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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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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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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글자수 :
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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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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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4화. 비전교회 (9)

DUMMY

김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얕았다. 참회자의 목을 완전히 동강 내지 못했다.


선홍빛 촉수가 참회자의 머리를 휘감고 있었다. 김현이 목을 베어버리는 찰나, 촉수가 머리를 당겨 목 전부가 잘리는 것만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푸화학!


직격을 피했다고는 하나, 목이 3분의 1쯤 배여 붉은 단면을 드러냈다. 언뜻 새하얀 무언가까지 보일 정도였다.


이번엔 실수 따위 하지 않는다.


김현이 재차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살덩이의 폭포가 쏟아졌다.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솟아오르며 장벽처럼 그를 막아 세웠다. 그러다가 폭포의 끄트머리가 한데 뭉치더니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목표는 김현.


먹이를 낚아채는 뱀처럼 그를 향해 내리꽂혔다.



마락스가 울컥 피를 쏟았다.


그의 머리를 휘감은 촉수에서 아주 조그마한 실뱀 같은 것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곧장 목의 상처로 향했다. 그리고 단면의 위든, 아래든 머리를 박아 반대쪽으로 몸을 늘어뜨렸다. 마치 떨어지다 만 접착제의 모습을 하며, 마락스의 목을 서서히 이어붙였다.


가슴의 상처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마락스가 조심스럽게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위험했다.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했다.


턱 끝까지 다가왔던 죽음이 한 발짝 멀어지니, 직전의 상황을 반추해본다.


네피림의 공격, 그건 인지 바깥에서 홀연 등장했다.


가슴어림이 꿰뚫리고 나서야, 네피림의 존재를 인지했다. 지금의 자신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조된 영지가 각종 감각 신호를 줄기차게 보내고 있었으니.


그래, 지금처럼.


콰앙-!


분홍빛 살점이 조각조각 나 비산한다.


허공을 붉게 수 놓은 핏물은 없다. 끈적이는 유백색 액체만이 핏물처럼 늘어진다. 그 안에 있는 네피림의 존재가 똑똑히 느껴진다.


마락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잠시 의문은 접어두었다. 지금은 저, 주제를 모르는 제물부터 처분하는 게 우선이었다.


김현이 쇄도해온다.


쿵.


마락스가 발을 구르자, 주변의 살덩이가 출렁인다. 파문을 그리며 나아간다.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멈추지 않고 쭉쭉 뻗어 나간다. 김현을 지나쳐, 끝까지, 끝까지, 끝으로.


“···!”


김현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무언가 ‘깜빡’하는 순간, 교회 내부의 정경이 뒤바뀌었다.


징그러운 분홍빛 살덩이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예배당이 아니었다.


지금의 공간은 숫제 동굴 속과 같다.


아니, 동굴보다는 무언가 거대한 동물의 창자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끈덕지게 늘어지는 유백색 액체와 겹겹이 패인 주름과 같은 골들을 보고 있자면, 심증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간다.


쿠르릉-!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파도가 일듯 바닥이 출렁였다. 아니, 바닥뿐만이 아니라 벽과 천장 또한 동시에 출렁이고 있다. 선홍빛 창자가 통째로 꿀렁거리는 모양새였다.


“딱. 살아 숨 쉴 정도로, 살려만 두마.”


팔다리는 필요 없겠지, 마락스가 냉소했다.


창자가 닫힌다.


네피림의 앞뒤로, 천장과 벽과 바닥이 빈틈없이 콱 조여진다.


틈은 순식간에 좁아졌고, 네피림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제 완전히 닫히면, 분리된 공간 너머에 소화액과 저주를 쏟아부으며 네피림이 반쯤 죽기만 기다리면 된다.


창자가 완전히 닫혔다.


그리고 그 직전, 네피림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마락스의 눈에 얼핏 스쳤다.


마락스가 그의 중얼거림을 재구성해보았다.


‘한 번 더 쓰기 싫지만···?’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무엇을 한 번 더 쓰고, 또 꺼린단 말인가. 죽기 일보 직전인데. 혹여 닥쳐온 절망에 정신을 놓아버린 것인가?


그 순간.


“어?”


마락스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의 눈앞에 네피림이 있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턱 끝을 스쳤다.


갑작스레 공허함이 찾아왔다. 턱언저리가 허전해졌다.


옆을 보니, 선홍빛 골 사이에 새빨간 무언가가 박혀있다.


직전까지 그의 아래턱이었던 것이었다.


김현이 재차 손을 뻗었다.


다가오는 네피림의 손을 보며, 마락스는 죽음을 직감했다.


확정된 죽음의 선고가 채 몇 cm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다고?


네피림의 손끝에서, 지난 삶의 궤적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그것은 혜성보다 빠르거나, 굼벵이보다도 느렸다.


마락스는 죽음의 기로에 놓인 여느 사람들처럼 그 흔적을 더듬었다. 시간은 역시 넉넉하지도, 빠듯하지도 않았다.



안돼.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아버지가 없이 자랐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비는 이미 그의 곁을 떠났다.


그의 어미는 홀로 아이를 부양했다.



안돼.



아이의 13살 생일날, 아이의 어미가 죽었다.


사인은 총상. 일을 마친 뒤, 몇 푼 없는 돈으로 아이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고 돌아오던 길에, 강도를 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빨간 얼룩이 잔뜩 묻은 장난감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의 아비가 찾아왔다.



나는, 나는.



아이의 아비는 어미의 부고를 전해 받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목적이 있어서 아이를 찾아왔을 뿐인데, 어미가 며칠 전 죽었던 것이었다.


때마침 잘 되었다고, 아이의 아비는 말했다.


고아가 된 아이는 아비의 제자가 되었다. 아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아비는 스스로를 구도자라 말했다.


구도자는 이야기 속 마법사와 같은 존재라서, 아이는 ‘재(滓)’라고 불리는 마법을 아비에게 배웠다.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렀고, 아이는 장성한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컬어지기를, 신과 같은 존재라 하였다.


그들은 일컬어지기를, 우주의 섭리와 하나 된 이들이라 하였다.


그들은 일컬어지기를, 위대한 욕망이라 하였다.


구도자인 아비는, 그들의 존재를 항상 경계하라 가르쳤다.


그들은 심연의 밑바닥보다 더 깊고 어두우며, 그들에게 심취한 자들은 강력한 힘을 얻는 대신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고.


청년이 된 아이는, 아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들을 섬기고, 성총이라 불리는 강대한 권능을 손에 얻어, 23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 아비를 갈가리 찢어 죽였다.


생일을 맞이한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날부터, 아이의 이름은 마락스가 되었다.



네피림의 손이 가깝다. 죽음이 가깝다.


의식 너머로, 살덩이에 파묻힌 보티스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는 지금 반쯤 의식을 잃은 채 치유에 전념하고 있다.


보티스가 다친 모습을 보았을 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기를 잃은 레라지에의 시신 또한 선명하게 느껴진다.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이 죽음의 순간, 그녀가 어떤 고통을 느꼈는지 고스란히 전달한다.


레라지에의 죽음을 확인했을 땐, 심장에 검은 얼룩이 번졌다.


참회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스승, 혹은 부모를 죽인 패륜아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의 유대는 무엇보다 끈끈했다.


마락스는 시뻘게진 눈으로 김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분노와 좌절과 절망과 슬픔이 심장을 녹인다.


심장이, 녹아 문드러진다.


네피림의 손끝이 이마에 닿는다. 살갗이 찢어진다. 두개골이 으스러지며 안으로 말려 들어 온다.


마락스는 최초로 자신에게 구원의 빛을 내려주었던 초월자에게 다시 한번 간청했다.


그극, 그그극.


채널(Channel)을 열어젖힌다.


초월적 의지가 ‘나’를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제한한, 초월자와 ‘나’를 잇고 있는 거대한 구멍을 활짝 열어젖혔다.


백열등의 그것과도 같던 노란 빛이, 이젠 태양처럼 환하게 그를 밝힌다.


‘아, 아아.’


위대한 욕망 아래, 인간과 개미와의 간격은 한없이 얄팍해지며, 마락스는 저도 모르게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과거가 흩어진다. 진부하고 자질구레한, 끔찍한 과거가 먼지처럼 사라진다.


어머니의 얼굴도, 어머니와 마주 보던 생일 케이크 위에 초도, 홀로 장례를 치렀던 슬픔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아버지를 죽였다는 희열과 허망함도, 위대한 계획에 대한 사명감도, 동료들에 대한 애틋함도···.


모두 사라진다.


샛노란 빛으로 물들어 뒤섞인다. 그리고 태양 빛과 닮은 그것으로 수렴한다. 오로지 하나로 수렴하여 노랗게 찬연한 빛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가득 차오른다.


‘아아아-!’


마락스는 환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애 느껴본 적 없는 고양감에 허리가 활처럼 휜다. 눈동자는 정명한 황색 빛을 발하고, 입가엔 투명한 액체가 쉴 새 없이 콸콸 쏟아진다.


환희에 찬 마락스가 저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읊었다.


“아아, 바아ㄹ···.”


퍼걱.


그 순간, 그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



얼마쯤 더 걸었을까.


한 시간? 두 시간? 어쩌면 서너 시간?


태양의 운행은 이 기괴한 공간 안까지 닿지 않았고, 육신은 고갈된 지 오래여서, 이진호는 시간의 흐름을 명확히 인지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반쯤 의식을 잃어, 그의 몸뚱이는 관성으로 움직였다.


턱.


단단하지만 물컹한 기묘한 느낌의 무언가가 그를 막아 세웠다.


이진호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앞에는 벽이 있었다. 여태껏 지겹도록 보아왔던 선홍빛 살덩이와 똑같은 재질의 선홍빛 벽.


이진호의 눈빛이 변했다. 텅 빈 눈빛에 활기가 돌았다,


이내 절망으로 무너져내렸다.


“아니, 아니, 왜! 젠장, 왜!”


이진호가 벽면을 샅샅이 살폈지만, 손끝에 닿는 감각은 동일하다.


단단하고, 물컹하다. 바늘구멍조차 들어갈 틈도 없이, 여태껏 그를 좌절시켰던 망할 벽과 똑같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왈칵 샘솟는다.


“으아아아-!”


이진호가 괴성을 질렀다. 두 주먹으로 쾅쾅 벽을 후려쳤다.


눈앞의 벽은 출구도, 뭣도 아닌 여태껏 보아온, 이 통로를 이루고 있는 벽과 똑같은, 그냥 꽉 막힌 벽이었다.


“이이이! 개애애애!”


산탄총이 순식간에 3발의 총알을 쏘아낸다. 압도적인 운동에너지로 방탄복을 입은 상대마저 골로 보내는 슬러그 탄이었다. 그러나 살덩이의 벽에 깊숙이 파고들 뿐, 그 이상의 흠결은 내지 못했다.


아끼고 아끼던 잔탄이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전부 소모된다.


“씨이이바아아알!”


쓸모없어진 산탄총을 내던지고, 권총을 들었다. 두 눈이 시뻘게져서 마구잡이로 권총을 쏘아댔다.


총알이 소모될수록 그의 눈을 벌게졌고, 이젠 눈동자마저 빨갛게 물들었다.


틱.


산탄총에 이어 권총탄까지, 갖고 있던 모든 탄약을 소모했다.


이진호가 지체없이 나이프를 휘둘렀다.


살덩이를 긁어대는 나이프의 소리가 둔탁하다. 파지법도 잊은 채 되는 대로 나이프를 휘두른다. 이따금 손가락이 베여 핏방울이 튄다. 하지만 이진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이프를 휘둘렀다. 끓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나이프를 휘두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퍽!


살덩이에 나이프의 칼날이 깊숙이 박혔다.


살덩이는 나이프를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진호는 나이프를 포기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다른 나이프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쿠르릉-!


갑작스레 동굴이 요동쳤다.


바닥과 천장이 출렁이며 살아있는 것처럼 파도치고, 동굴 안의 공간이 탄성을 지닌 고무줄처럼 오그라들고 늘어난다.


이진호는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하나의 감정만이 그의 머리통에 가득 차 잡다한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쿵.


몸이 뜨겁다. 분노가, 화가 치솟는다. 머리에 열이 올라, 뇌가 지글지글 녹아버릴 것 같다. 당장 움직이지 않는다면, 온몸의 피가 모조리 증발해버릴 것만 같다.


쿵.


마치 뱃속에 거대한 용광로가 똬리를 튼 듯, 깊은 곳에서 열기가 치밀어 오른다. 쿵쿵대며 사지육신으로 뻗어 나간다. 세포 하나하나, 근섬유 하나하나에 열기가 깃들어 폭력의 분출을 강제한다. 그러고도 열기는 전부 소모되지 않아, 목구멍을 타고 올라 바깥 공기를 데웠다.


“흐으.”


분명 겨울이 아닐진대, 입가에서 뿌연 증기가 새어 나온다.


이진호가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을 타고 전달된 막대한 열기에 선홍빛 벽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마침내 이진호가 무언가로 변모하려고 할 때.


빠각.


맥빠지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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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54화. 21.09.21 14 1 12쪽
53 53화. 21.09.20 14 0 13쪽
52 52화. 21.09.20 24 0 12쪽
51 51화. 21.09.18 11 1 13쪽
50 50화. 21.09.12 19 0 12쪽
49 49화. 21.09.12 2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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