자가 되어 뜻깊은 여정을 함께해야 할 것이니, 이는 그간의 세월 유 백안을 가까이서 모셔왔으며 과거 한조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또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던 원 본초의 곁에.......”


와지지직-


물론, 끝까지 다 읽을 필요도 없는 내용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내온 것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어차피 남쪽에서 일어난 민란과 서쪽으로부터의 침공이 예견된 지금, 공손찬이 남하하고 딴에 의를 참지 못한 이들이 일으킨 군자행으로 사족 모두가 한복에게 매도당하고 버려진 지금, 우리는 우리의 생존과 안위를 챙겨야 함에 그 대의명분으로 유우를 추대하고 원 본초의 밑으로 들어가 실질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족이 바로 선, 사족이 자리할 나라가 들어설 것이니 이를 통해 우리는 한복을 엄히 징치할 수도 기주목의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릴 수가 있다. 고로 우리와 함께 하자고 말이지.”


결국, 심배의 예측은 맞아 들었다.


진정 한복을 견제하고 쳐낼 요량으로, 외지인과 토호가 서로를 물어뜯게 만들 요량으로 자리를 비웠으니 말이다.


허나 그런 그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들 모두가 유우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원 본초라, 원 본초......, 그래. 내가 그 하나를 간과했다 치세. 한데 암만 그래도 어째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게지?”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선택지가 되겠지. 유우는 두말할 것 없이 이 하북 땅에서 임금 자리에 추대될 사람이야, 왕이요, 황제가 될 사람이 어찌 신하된 이들의, 새 시대의 기득권이 될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겠나? 속 보이게. 거기다 겉보기에나 좋은 공정성과 솔선수범이 되려 신하된 이들을 쥐어짜며 조르는 압제로 작용할 수도 있어. 매양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무엇 하나 핑계 없이 일을 벌일 수 없는 이들 앞에 과연 누가 그와 같은 명분을 내세워 유우의 명을 거절하겠나? 말 그대로 살아있는 군자 그 자체요, 그가 벌이는 모든 일이 군자행이거늘, 살아있는 성인이나 다름이 없는 그를 위군자들이 꺾을 수는 없는 법이야.”


“위군자라, 위군자. 실로 통렬한 비난이로군.”


“미안하지만, 세상 모든 선비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바른 소리만 하고 살진 않아. 그들 또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뭉친 집단이자 정치적으로 기반을 삼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세력이지. 결국 암만 나라와 백성을 부르짖어도 이는 임금이 내세워야 할 기반이자 임금이 휘두르는 칼과 같은 명분과 당위성일 뿐, 신하들이 이를 주구장창 부르짖는다고 이게 그들의 본질이 되는 건 아니야. 뭐, 다른 임금 같았으면 그게 먹혔을지 모르겠지만, 유우에게 통할 리 만무하다는 것 거진 모두가 알지 않나?”


“막상 유우에게 가자니 그간 숨겨온 위선의 가면이 벗겨질까 그게 또 문제다?”


“유우의 곁에 서면 진짜로 고생해야 하니까. 진짜 그 목숨 내걸어야 하니까. 그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었던 현실 속에 숨겨온 가지고 싶은 욕망조차 내려놔야 하니까. 거기에 냄새나는 오랑캐들 비위도 맞춰줘야 하고 몇 안되는 가진 것들조차 백성들에게 모조리 헌납해야 할지 모르니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바른 사람, 곧은 사람, 의로운 사람, 솔선수범하는 사람 그래 다 좋고 남들이 보기에 실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


허나 그리 바르고 곧으며 의롭고 솔선수범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생각하는 이들조차 매 순간을 그리 살 수 없고, 그러고 싶어 그리 사는 이들이라기 보단 그리 태어났고 그러한 입지 속 제가 기득권이란 개념을 놓기 싫은 것이 크다.


정작 자신들의 차별받는 행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정작 자신들과의 격차와 차등을 지워내는 일은 그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대해야 하는 것.


죽어도 높이 오르는 것을 소망하지만 죽어도 내려가는 일은 있어선 아니 되는 것.


그걸 야욕으로 드러내든 대의로 포장하든 결국 사람의 바탕은 그리 작동하고 그리 귀결되는 것이니, 또다시 역사 앞에 위선이란 선례가 대의로 포장된 탐욕의 실체가 이들의 대화를 종식시키는 화두가 되었다.


“실상 이 땅에 유학이 도래한 이래, 모든 이가 유림에 속한 이들이 되어 소위 공자가 말하는 대동 사회와 같은 선비들의 땅이 된다면야 그야 비할 바 없는 이상이겠지. 아닌 말로, 수백 년의 세월, 교화라는 이름 아래 유학이 펼쳐 온 그 모든 활동은 부정할 것 없이 하나로 귀결되네. 못 배운 짐승을 가르쳐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유림에 속한 모두가 진정 이에 찬동할까? 아닌 말로, 사례에서는 대저 왜 청류의 이들이 황보력을 밀어내고 난을 일으켰을까? 왜 그토록 유학을 숭상하는 이들이 그 공자의 이상인 대동을 거부하고 왜 백성을 위한 민생의 통치를 거부했을까? 왜 백성은 도적이 되고, 사족은 역적이 되었을까?”


물경, 40만에 달하는 이들이 서로를 죽고 죽였던 그 비참한 참극의 재림이었던 한조의 자침은 유학의 이상과 현실이 충돌한 결과였다.


“모두가 사족이 될 필요는 없지, 모두에게 공정할 필요도 없어. 그저 더 많이 배운 우리들이 알아서 각자에게 그에 걸맞은 몫을 나눠줄 것이니, 결국 세상은 사족의 손에 의해 다스려져야 공평하고 정의롭고 바른 세상이 돌아오는 게야, 그렇지 않나?”


“그러기 위해선 저 그릇된 토호들과 멋모르고 설치는 백성들이 사라져야 하고?”


“거기에 덤으로 도적들과 기주목도 같이 사라지겠지.”


그리고 지금 이 사례에서 그 일이 또다시 벌어지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사림이 화를 입어 겪은 사화의 선례를 기억하는 이들은 기가 막힌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며 자신들 대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토호를 그 자리에 밀어 넣었다.


결국, 모두가 공멸한 자리에 돌아온 사족들은 그들이 남긴 유산을 홀로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한 가지 선례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걸 알기에 심배의 눈동자는 조금 전 전풍이 내보인 그것과 닮아있는 날카로운 안광을 표출냈다.


“자네 아까 내게 일선의 이들로부터 소식이 없다고 했었지?”


“그러했지.”


“진정 소식이 없었나? 아니면 장연과 미리 입을 맞췄나?”


“...........”


그리고 마침내 심배의 추론은 확실히 그 한 가지 선례의 끝에 도달했다.


장우각과 장연 간의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장우각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기주를 먹기 위해 50만의 흑산적과 함께 내려오려면, 하여 그 전력을 쏟아내려면 필경 그와 대립하는 장연의 방해가 없어야 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를 해결해주었는가?


이 모든 것의 끝에,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이는, 그 문제를 해결해준 이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어쩐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정남.......”


목석과 같이 굳어져 그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전풍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것도 실상 그즈음이었다.


“해서, 그런 식으로 사족의 이들에게 빚을 지워두고, 그런 식으로 원 본초에게 자네의 능력과 재주를 과시할 셈인가? 정녕 그런 게야-!”


물론, 그 어울리지 않을 가식조차 분노한 심배에 한 마디에 금방 끊어져 버렸으니 그리 튀어나온 것은 결국 그간 꽁꽁 숨겨오고 억눌러왔던 전풍의 감당치 못할 본성이었다.


와장창-


그렇게 상이 뒤엎어지고 깨진 잔해들이 바닥을 굴렀듯, 심배와 전풍의 관계 또한 그리 파편화되어 부서져 내렸다.


“허면! 어쩔 게야! 아닌 말로, 세상이 급변하다 못해 순리대로 흐르는 게 아니라 이전 시대로의 회귀를, 역행을 자초하고 있어! 얼음장 같이, 날붙이 같이 차가워진 세상 속에 매양 경쟁을 부추기고 전쟁을 일삼으며 각자도생의 가치만을 최우선으로 삼고, 온 천하가 쪼개지며 흩어지고 있단 말이야! 결국 누군가는 이 난세를 끝내야 하고, 이를 끝내지 못한다면 이를 견뎌낼 힘이라도 있어야 함에 작금의 기주목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나? 이 전국이라는 세상에 하북의 중심이요, 천하를 평정할 힘이 있는 가장 큰 바탕이 되는 이 기주를 가지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늘 주변 세력의 눈치나 보며 제대로 된 평정하나 이뤄내지 못한 이가! 어찌 이 난세의 물결이 코앞까지 밀려드는 이 거친 풍랑의 앞에 기주라는 배를 이끌 선주요, 선장이 될 수 있나!”


“원 본초가 기주를 차지하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생각하나?”


“유우라는 임금에, 원소라는 실권자에, 엇나간 백성과 토호가 사라진 마당에 기주까지 집어삼키고 사족들을 통해 균형 잡힌 내각을 일굴 수만 있다면, 공손찬 따위에게 질 연유가 있나?”


“세상 모든 게 자네 뜻대로 돌아가진 않아.”


“아네, 해서 유우를 임금으로 두고 사족들을 통합할 이로 원 본초를 내세우는 걸 허락한 게야. 그 정도면 호족과의 군형도, 군신 간의 균형도 얼추 맞을 테니.”


“그 사이에 자네가 서겠다? 유우와 원소 그 둘을 조율해서, 한조라도 복원시키려고?”


“글쎄, 허나 이리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세상을 보아하니, 임금이라고 백성이라고 또 제후나 군벌과 같은 지방관이라 하더라도 꼭 뭐든 남에게 맡겨놓고 지켜보고 사는 게 아주 답답해서 그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단 말이지. 차라리 그 머저리 같은 것들, 내 조금 머리 싸매서라도 곁에 두고 조율하는 게 적어도 이 난세를 종결시키는 빠른 길이 되겠어. 같은 비극이 또다시 벌어지는 일도 없겠지.”


이는 심배의 옳음을 건드렸고 그가 지향하는 바름에 어긋났다.


그러나 그조차 전풍의 지향하는 옳음과 바름에는 부합했다.


짧게 보았을 때, 당장에 희생을 요하는 실책과 예견된 비극은 막을 수는 없는 것이나 막상 부추겨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허나 길게 보았을 때, 당장에 희생을 요하는 실책과 예견된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면 이를 부추겨서라도 한 번에 끝내야 하는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 하지만 자네가 진정 이럴 줄은 몰랐네.”


“몰랐어? 웃기는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아닌 말로, 작금의 이 판을 만든 게 누구인데! 모두가 하나 되어 붙어있던 이들 간의 사이에 누가 금이 가게 만들었는가! 정작 그 기주목 한복이 누차 언급하였듯 애초에 이 기주에서 멋대로 저들을 위한 일을 벌인 건, 그대와 같은 사족들이야! 내 어쩔 수 없이 이에 동조하여 그 판을 깔끔히 정리해준 것을 뭐? 원 본초에게 능력과 재주를 과시해?”


으지지직-


수백여 개가 자리한 서찰 위로 상이 엎어졌으니 먹물이 담겨있던 먹통이 떨어져 그 먹물이 새어나가 주변을 흥건히 적셨고, 그 와중에 깨어진 자기 조각을 짓밟으며 일어난 전풍은 현 상황과 그의 의중을 비롯한 꽤 많은 부분들을 암시했다.


“원 본초고 나발이고 당장에 공손찬에게 위협을 받는 유우를 보좌하고 그 밑에서 사족들을 통제할 이가 없는 걸 모르지 않으니까, 저들이 먼저 알아보았으나 딴에 사례에서 정적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살아남아 대업을 도모하려 했던 그 정치적 능력과 수완을 모르지 않으니까 나도 이를 허락한 게야. 그 와중에 토호 또한 부정한 것이 많고, 밀려난 사족의 이들이라도 다 썩은 것도 아니며, 딴에 때가 덜 묻고 순진무구한 이들도 있어 그래도 미래는 기대해 볼 수 있겠구나, 어차피 오래되어 곪고 썩은 거 한번은 정리하고 갈 수 있겠구나, 싶어 내가 원 본초의 기주 입성을 허락한 게야! 이번 일을 통해 사족들에게 빚을 지워둔 것도 애초에 원 본초 하나에 매달려 그에 휘둘리는 간신이 될까, 그 목줄을 채워둔 게야! 내 사족들이 썩은 걸 모르지 않으니 나름의 안배와 조정을 통해 이 하북의 미래를 준비한 게야! 한데 뭐? 그 방대하고 숭고한 대업을 그 옹이구녕 같은 눈에, 멀리 또 넓게도 내다보지 못하는 비좁은 시야도 모자라 계획성도 없고 차분한 성정도 없이 매양 그저 끓어오르는 솥단지마냥 붙 같이 화를 내며 짧디짧은 병략과 기책 밖에 내지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무시하는 거야!”


일찍이 원 역사에서도 순욱은 전풍의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여 관도 이후의 패자로 원소가 서지 않은 이유를 그가 전풍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라고 했지만, 반대로 거슬리면 그 위까지 치워버리려 하는 수그림 없는 성정을 두고 강인하나 윗사람을 거스른다 평했었다.


그는 또 심배에 대해 평하기도 하였는데 그에 대해 계획성이 없고 침착하지 못하다 평했다.


그 둘의 차이가 지금의 이들을 있게 했고, 그것이 서로 같아질 수 없는 이 둘을 확실히 갈라서게 만들었다.


“이만 가보겠네. 내 그간 자네를 오해했으니.”


“자네의 그 진실된 사족으로서의 사고가 저들에 대한 오해를 낳고 그게 지금을 있게 한 게지. 애초에 기주 땅에 별 볼일 없이 붙어있던 사족들이니 가진 게 없어 쉽게 그 기반을 버렸으리라 여겼지 않나?”


“그야 그 기반이 호족에 비해 열악하니까. 아닌 말로 토호라면 그 기반을 버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그렇겠지. 허나 사족이라도 기반을 바라지 않는 건 아니야. 되려 관점을 바꿔야지. 그리 별 볼 일 없는 기반임에도 왜 굳이 주구장창 이 기주에 눌러앉고 살았는지. 그들은 그저 또다른 토호가 되고 싶었을 뿐이야, 저들처럼 되고 싶었을 뿐이라고. 단지 사족이란 태생이, 그렇지 못한 현실이, 그저 그들에게 잇속이 아닌 다른 것을 추종하고 좇게 만들었을 뿐이야. 힘이 없을 땐 수그려야 하니까. 본성은 그게 아닌데 그런 척이라도 해야 뭐라도 떨어지고 욕이라도 처먹지 않으니까. 남들 보는 눈 신경 쓴다고, 딴에 제 체면 구겨질 일 없게 한답시고 아주 구린 짓도 아주 대단히 성스러운 대업이자 사명이며 숙원으로 포장해서 저지르지. 현실은 그저 제 딴에 죽기 싫어 도망치려고, 그 와중에 저들 홀대받는 세상 싫다고 개나발을 불면서 세상이 썩었다면서 뒤짚어 엎을 생각뿐이면서, 대저 제대로 된 실력도 안목도 재주도 없으면 뭐들 그렇게 거국적이고 민족적인지.”


“사족을 매도하는 것부터 그들을 쥐고 흔들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은 걸 보니, 그대는 확실히 호족이군.”


“그 잇속을 알면서도 이를 방관하고 뜻이 맞은 이들이 솔직한 속내를 밝히다 못해 끝내 그것이 구린 짓일지언정, 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일지언정 모두를 구하는 길임을 알기에 이를 실천하는 그 와중에도 제 고고한 청명을 지키겠다 여전히 발을 빼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을 보니, 그러는 그대 또한 확실히 사족이고.”


그렇게 그 마지막까지 서로의 배경을 헐뜯은 이들은 그리 멀어졌으니 이내 스스럼 없이 전각 밖을 나온 심배의 뒷모습이 전풍이 기거하는 저택의 정문 앞에 도달했다.


“그 정문을 나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될 게야.”


“아네.”


“그럼에도 그리 내게서 등을 돌리고 나갈 텐가?”


“그래야지. 나서서 막아야지.”


“흐하하하! 그리 사족의 입지를 비호한 이가 이제는 되려 토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 세상이 웃을 일이요, 그간 그대를 지지한 사족들이 힐난을 보낼 게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유학을 실천하고 스스로 대우를 받는 민본의 세상을, 대동의 세상을 주창하나, 결국 그 세가 미욱해 흑산적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나니 스스로 도적을 자처한 백성은 더 이상의 대의를 논할 수 없게 되겠지. 악밖에 남지 않은 이들이 악을 불러들이고 악에 물들면서 더한 악이 될 것이니, 이는 예로부터 기주 땅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는 근원과도 같은 또다른 악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 공멸의 끝에 자리매김한 공백을 채울 사족들과 원 본초가 기주에 입성할 게야. 그게 백성들의 청이건, 토호들의 청이건, 기주목 한복의 청이건 간에.”


“그 또한 알지.”


“헌데도, 그리 하겠다?”


“자네 말대로 본초의 세상이 온다면, 그런 자네를 견제해야 할 이가 누군가는 있어야겠지.”


“..........!”


“나는 자네와 달라서 사고가 깊지도 않고 심모원려한 대계를 짤 줄 아는 능력은 없지만, 그럼에도 내정과 외정을 비롯한 군무와 행정에 통달하고 일선에서 병력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할 재능이 있지. 고결하지 않은 만큼, 이미 정해진 결과와 그에 따른 승패를 용납 못하고 무모하고 고집불통인 성격 탓에 한 번 정한 걸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향도 있어. 이런 내가 마음을 먹고 깽판을 치면 그게 10만이건, 20만이건, 50만이건 그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지 못할 거라 생각 하나?”


“정남!”


“자네는 자네 식대로 원 본초에게 능력과 재주를 과시해. 나는 내 식대로 내가 지닌 능력과 재주를 과시하도록 하지. 그래도 다행이군, 그대가 유우 공과 원 본초를 조율하고 나는 그 둘을 조율하는 자네를 조율할 테니, 이 하북에서 누구 하나 그릇된 이들이 쉬이 나오기 어렵겠어. 어쩌면 유우나 원 본초가 없어도 이 하북이 조만간 저 관서의 계한과 진에 비견될 천하에 제일가는 세력으로 거듭날수도 있겠지. 아, 좋군, 그날이 빨리 오길 바라네. 하북 4주를 일통하고 남하하여 천하의 환란을 정리할 그날이 기다려져.”


콰앙- 끼이이익-


그렇게 심배의 거센 발길질에 낡아빠진 정문이 부서지듯 열렸고 그 충격에 의해 기울어진 문짝은 그가 온전히 정문을 벗어난 뒤에도 닫히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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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내가 죽어 소금에 절여지기까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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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429화 – 그때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다 상처투성이에 불과하겠지 22.11.09 525 5 18쪽
429 428화 – 나아감에 그 끝엔 오직 영광뿐인 상처뿐이 없나니 22.11.05 157 3 15쪽
428 427화 – 각자가 바라보는 그 너머의 세상, 그 끝을 향해서 22.10.29 155 3 21쪽
427 426화 – 절반의 실패와 더불어 남겨진 유산이 이룩한 진보 +1 22.10.22 171 4 16쪽
426 425화 – 백성이, 기득권이, 사족이, 관료가 아닌 군대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옳다 +2 22.10.05 195 3 21쪽
425 424화 – 실패한 시대의 이면, 이를 뛰어넘을 또다른 시대적 일면 22.10.04 159 5 21쪽
424 423화 – 미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 날개의 그것과는 사뭇 같은 이야기(3) +2 22.10.03 159 3 24쪽
423 422화 – 미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 날개의 그것과는 사뭇 같은 이야기(2) +1 22.09.28 161 3 20쪽
422 421화 – 미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 날개의 그것과는 사뭇 같은 이야기(1) +1 22.09.22 206 4 21쪽
421 420화 – 이는 공화정의 몰락인가 그도 아니면 크레타의 몰락인가 22.09.21 149 2 23쪽
420 419화 – 전조의 낙양과 다를 바 없이 붕괴하는 장안 +1 22.09.20 149 4 20쪽
419 418화 – 부패할 수 없는 자의 시대가 저물면 철혈의 재상이 집권할 시기가 찾아든다 22.09.19 157 4 24쪽
418 417화 – 마총 전투의 승리와 그 이후의 옹주 +2 22.09.15 167 3 21쪽
417 416화 – 마총 전투 22.09.15 150 2 22쪽
416 415화 – 전국책을 품에서 놓지 않은 남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2) 22.09.13 159 3 19쪽
415 414화 – 전국책을 품에서 놓지 않은 남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1) 22.09.07 208 4 27쪽
414 413화 – 승천을 해야만 하는 용의 운명 22.09.06 155 4 19쪽
413 412화 – 진한대전의 시작과 용의 출현(2) +3 22.09.04 167 5 22쪽
412 411화 – 진한대전의 시작과 용의 출현(1) 22.09.04 173 4 23쪽
411 410화 – 진한대전의 의의 +2 22.08.31 202 3 21쪽
410 409화 – 읍참진밀(2) +2 22.08.26 214 5 16쪽
409 408화 – 읍참진밀(1) 22.08.25 164 3 20쪽
408 407화 – 익주 재일의 기재 22.08.18 186 4 21쪽
407 406화 – 전쟁과 복수를 천명한 양치기 소년의 결의 +2 22.08.17 174 5 28쪽
406 405화 –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천명 22.08.14 162 4 23쪽
405 404화 – 그 정치와 전쟁의 사이, 조위와 유범의 출사표 22.08.12 155 4 25쪽
404 403화 – 진밀과 이권은 품 안의 비수요 전장의 방패이자 정치이며 전쟁이다 22.08.10 168 4 20쪽
403 402화 – 그 와중에 무엇보다 중요해진 것은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익주만의 사정이었다 +2 22.08.09 160 4 26쪽
402 401화 – 같은 꿈을 꾸는 자들을 위한 희생양과 대공황 22.08.06 179 3 22쪽
401 400화 – 실로 위험한 이들이 동화 같은 꿈을 꾸었다. 그것도 같은 꿈을 꾸었다. +2 22.08.05 190 5 19쪽
400 399화 – 복수를 천명한 양치기 소년은 들개를 이리라 속이며 이 땅에, 이 나라에 전쟁이 필요한 이유를 설 22.08.03 196 5 21쪽
399 398화 – 대나무를 입에 문 이리는 복수를 위해 누군가 던져주는 쌀밥을 씹는 들개가 되었다 22.08.02 194 2 23쪽
398 397화 – 선수 교체 22.07.25 235 3 24쪽
397 396화 - 관서대공황의 전조와 대국. 아니, 패권국의 위기(4) +2 22.07.25 219 3 16쪽
396 395화 – 붓과 낫과 망치, 벼 이삭과 월계수 잎을 두른 크고 원대한 꿈을 품은 공화국 +5 22.07.21 228 5 34쪽
395 394화 – 밀감과 감, 검독수리와 크고 원대한 꿈을 품은 제국 22.07.20 194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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