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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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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연재수 :
8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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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글자수 :
47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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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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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정말로 잃어버린 것#1

DUMMY

시오르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넥스의 풍경을 눈동자 안에 담았다. 불이 꺼지지 않은 도시는 여러 색으로 뒤덮여서, 순간 마차 안에서 깜빡 졸고는 아침이 돼서야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 도시 외곽으로 난 길은 잔잔한 어둠 아래에 잠든 채로 있었다. 촛불처럼 일렁이는 도시의 따스함은, 아직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과하게 크지 않았다.


리든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큼의 감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짠내 가득한 푸르른 바닷물과 어우러지는 회백색의 성벽, 하늘을 뒤덮는 화려한 마법,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 그런 매력으로 먼저 기억에 남은, 리든을 쉽사리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구태여 비교하지 않는다면, 그 매력은 분명했다. 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펼쳐진 성벽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아담하게 갖춰진 도시는 새파란 초목과 함께 자라는 것 같았다. 벽 바깥에 놓인 밭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광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진짜 많이 바꿨네요."

"그렇지. 한 차례 큰일도 있었고."


그 말을 듣고, 시오르는 멀리에 보이는 성벽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밤이라서 보이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지만, 묘하게 석재의 색이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레쉬리안 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이 조금은 체감된 시오르. 앞서간 일행을 따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세라스가 선두로 나아간 방향에는 푸른 지붕을 한 저택이 있었다.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하얀색으로 말끔히 칠해진 집은 도시에 있는 집과 크기부터 궤를 달리했다. 도저히 한 가족이 사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크기인 것은 안다. 그가 아는 귀족은 모두 이런 식으로 지어진 집에서 사니까.


하지만, 저택 앞에 놓인 정원에는 푸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높게 게양된 리버스 가문의 상징은 펄럭이며 방문자를 환영했다. 드디어 귀족의 땅에 발을 들인다고 생각하니, 시오르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물론, 눈앞에 놓인 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사실에 쉽사리 멈출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시오르. 소감문은 들어가기 전까지 받을게."

"진짜 무진장 넓다. 정말 한 가족이 사는 거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게 끝?"

"아니, 사실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내가 이런 집에 살았었다는 게 실감도 안 나고...."

"하긴, 네 옆에 있는 레아도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시오르는 고개를 돌렸다. 레아는 자신이 정말 귀족의 저택에 온 것이 실감이 가지 않았는지, 이미 뺨이 붉게 물든 상태였다. 그 중, 반절 이상은 꼬집거나 때린 흔적이기에 시오르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레아, 갑자기 왜 뺨을."

"경비도 없고, 별도의 허가 없이 이렇게 들어오는 건...."

"아, 그건 우리가 비켜 있으라고 했어. 이런 날에 경비들 가득 세워서 뭐 하게?"

"그래도 괜찮아...?"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말한 레아의 모습은 시오르도 걱정이 다 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운이 없다며 중얼거릴 때나 하던 표정이다. 상당히 질겁한 그녀에게 다가간 시오르는, 손을 잡아주었다.


"뭐, 어때? 나도 지금은 평민이잖아. 담장이나 창살에도 꽤 강한 마법이 걸려있고.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어."

"그 부분을 신경 안 쓰는 건 아닌데...."


다만,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마치 이미 저택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벨 언니, 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야?"


레아의 말에, 일행은 모두 그쪽을 바라봤다. 빛이 없는 어두운 방향에 주저앉아서 졸고 있던 여자는 따가운 시선에 찔린 듯이 정면을 바라봤다. 분홍색 머리카락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보이지 않았지만, 레아가 그녀를 알아본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손등에 새겨진 산양 문양은, 어둠에 녹아내리듯이 검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택을 지키는 마법이나 경비들에게 걸리지 않고, 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안 나르시아는 인상을 구겼다. 비난할 듯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주저앉아있는 라흐벨을 향해 걸어갔다.


"여긴 멋대로 잠잘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알아. 하지만, 마중 나가기도 뭐하고 상태도 영 안 좋아서 좀 쉬고 있었지."


무척이나 지친 목소리였지만, 언제나처럼 날 선 듯한 라흐벨은 고개를 들었다. 화가 날 만한 일이다. 이렇게나 당당하게 자신의 집에 악마가 찾아왔다는 것은, 여러모로 좋을 거 하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두 번이나 방문한 그녀의 뻔뻔함은, 두 여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에 충분했다.


"그럼 좀 나가 있지 그래? 남의 집에 함부로 침입한 거라고."

"마법사를 안에 들였다면 그 사람의 정령도 들여라. 이 말을 모르는 건 아니지?"

"독부를 집으로 들일 바엔 원수에게 등을 맡기라는 말은 알지."


두 사람의 논쟁을 말려야 할 것 같았던 시오르는, 일찍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세라스도 도끼눈을 하고는 노려보느라, 도무지 싸움을 말리는 데에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편을 들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괜한 자극을 피하고자, 그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저기...."


살기 가득했던 시선이 그대로 시오르를 향했다. 하지만, 이내 그 눈빛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라흐벨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돌렸다.


"신경 꺼도 돼. 어차피 네 안전만 확인할 거였다고."


유독 그녀가 시오르 앞에서만 낮아졌기에, 두 여자의 싸움도 갑작스레 막을 내렸다. 저택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라흐벨은 발로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정령임을 과시하는 것만 같이, 가볍게 도약해서 저택의 문을 넘어서 지나간 뒤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좋아. 별 탈 없이 해결된 건 다행이네."

"그래도 너무 싸우지 마. 다른 사람들이 곤란해해서..."

"무른 소리 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그 여자가 악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정령 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악마 말이야."


여전히 신경 쓰는 듯한 시오르의 시선에, 나르시아는 한숨부터 쉬었다. 이제 와선 리버스 가문과 그의 관계는 소용이 없다. 라흐벨과 그의 관계가 자신들과의 관계보다 더 깊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악마를 지키려는 듯한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기 마련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렁거리는 생각은, 불쾌함을 만들어냈다.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그녀 자신이 느껴질 정도로, 참는 일이 힘들어졌다. 그 탓에 자신도 모르게 불필요한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네 걱정이나 잘해. 네가 누굴 신경 쓸 만큼, 여럭도 없으면서."

"어...."


그렇게 말하고, 나르시아는 먼저 저택으로 향했다. 남겨진 일행은 걱정스러운 듯이 시오르를 바라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서 다른 두 사람을 바라봤다.


"미안. 싸움을 말리려던 게...."

"아냐. 잘 말렸어."

"그래도 누나, 영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화나게 한 걸까?"

"잘 모르겠는걸. 걱정되면 가서 다시 사과해보자. 시온, 너무 기죽지 마."


하지만 세라스는 걱정이 깊어졌다. 화내는 일이 거의 없는 언니가 저렇게까지 화를 냈다. 라흐벨의 등장은 그렇게나 기분 나쁘고 분개할 일이다. 그렇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이 그녀에게 들었기에 걱정이 심각해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내저은 세라스는, 우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시오르와 레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자, 어깨 펴고. 기껏 너 온다고 준비 다 해놨는데, 이제 와서 도망친다던가 안 들어간다는 소리만 하지 마."


침울하고 겁 많은 레아는 그 말에, 또 자기 뺨을 살살 때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고민에 빠져있던 시오르를 부축했다.


"그럼. 시온이 있는데."

"고마워. 그럼, 가서 이야기해보자."

"좋아. 내가 보모처럼 안내할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야."


한참 걷던 중, 레아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세라스의 팔뚝을 톡톡 건드렸다.


"세라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온다는 걸 미리 알린 거야?"

"그거야, 미리 서신 보내놨지. 검사들처럼 직접 몸으로 뛰는 애들도 있고, 아예 마도구로 이런 정보를 전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수로 전했는지는 언니가 알겠지만."​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는 황백색 빛이 아려왔다. 나르시아가 열고 들어간 문으로 들어간 일행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마주했다. 황색 계통의 옷은 그들을 누추하지 비추지 않고, 한 명의 준비된 식솔로서 보이게 했다. 그 중, 빗자루를 들고 있던 남자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세라스 아가씨."

"그럼. 진짜로, 너무 피곤한 여정이었어."


그를 포함한, 네 명 정도의 하인들은 먼저 들어온 세라스를 환대했다. 재빠르게 제복의 단추부터 푼 그녀는, 옷가지를 옆에 있는 하인에게 맡기고 뒤로 돌아섰다.


"자, 드디어 데려왔다고. 어서 들어와."


저택의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다고 말하기엔 부족했다. 평범한 저택에서 볼 수 없는 대리석 바닥과 마력석을 가둔 번듯한 유리 전등은, 그 사이에 있는 풍경의 격을 높여주었다.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거대한 계단 위로, 밝은 갈색의 문이 여럿 보였고 그 사이엔 고풍스러운 가구가 가득 차 있었다.


책 속으로 접하던 세계가 시오르에게 다가오자, 그는 무척이나 감격했다. 상상했던 모습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풍경은 단순한 상상보다 훨씬 담백하게 아름다웠다. 눈에 들어오는 빛을 반사하는 눈빛은 그대로 시종들을 향했다.


시종들은 일제히, 세라스의 뒤에서 등장한 이를 보고 놀랐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해맑은 표정으로, 시오르 데피드 리버스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행색도 매우 초라해졌지만, 지금이라도 머리카락을 옆으로 가지런히 정돈하면 옛날 모습이 나올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어...어서오십쇼! 시오르 도련님."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정말로 도련님이십니까?"


시종들의 질문에 시오르는 수줍은 듯이 두 손을 모았다.


"그게.... 제가 최근 1년간의 기억이 사라졌더라고요. 제가 여기 살았던 그 사람이 맞냐고 오히려 여쭤보고 싶어서...."

"정말인가요...?"

"내가 말했잖아. 좀 곤란하게 됐지만, 조사만 끝나는 대로 복권할 거야."

"정말이지.... 잘 됐습니다...."


시종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노파는 눈물까지 머금으며 이야기했다. 이런 모습에 시오르 뒤에 숨어있던 레아도 당황하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시종에게 이런 감사 인사를 듣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그 감사는 한없는 진심투성이다.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아뇨. 그러실 것까지야."

"우선 시간도 늦었으니 얘들을 빨리 방으로 안내해줘. 내일 테사르노 쪽에 보고하고 이 녀석 상태 점검해야 해. 아, 레아 언니는 날 따라와. 옆 방이니까 가는 길에 알려주면 되겠네."

"도련님, 제가 방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여러 이야기가 들어보고 싶었지만, 확실히 피곤해서 조금은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 밝으면, 이 사람들과 빨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반기는 듯한 이들의 모습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만큼 가슴 속에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들이 찾는 시오르는 지금 없다. 게다가 위험한 일에 너무 얽힌 자신이 이 행복한 순간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직도 자신의 집이 지르빌 근방에 있는 작은 오두막인 것 같은 감정은, 어딘가 설레기보단 걱정되기도 했다. 너무 머나먼 여행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서 그런 슬픈 생각은 말자고,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작가의말

모두들 즐거운 추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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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3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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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정말로 잃어버린 것#6 19.10.17 3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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