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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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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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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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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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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DUMMY

김현을 떠나보내고, 이진호는 편의점 안에 홀로 남았다. 그는 비척비척 카운터로 걸어가 만 원짜리 지폐를 턱, 올려놓고 담배를 하나 꺼내왔다.


말보루 골드. 선배들이 많이 펴서 눈에 익은 것이었다.


이진호는 담배를 한 개비 꼬나물고 익숙하게 불을 붙였다. 비록 비흡연자였지만, 선배들에게 불은 많이 붙여줬던 그였다.


“윽!”


손목의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감염자 놈이 후려친 오른쪽 손목이었다. 아무래도 인대나 뼈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이진호가 왼손으로 라이터를 잡아 들고 부싯돌을 돌렸다. 칙칙, 하지만 아무리 불꽃을 피워내도 그 특유의 매캐한 연기는 피어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탄내만 이진호의 입안에 가득 차올랐다.


“켈록켈록.”


이진호는 영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보았다. 아무래도 담배와 친해지기란 요원한 모양이었다.


이진호는 널브러진 진열대에서 에프킬라 하나와 도수 높은 양주 한 병을 챙기고 비품실로 들어갔다. 역시, 비품실 안에는 CCTV용 하드디스크가 있었다. 곧바로 하드디스크를 뽑아 바닥에 내팽개치고 몇 번이나 짓밟았다. 그걸로는 모자라, 하드디스크 위로 양주를 부었다. 기름을 부었으니, 그다음은 당연한 수순이다. 왼손에 에프킬라, 오른손에 라이터. 칙칙, 손목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이내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진호가 에프킬라를 분사했다.


화르르!


가연성 물질을 타고 불꽃이 방사된다. 방사된 불꽃은 알코올에 흠뻑 젖은 하드디스크를 맹렬히 불태웠다.


이진호가 주머니를 뒤적여 종이뭉치를 꺼냈다. 김현이 찍힌 CCTV 장면을 출력한 것이었다. 화륵, 종이는 불꽃에 휩싸여 삽시간에 타들어갔다.


따르르-!


하드디스크가 노릇노릇 구워졌을 때쯤, 화재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동시에, 천장에서 물보라가 쏟아져 내렸다. 스프링클러가 작동된 것이다.


사그라든 불꽃 밑으로 바짝 구워진 하드디스크가 몸을 드러냈다. 이진호는 다시 몇 번이나 하드를 짓밟다가, 바닥을 적신 물기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엉덩방아를 찧은 이진호는 벽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웨에엥-!


때마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쏴아아-!


이진호는 가만히 물보라를 내리 쐬며, 동료 경찰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



“야 인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원석아.”

“아니, 선배님! 우리가 지금 지 도와주는 것도 모르고 저러잖아요!”


조원석이 답답함을 못 이겨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여기 병원이다. 조용히 해라.”


강창진이 낮게 읊조렸다. 강창진의 말대로, 이곳은 지금 응급실, 그들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많았다. 환자, 보호자, 간호사, 의사 등등. 모두 숨죽인 채 이쪽을 힐끔힐끔 흘겨보고 있었다.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든, 소란스러움에 눈치를 주는 것이든, 썩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 자명했다.


“에이 쌍!”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던 조원석이 결국 제분에 못 이겨 응급실을 나갔다. 진상 하나가 나간 덕인지, 응급실은 다시 본연의 분주함을 되찾았다.


강창진이 이진호를 지긋이 응시했다. 이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완전히 돌아누운 상태였다.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 똑똑한 놈이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실탄까지 사용했으면서, 하드디스크까지 파기한 건데?”

“······.”

“적어도, 시체가 있는 이상, 실탄을 사용하게 된 경위는 밝혀야 될 거 아니야.”

“······.”

“정말 아무 말 안 할 거냐?”

“······.”

“하아, 식구라고 감싸는 것도 한계가 있어. 너 지금 당장 구속될 판이야. 그것도 반장님이 힘써서 간신히 막는 거고.”

“···죄송합니다.”


강창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30분 동안 아무 말도 안다가 처음 한다는 소리가 고작 죄송합니다, 다섯 글자가 전부였다.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괘씸했으나··· 그 말에 담긴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듣는 이조차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다.


강창진이 차마 즉답하지 못하고 할 말을 헤아리고 있는데, 뚜벅뚜벅 여럿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웬 양복쟁이 셋이 우르르 몰려왔다. 목적지는 생각할 것도 없이, 이곳 강창진이었다.


“누구···?”


옅은 경계심을 띈 채, 강창진이 물었다. 대답은 가운데의 허우대 멀쩡한 놈에게서 들려왔다.


“국정원 대테러보안국 제1팀 팀장인 김우혁입니다. 강창진 형사님이시죠?”

“아 예. 근데 왜···?”


강창진은 상대의 신분을 들었음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신분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끄집어내기 충분했다. 이를테면,


삐걱, 침대에서 꼼짝않던 이진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 신발을 신고, 뚜벅뚜벅 걸어와 김우혁에게 말했다.


“가시죠.”


그 순간, 모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먼저 이진호의 의도를 알아차린 김우혁이 신색을 회복하고 으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찔끔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했다.


“이거, 이거. 대단하신 분이네.”


김우혁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가죠.”


그가 휙 몸을 돌리자, 그를 따라온 두 명의 사내가 이진호의 양옆으로 따라붙었다.


“야! 이진호!”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강창진은 우두커니 멈춰서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



검은색 세단이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그 검은색 광택 위로 눈부신 빛무리가 드문드문 반사되었다.


차창 너머로, 김우혁은 그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했다. 서울의 야경은 건재함을 과시하듯 여전히 눈이 부셨다. 불과 10년 전, 수억 명이 떼죽임당하던 나날의 칠흑 같은 밤은 이제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만약,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이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본다면, 인류가 그 끔찍한 질병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 과정에서 보인 인류의 단합심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열렬히 설파하리라.


하지만 저 야경은 김우혁에게 전혀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아름답지 않아?”

“···뭐가 보여야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이진호의 말투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씌워진 안막안대가 빈틈없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이진호에게 보이는 건 오로지 어둠. 안대를 씌운 당사자가 공감을 바라는 심보는 조금 막돼먹은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김우혁은 말을 이었다.


“아직도 길거리엔 실업자와 아사자가 넘쳐나는데, 서울의 야경은 10년 전과 다름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잖아.”

“국정원의 요원이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반정부적인 언동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하지.”


김우혁은 선선히 인정하고는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직도 길거리엔 실업자와 아사자가 넘쳐나는 데도 말입니까?”

“필요했으니까.”


김우혁의 어조는 단호했다.


“저 멀리 바다 너머를 보라. 무너진 나라가 몇인가. 당장 우리의 이웃만 보더라도, 중국은 군벌로 인해 여러 갈래로 쪼개지고, 일본은 야쿠자들에 의해 정부 자체가 와해되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어떠한가. 우린 아직 건재하다.”


국영방송사의 아나운서가 격정적으로 외쳐댈 법한 대사를 김우혁은 담담히 읊조렸다.


“뭐 이런 국가주의적 감격은 민중을 현실에서 괴리시킨다. 그들을 마취시키지. 처참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끔.”


이진호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세상에, 국정원 요원이 한다는 말이 국뽕이라니.


“···그거 국정원 요원이 하기에는 조금 위험한 발언 아닙니까?”

“왜? 현 정부의 치적을 부정하는 말 같아서?”

“···예.”


김우혁이 피식 웃었다.


“현 정부가 자신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했다는 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난 누구보다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해.”

“이유가 뭡니까?”

“말했잖아. 필요했다고.”


아, 이진호가 침음을 흘렸다. 그는 김우혁이란 사람에 대해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동시에, 그 파시즘적 발언에 반박할 말이 수십 가지는 떠올랐으나, 이진호는 좀 더 본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제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긴장 좀 풀라고.”


정말 긴장을 풀라는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성공했다 말할 수 있었다. 김우혁이란 사람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혀서인지, 한껏 굳었던 어깨가 조금은 내려앉았으니까.


“그리고 제법 기특하기도 하고.”

“뭐가 말입니까?”

“하드디스크를 파기한 이유. 네 동료 형사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

“맞네.”


김우혁의 말꼬리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진호는 굳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동료 형사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라는 이유 외에도 ‘김현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라는 목적이 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김현을 죽일 뻔했다는 부채감의 발로라는 사실도,


전부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하여,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이번엔 이쪽에서, 김우혁을 당황케 할 만한 소재로.


이진호는 최대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순진무구한 말투로 물었다.


“그 노란 눈의 식인괴물은···”


감염자가 언급되자, 김우혁이 멈칫했다. 김우혁뿐만 아니라 앞 좌석의 요원들까지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봐도 테러리스트는 아닌 거 같던데, 당신들의 정체는 도대체 뭡니까?”


이진호가 그들의 뇌관을 정확히 건드린 건지, 차 안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이진호는 김우혁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준 것 같아 내심 흡족했다.


하지만 이진호의 예상과는 달리, 김우혁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재밌다는 듯 짙은 미소가 자리했다.


물론, 이진호는 그 미소를 볼 수 없었다.



***



철컥, 집안은 어두웠다. 장생농과 솜뭉치가 떠났나 싶어 불을 켜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달빛이 비치며 언뜻 1인1견의 실루엣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현은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지잉, 오래된 백열등이 요란스레 불을 밝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좋게 말해도, 괜찮다 할 수 없었다.


김현이 세면대를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세면대에 얼굴을 처박고 의식을 진행했었다.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꽤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진호라는 꽤 괜찮은 형사도 만났고, 감염자와도 싸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조우하기도···


누렇게 때 탄 도기가 악력을 이기지 못해 쩍, 하고 금이 갔다.


이진호니, 감염자니 하는 잡스러운 생각들은 깡그리 휘발되고, 김현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감정만이 자리했다.


두려움.


‘그것’과의 두 번째 만남 이후, 김현은 확실히 깨달았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 본능적인 깨달음에 가까웠다. ‘그것’ 또한 김현이었으니 당연했다.


김현은 강해질 것이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영화 속의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고 총알도 통하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간단했다.


나의 상실.


현재 김현이라는 객체를 이루고 있는 자아의 상실.


김현의 힘이, 능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김현의 자아는 ‘그것’에 가깝게 변모한다. 현재 김현이란 사람은 점차 사라지고, 종국엔 피를 갈망하는 복수귀만 남는 것이다.


게다가 재생의 대가는 더욱더 심플했다.


김현의 수명, 그것이 재생의 대가였다.


그러니까, 강력한 적과 싸울수록 점점 자아를 잃게 되고, 혹여나 큰 부상을 당할 경우에는 수명이 뭉텅 깎이게 된다.


고로, 아주 지랄맞은 존재였다. 네피림이란 건.


쩌적, 김현의 악력에 애꿎은 세면대가 깨져나갔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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