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블러(001) - 서장(01)
프롤로그
“그대의 삶은 그대 안위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었다. 사람에게 그 능력이 주어졌다면 그 능력으로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지만 그대가 한 것은 홀로 유유자적한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큰 죄이지만 능력을 가지고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다면 그 또한 큰 죄이다. 그대에게 삼생의 환생으로 남을 위한 봉사를 명하니 그렇게 알라.”
명계를 지배하는 염라대왕은 특별한 죄인인 마유성에게 판결을 내렸다. 염라대왕은 천악만선(千惡萬善)의 영혼만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렸다.
명계는 죽어서 찾아오는 곳으로 네 가지 절차에 의해 영혼을 관리하였다. 영혼을 수거한 후에 바로 자동적인 처리를 하는 의지가 없는 무혼, 일반적인 환생을 판단하는 판별실이 1000개 있었고 백악천선(百惡千善)을 관장하는 재판실이 50개 있었으며 천악만선을 판단하는 명부전이 있었다.
그러나 명부전에 드는 것은 천악만선을 쌓은 자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준을 상회하는 강한 힘을 가진 영혼도 가게 되는데 그런 경우가 마유성의 경우였다. 인간으로 따지면 초능력을 사용하거나 신기가 강하거나 무공을 익혀 절정고수가 된 자들이 해당되었다.
어릴 적에 무당산에 들어 도를 닦았지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 45세가 되었다. 같이 입문한 사형제들이 장문인이 되고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그저 일류고수에 불과하여 제자를 관리하는 일선각의 부각주의 자리에 오르는 정도에 그쳤다.
일선각의 부각주란 직책은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되는 자리였다. 할일이 없는 그는 평상시의 생활처럼 도나 닦고 익히던 무공이나 수련하면 되었다. 다른 사형제들은 문파를 대표하여 제자들을 이끌고 무림에 나가 명성을 떨치기도 하고 문파의 중요한 일들을 하였지만 그는 그저 한명의 도사로 늙어갔다.
그렇게 다시 30년이 흐르자 활발하게 움직이던 사형제들도 장문인과 장로의 자리에서 물러나 문파의 원로가 되어 하나둘 생을 마감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이 되자 마유성도 절정의 경지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사형제들이 30년 전에 이른 경지를 그때에야 넘은 것이니 그의 능력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질긴 것이 목숨이라고 사형제들이 쓰러져 가도 그는 굳건하게 버틸 수가 있었고 장문인이 제자의 대를 지나 사손의 대가 지나고 증사손들이 장문인이 되고 장로가 된 오년 후에야 생을 마감할 수가 있었다. 그때 나이 140을 넘는 나이가 되었다.
뒷방의 늙은이가 되자 천덕꾸러기가 되었지만 도문의 미덕 중에 하나가 장수이기에 문파의 고령자들이 다 죽자 그때에야 어른대접을 받았고 젊어서 누리지 못한 권세를 누렸다.
그나마 적전 제자였기에 무당의 비전인 태극심법과 태극혜검을 사부로부터 배워두었고 나중에 깨달음이 몇 번 있어 대성을 하였으니 실전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문파의 최고 고수로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증사손이 장문의 자리에 오를 때에 문파의 최고어른으로 태극혜검을 한번 시전하여 제자들의 눈을 뜨게 만들어 준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막 대성을 한 후라 그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고아인 명시현은 재수가 없었다. 항상 뭔가 하면 잘 되는 것 같다가 나중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동네 약방에 제자를 빙자한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지만 일 년 먼저 들어온 사형에게 십오 년 동안 시달림을 받았다.
그런 대접이 싫어 취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약방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듯이 황도에 와서 내의원에서 주관하는 의관의 선발에 응했고 끝자리나마 등과를 했다.
그러나 성적도 변변찮고 아무런 연줄도 없는 명시현이 내의원에 들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군의로 변방인 감숙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군의란 조정에서 군영에 보내는 의원으로 소속은 내의원이지만 병사들의 병을 수발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의과에 응시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이미 응시하여 등과한 이후에 가기 싫다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명시현은 나이 스물다섯에 감숙의 오지인 명계현에 임관하여 무려 이십 년 동안 오천의 군사를 치료하였다. 종팔품 미관이던 직급은 시간이 흘러 종칠품으로 두 단계 승차하였고 도회지인 난주로 자리를 옮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옮긴 곳은 더한 곳이었다. 난주에 위치한 감숙의 포정사 휘하에는 구민관이라는 백성을 위한 의원이 존재하였는데 의원은 셋 밖에 되지 않았다. 구민관은 두 곳에 존재하였는데 한 곳은 포정사가 집무를 보는 성청의 바로 옆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빈민가인 만덕로에 있었다.
구민관주는 정7품 판관으로 본관에 있어야 했고 한 의원은 이제 막 등과한 신참이라 구민관주에게 수습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만덕로 분원에는 그가 가야 했다.
만덕로 분원은 의원이 있을 때보다 비어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것은 그곳에 근무하라고 의관을 보내면 오래지 않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병영에만 있다 보니 그리 돈을 모으지 못했고 늦은 나이에 얻은 부인과 애들까지 딸린 상황이라 당장 그만둘 수가 없어 난주에 자리를 잡으면 움직일 요량으로 갔다.
그나마 그의 전문이 침구술이라 치료하는데 약값은 별로 들지 않아 마음대로 치료를 해줄 수가 있었다.
그렇게 간 만덕로는 결국 그가 죽어서야 떠나는 자리가 되었다. 십년이 지나자 만덕성자라는 이름뿐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환갑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의가라고 차린 곳도 만덕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가 떠나자 더 이상 오지 않는 의관으로 인해 분원이 없어지고 말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죽는 순간까지 이십여 년을 빈민들을 고치다가 죽었다. 평생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해 좋은 음식을 먹어보지도 못했고 고운 옷을 입어보지 못했다.
“그간 많은 선을 쌓았지만 전생의 업을 탕감하기는 미흡하구나. 그러니 예정대로 두 번의 업을 더 쌓도록 하라.”
죽어 염라전에 갔지만 전생의 업을 벗을 수는 없었다.
“이 몸의 팔자는 세상의 상팔자로다.”
멍석이 깔린 곳에 줄을 매고 올라서서 이제 갓 어린 티를 벗은 열댓 살 먹은 소년이 줄 위에서 부채를 펼치고 깡충 뛰어 내려서더니 다시 사설을 이어갔다.
“난 이 나이 되도록 뭔가 잃어본 적이 없소이다. 가진 게 이 몸 하나니 잃을 것이 없지요.”
짐짓 노인의 흉내를 내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였다. 장내에 모인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일각 여를 줄 위에서 놀다가 내려온 소년의 얼굴에는 땀이 가득하였다.
그러다가 곧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이렇게 어기적거리면 어떻게 하느냐? 모두 기다린다.”
소년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험악하게 생긴 자에게 끌려 포장이 쳐진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조금 있다 험악한 남자와 같이 나온 것은 아리따운 색동저고리를 걸친 여자였다.
“흐흐, 고것 참 예쁘다.”
여자가 마당으로 가자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들은 마루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일곱 살에 곡마단에 팔려와 이제 열일곱이 되었지만 키는 자라지 않아 또래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였고 생긴 모양은 곱상하여 여장을 시켜놓으면 여자로 보였다.
곡마단에 여자를 두기도 하였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였고 집적거리는 남자들이 많아 예쁜 여자를 둘 수는 없었다. 있다고 해도 오래지 않아 힘깨나 쓰는 양반들에게 뺏기기 일쑤였다.
그러니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년들이 여자역할을 해야 했고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있는 마루가 계속 마당극 중의 여자 갑분이 역을 해야 했다. 줄을 타고 재주를 부린 후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마당에 나서 다시 마당극을 시작하는 마루였다.
줄타기 스승인 꼭두는 이년 전부터 다리가 불편해 이제 줄타기는 마루의 몫이 되었다.
마루가 하는 갑분이 역은 주인공이라 힘이 들었고 극중 내내 쉬지도 못하였다. 극이라야 허접스러운 삼류 신파극으로 좋아하는 갑돌이가 있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마름에게 끌려가 도지대신에 억지로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그도 못해 늙은 진사의 수청까지 들다가 이를 알게 된 갑돌이가 진사 집에 쳐들어가 문 앞에서 몰매를 맞고 버려지고 한족에서 갑돌아가 맞아 죽는 와중에도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수청을 들면서 웃음을 머금고 술잔을 따라야 하는 상황을 구슬픈 해금가락 속에 해내야 했다.
그러나 최진사의 마누라에게 들키고 속옷 바람에 쫓겨난 갑분이에 돌아온 것은 가족들이 붙여먹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것이다. 가족들과 마을을 벗어나다가 마님의 사주를 받은 머슴들에게 가족들이 맞아죽고 숲으로 끌려가 온갖 못된 짓을 당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결국 갑돌이의 시신이 버려진 곳에 버려지는 것으로 극이 끝났다.
마루는 50년의 세월을 곡마단에서 보내었다. 나이가 들어 왜소한 노인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꼽추의 모양을 흉내 내고 있었다. 멍석을 둘러싼 지켜보는 사람들은 배꼽을 쥐고 웃고 있었다.
극을 하는 노인은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흔들림이 없이 극을 마치고 마당에 갈린 큰 덕석(짚을 엮어 만든 멍석)을 벗어나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있는 곡마단의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바닥에 힘겹게 앉은 노인은 모로 쓰러지고 말았고 옆에 앉은 사람이 노인을 굽어보다가 손으로 얼굴에 대보더니 소리쳤다.
“마루 노인이 죽었나 봐.”
죽은 마루 노인은 염라전에 다시 갔다.
“그만하면 업은 씻은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내려진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는 일, 예정된 대로 환생을 하여라. 특별히 생을 마치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Comment ' 50