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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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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연재수 :
81 회
조회수 :
9,387
추천수 :
82
글자수 :
474,693

작성
19.01.03 14:06
조회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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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문 앞에 엎드린 불행#5

DUMMY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책장 위에 놓은 책들은, 헤지고 초라한 것도 보였으나 대부분은 어제 새로 들인 것처럼 말끔했다. 아무 책이나 집은 시오르는 그 안에 적힌 흥미로운 사실들을 보고,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떤 책부터 볼까 아무리 고민해도,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음...."


읽어보고 싶던 마력마법이나, 단어만 들으면 신기한 구성마법 같은 서적들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시오르. 바닥에 놓인 발판을 밟고 한껏 책을 꺼낸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걸어갔다. 민간인에게 개방되는 구역은 당연히 제한이 있으나, 시오르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했다.


나선형으로 뻗은 층계와 그 사이를 이동하는 사람들은 다들 바빠 보였다. 위층에서는 마법사들이 학파를 꾸리고, 연구에 몰두하는 만큼 재료나 책이 운반됐다. 값진 비단과 윤기 나는 로브를 입은 이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시오르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들어가자, 원통형의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그 위에 늘어진 거대한 마력등과 수많은 마력석으로 유지되는 마법진이 들어오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시온. 뭐 가져왔어?"


레아가 옆에서 걸어오며 질문하자, 그는 고개를 내리고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 '마공학개론'이랑 '마력 순환의 기초'를 가져왔어."

"마공학?"

"이제 마법을 배웠으니 내 손으로 마도구 제작을 하는 게 더 편할 거야. 이를테면 보석에 마력을 주입해서 만드는 스태프라던가."

"그렇구나."


레아는 내심 아쉬운 듯,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시오르는 그런 레아가 들고 있는 책을 바라봤다.


"'저승의 광시곡'? 그건 뭐야?"

"아, 한번 보고 싶었던 책이야.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많거든."

"역시 학생은 열람 권한이 넓구나."

"뭐, 빌리고 싶으면 말만 해. 물론 수준이 다른 마법이나 계승, 계약 관련 서적은 열람이 안 되지만...."


소근거리던 두 사람은 빈자리를 확인하고 그 자리로 향했다. 시오르가 의자를 뽑자, 레아는 그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언제쯤 나가야 되는 거야?"

"병사들이 나갈 시간이 되면 알려줄 거야. 그때 나가면 돼."

"충분하려나."

"그러니까 여러 번 다닐 것 같으면 한 번에 뽑아오는 게 좋아."

"아, 그래?"


시오르는 그 말을 듣고는 책을 책상에 올려둔 채로 일어섰다.


"그럼 한 권만 더 가져올게."

"얼른 갔다 와."


레아는 살짝 손을 흔들어줬다. 점차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본 그녀는 슬쩍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보다 책 위치는 기억하려나."


도서관이 워낙 넓은 만큼, 헤매는 사람도 가끔 있다. 하지만 그녀가 불안한 것은 단지 그것 때문에는 아니다. 그저 옆에 있어야 할, 같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 불안했을 뿐이다.


반면 그런 걱정과는 다르게, 시오르는 정확히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넓은 도서관 속에서 둘러봤던 책 하나 정도야 그에겐 그닥 어려운 건 아니다. 그렇기에 단숨에 책을 뽑았던 곳으로 가서 '구성마법의 개요'라는 책을 꺼냈다.


즐거운 마음으로 계단을 돌아다니던 그는, 어디선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 방향은 입구 쪽이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던 것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사람들 무리에 섞인 시오르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무슨 일인가 쳐다봤다.


"열람 정보가 정말 이게 다야?"

"세라스, 진정해."

"하지만...!"

"쉿. 그보다 정말입니까? 무척 중요한 일이라서."


푸른색과 붉은색의 제복을 입은 여자 둘이서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에서 붉은 제복을 입은 세라스가 소란을 핀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테니언스 도서관에서 열람한 정보를 일일이 뒤질 수 없어서 이게 저희가 전해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각 층의 정보를 취합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지라...."

"아뇨, 이해합니다. 제 동생이 조금 조급해서 소란을 피운 것이니 오히려 제가 사과하는 것이 옳겠죠."


상당히 교양을 갖춘 푸른 머리의 여성을 본 시오르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무척이나 이상적인 귀족의 모습이다. 가진 직위를 무기처럼 휘두르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권위를 유지하는 격식은 본받아야 마땅했다. 만약 자신이 정말 귀족이라면 저리 돼야만 한다고 생각한 시오르였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신상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워낙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자세한 건 저희도 알려드리기 힘듭니다."

"그렇군요."


병사는 곤란한 듯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특히 세라스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당장 머리를 찍어버리겠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어서 흠칫하곤 했다. 시오르는 그런 두 귀족의 옷, 특히 팔뚝에 그려진 문양을 바라봤다. 대각선으로 늘어진 사슬을 본 그는, 어디선가 들은 적 있던 모양임을 떠올렸다.


"도서관인데 저희가 너무 민폐를 끼친 것 같네요. 가자, 세라스."

"하지만 언니, 분명 봤잖아...."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말한 두 여자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째서인가 아쉬움을 못 감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시오르에게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가려고 해도, 많은 인파 탓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안타깝다는 생각만 품은 채,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


"뭐!"


그리고 그 날 저녁, 숙소에서는 라흐벨이 반쯤 졸도하려는 듯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레아마저 흥분한 나머지, 팔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시온이 한 말이 진짜면 빨리 찾아야 해요!"

"아니, 시오르! 너 가족 설명 그렇게 주야장창 들었다며! 왜 눈치를 못 채는데!"

"하지만 제복이라던가 인상착의는 레아가 말 안 해줬다고.... 나도 레아한테 말하고 나서, 그게 리버스 가문 문양인 걸 알았어."

​"으으.... 미안해...."

"아니, 그게 미안할 일은 아니고."


다급하게, 울적해 하는 레아를 달래는 시오르. 반면 라흐벨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붙잡고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들어도 시오르의 남매, 나르시아와 세라스다. 실제로 레아가 두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설명이 미흡했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자기 가족을 못 알아봤다는 사실이 골때릴 뿐이다. 아무튼 흥분된 분위기를 잠재우고자 라흐벨은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도 거기 있으면 만날 거 아니야?"

"그런가?"

"뭘 그리 호들갑이야. 그리고 우리 출발이 그리 다급한 것도 아니고, 테사르노에 다시 보고하면 되지. 누가 들으면 먼 길 가는 줄 알겠다."


다급해하고 호들갑 떠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라흐벨은 이 일이 찝찝하게만 느껴졌다. 그녀와 나르시아 자매가 사이가 무척 나쁜 사이임은 반박하기 힘들다. 남동생을 협박하고 납치한 셈이니까. 하지만 그 외에도 뭔가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지난날의 나태 탓에 지혜가 모자란 것이 한이라는 듯, 입을 가리고 조용히 고민에 빠졌다.


"기왕이면 지금은 안 만났으면 좋겠는데....."

"누나, 무슨 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생각할 게 있어서."


레아 또한 시오르 덕에 진정한 것인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시오르는 이부자리가 잘 펴진 바닥에 완전히 누워서 멍하니 그때를 떠올렸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녀를 도우려고 했다면 그대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웠다.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남을 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하지만 끊임없이 공경해온 멋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싶었던 시오르였다. 그러니, 다음에는 더욱 용기를 내기로 다짐했다. 지금의 인연만큼 만나게 될 인연 또한 소중하다고 믿었으니까. 영웅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었다고만 들어와서 그런 것일까? 자신의 기억을 더욱 찾고 싶어졌다. 무언가 명확하게 떠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익숙한 것처럼 느껴진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가 바라봤던 나르시아에게도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곤란해하면서도 애써 웃는 그 표정. 쓸쓸한 눈빛이 레아를 닮은 것 같았다.​


자신을 찾느라 힘들었던 게 아닐까? 기억을 잃어버린 1년간, 자신을 찾아다녔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떠올랐다. 마치 선물을 받았으나, 그 내용물이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기억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들을 위해서.


"이러다가 체이든이랑 리버스 가문 헷갈리는 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다른 건데요?"


그 와중, 라흐벨의 한탄에 고개를 든 시오르. 그녀는 손가락 끝에 마력을 모아서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사슬 한 줄 꼴랑 있는 게 네 가문. 이렇게 교차한 사슬들이 체이든."

"이젠 틀릴 일 없겠네."

"잘 됐어. 내일 설마 체이든 사람들 보고 리버스 가문이냐고 묻는 건 아닐까 겁났다."

"엥, 체이든 가문 사람들은 왜?"

"내일 너한테 전해줄 게 있다고 하더라고. 테사르노에서 주는 거니까 잘 듣고."


시오르는 그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줄 것이 있다면서 잘 들으라니. 혹시나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다는 것인가 바라봤지만, 라흐벨은 자야겠다면서 방으로 걸어갔다. 레아도 잘 자라고 말하며 구석 자리로 이불을 끌고 걸어갔다.


잠깐 고민한 시오르는, 언제나처럼 누나가 말실수를 했거나 전해준다는 게 물건이 아니라 정보가 아닐까 추측했다. 마침 레아가 마력등을 끔과 동시에 방이 어두워졌다. 이제 그만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약을 먹은 보람이 있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열심히 읽은 책 내용을 정리하고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정말 즐거운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딜 가는 새로운 세계였고, 신기한 일투성이다. 나아가는 두려움보다 즐거움이 크기에 자신의 1년이 헛된 것이 아님을 느낀 시오르. 그는 그런 만족감에 서서히 꿈의 세계로 녹아내렸다.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빛은 눈치채지 못한 채.


작가의말

즐거운 새해입니다.

여러분도 좋은 한 해 되시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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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3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70 잘못된 시작들#3 20.01.23 37 0 14쪽
69 잘못된 시작들#2 20.01.16 42 0 15쪽
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66 갈라지는 비극#2 19.11.28 30 0 16쪽
65 갈라지는 비극#1 19.11.21 31 0 13쪽
64 정말로 잃어버린 것#9 19.11.14 42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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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정말로 잃어버린 것#6 19.10.17 3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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