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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님의 서재입니다.

괴물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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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범
작품등록일 :
2021.01.15 13:48
최근연재일 :
2021.10.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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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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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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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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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3화. 비전교회 (8)

DUMMY

콘크리트가 부서지며 흘린 잿빛 가루가 반짝 허공에 흩날린다. 그 너머, 네피림의 눈동자가 마락스를 비춘다.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투명한 눈동자. 냉정의 낮은 온도와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것에, 마락스는 섬찟한 감상마저 받았다.


자신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네피림, 본디 제물로 점지되었지만 최악의 능력을 깨닫고 만 존재.


마락스의 본능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르릉, 울부짖는 위대한 욕망의 편린이 맹렬히 경고한다.


저건, 위험하다고.


피부로 와닿는 존재감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대하다.


만약 영지 바깥에서 마주했으면 허무하게 목을 내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마락스의 영지였고, 영지와 동조된 그는 무한대의 성총을 다룰 수 있다.


이곳에 들어온 걸 후회하게 되리라.


서로 간에 대화는 필요 없었다.


마락스가 합장하듯 두 손을 마주 부딪쳤다.


짝!


우우웅-!


박수 소리는 파장이 되어 울려 퍼졌고, 파장은 닿는 곳마다 공간을 떨어 울렸다.


다시 한번, 현실의 경계가 붕괴했다.




어둠 속에서, 살덩이가 끓어올라 조금씩 크기를 키운다.


돌가루를 먹어 치우고, 콘크리트 조각을 먹어 치우고, 바닥의 타일을 먹어 치우고, 바닥을, 기둥을, 벽을, 천장을 먹어 치운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분홍빛 살덩이가 사위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콰르르-!


살덩이의 파도가 현실을 짓뭉갠다.


수십 톤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질량의 폭격.


선홍빛 파도가 몇 개인가 벽을 부수고 예배당까지 쭈욱 밀려갔다.


김현은 사선으로 달려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육안으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의 쾌속. 쏘아지는 궤적의 끝에 마락스가 있다.


“조심!”


김현의 모습이 눈 깜짝할 새 사라지자, 보티스가 비명을 질렀다.


저 빌어먹을 고속이동에 레라지에가 손 쓸 틈도 없이 당했다. 만약, 영지의 주인인 마락스까지 당한다면···.


전부 도륙당할 미래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보티스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이곳, 교회는 마락스의 영지.


영지와 동조된 마락스의 의식은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김현이 발을 내딛고, 선홍빛 격류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과정, 그 모든 것들이 마락스의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리고 김현의 속도가 빠르다 한들, 생각의 속도보다 빠를 수 없었다.


꾸울-렁.


마락스의 의지가 물결처럼 파문을 일으킨다.


그의 의지에 호응해, 살덩이가 쭈우욱, 촉수처럼 몸을 늘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선홍빛 촉수 다발은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촉수들은 네피림 몸에 닿는 순간, 형체를 잃고 갈려 나갔다. 그의 불가사의한 방벽 앞에, 촉수는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마락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김현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그것으로 그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김현이 다시금 발을 굴러 가속한다. 한발 먼저, 천장과 바닥에서 검게 물든 손이 솟아올랐다.


여섯 개의 손가락을 지닌 썩어 문드러진 시체의 손. 그 수는 도합 스물 이상. 전부 강력한 부패의 저주가 깃들어 있었다.


김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주받은 손은 이미 지척. 피할 공간은 없었다.


퍼퍼펑!


마치 수십 개의 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썩은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



“하아, 하아.”


한 걸음, 한 걸음이 철근같이 무겁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고, 호흡은 시간이 지날수록 짧아진다.


이 정체 모를 장소는 공기가 꽤 희박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분명 수 킬로는 걸었을 터인데, 출구는 여태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후우.”


이진호가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양손을 무릎에 기대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와 같이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앉아 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벽에서 이따금 유백색의 점액질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소화액처럼 물건을 녹였고, 곳곳이 눌어붙은 흑복의 상태가 곤욕을 치른 증거였다.


천장에서 불길한 낌새를 느껴, 이진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르륵, 소화액이 흘러내리며 뿌연 증기를 뿜어냈다.


젠장.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다. 이곳이 지옥이라면, 염라대왕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이진호가 고개를 털어 잡념을 지웠다.


자꾸 화가 치밀어오른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털어내야 했다.


분노는 에너지 소모만 돋굴 뿐이다. 지금은 최대한 힘을 아껴 여기를 탈출하는 게 최우선 목표이다.


“가자, 이진호.”


잠깐의 휴식으로 마음을 다잡고, 이진호가 다시 한번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나아갔다.



***



치이익.


바닥을 뒤덮은 분홍빛 살덩이에 검은색 이물질이 흩뿌려졌다. 그것에 닿은 살덩이는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지며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꾸물꾸물.


물론, 썩어버린 부위는 금방 밀려나고 바로 새살이 돋았다.


부패와 재생의 반복으로 인해 희뿌연 증기가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주, 죽었나?”


보티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같은 참회자인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시체의 손에 깃든 저주가 얼마나 강력한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조그마한 조각이라도 닿는 즉시 살점이 썩어 문드러져 반나절도 안 되어 죽을 만한 강력한 저주였다.


그런 저주를 중첩하여 스무 번 이상 적중시켰다.


이렇게 되면 죽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라 시신의 상태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마락스! 저 네피림은 그분의 제물이야!”

“알아.”


마락스가 손을 들어 보티스를 진정시켰다.


뿌연 증기 너머 그 속을 살피려는 듯, 그가 눈매를 좁혔다. 아까의 흥분은 온데간데없이, 그의 얼굴은 냉철함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마락스가 방금 느꼈던 감각을 되새겼다.


네피림과 저주가 충돌하기 직전, 느껴졌던 이질적인 감각. 그건, 마락스 자신이 영지와 동조화할 때 일어나는 공간의 왜곡과 비슷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미세한 이질감을 주었다.


수십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가, 이내 폐기되었다. 무엇하나 와닿는 해답이 아니었다.


마락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뿌연 증기를 주시했다.


증기 너머에 있을 김현의 상태를 파악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부패의 저주는 영지 자체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쳐, 그의 감각을 자꾸만 어지럽혔다.


“어쩔 수 없지.”


마락스는 일단 의문을 접어두고,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바닥의 살덩이가 쩍 입을 벌렸다. 그리고 김현이 있던 공간을 통째로 와그작 삼켜버렸다.


부풀어 오른 살덩이는 입을 오물거리듯 몇 번인가 꿈틀대더니, 쑥 밑으로 가라앉았다.


다시금 보이는 풍경은, 용암처럼 사방으로 줄기를 뻗쳐나간 선홍빛 살덩이와 그로 인해 엉망으로 된 교회 내부. 그 외에, 뿌연 증기도, 김현도 모두 깔끔하게 사라졌다.


특별히 움직인 기척은 없었으니, 틀림없이 잡아먹혔으리라.


마락스가 긴장을 풀고 보티스에게 물었다.


“레라지에의 상태는?”

“그게···.”


멍하니 마락스가 펼친 이적을 바라보던 보티스의 안색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듣지 않아도 사실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표정이었다. 마락스의 표정 또한 덩달아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레라지에와 맞닿은 살덩이에서, 그녀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지표가 그녀의 죽음을 가리킨다.


마락스가 그녀를 의식해서인지, 살덩이가 꿈틀대며 한 시신을 그의 앞으로 운반했다.


초점을 잃어 텅 빈 눈. 탐스러운 금발은 색이 바랬고, 오른팔은 어디 갔는지 원래 자리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어깨의 단면만이 팔이 찢겨나갔을 때의 고통을 짐작케 했다.


아까 보티스의 절박한 외침을 통해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녀의 시신을 마주하니, 심사가 복잡했다.


“레라지에···.’


이리도 허무하게 죽을 여자는 아니었다. 참회자가 대부분 각자의 스승을 죽인 패륜아들이라지만, 동지애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결속력은 구도자들의 그것보다 강력했다.


마락스는 비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허나,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산 자는 산 자였다. 슬픔으로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그녀조차 바라지 않을 것이다.


마락스가 그렇게 짧은 애도를 끝으로 레라지에의 시선을 일별했다. 그리고 보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티스. 넌 치유에 전념해. 내가 돕지.”

“그, 그래.”


슬픈 표정으로 애써 대답하는 보티스의 상태 또한 썩 좋진 않았다.


단정히 빗겨넘겼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보티스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모습이었다.


꾸물꾸물.


살덩이가 꾸물대자, 보티스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점차 살덩이에 파묻히는 모양새였다.


원래라면 살덩이가 먹잇감을 녹여없앨 소화액을 분비하지만, 이번에는 소화액이 아닌 우윳빛 액체를 공급했다.


마락스가 성총을 소모해, 그의 몸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티스의 창백했던 안색에 눈에 띄게 생기가 돌았다.


얼추 상황이 정리되자, 마락스가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닥 너머 지하 어딘가에 있을 제물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역시···.”


마락스의 우려대로 제물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미 몇몇 인간은 변이를 시작했다.


몸 구석구석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보아,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애벌레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지근거리에서 강력한 성총에 노출된 여파였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정확히는 쓸모가 없어졌다.


저 인간들은 네피림이라는 최상의 제물을 대체하기 위해, 그러모은 것이었다.


즉, 네피림이 손에 들어온다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들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마락스는 지금, 네피림을 손에 얻은 상태였다.


마락스가 중얼거렸다.


“고행자들에게 도시락으로 주면 좋아하겠군.”


그것으로 인간들의 쓰임은 결정되었다.


마락스가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갔다.


먼저, 그분께 이 희소식을 알려야 한다.


네피림을 포획했다고. 이제 약속의 때가 머지않았다고.


집무실은 살덩이에 파묻혀 박살 났고, 그분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레라지에는 이제 죽었다.


이제 그분과 연락하기 위해선, 조금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재료는 전부 지하에 있으니, 적당한 의식만 치른다면···.


퍽.


짧은 파육음.


“무슨···?”


마락스는 창졸간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쿨럭.”


마락스가 왈칵 피를 토했다.


인간의 피와 같은 색을 가진 뜨거운 피가 몸뚱이에서 콸콸 쏟아져 내린다.


단단했던 가슴 어림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고, 자꾸만 마른기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온다. 입안에는 달콤하지 않은 피 내음이 가득하다.


마락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새빨갛게 물든 손이 자신의 가슴 위로 튀어나와 있다.


한 박자 늦게, 동조된 영지가 적의 존재를 알린다.


어떻게···?


마락스의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하지만 의문을 품을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적이 거칠게 손을 뽑았다. 촤악, 핏방울이 길게 흩뿌려졌다.


적이 손바닥을 쫙 펼친 채 손가락을 그러모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수도가 되어 마락스의 목을 베어 갈랐다.


푸화학!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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